331화. 우지(牛智) (1)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명왕의 시선을 덤덤히 받아넘긴 준혁.
“오래전 전왕문의 신배란 자가 비슷한 물건을 손에 넣었다 들은 바가 있습니다.”
“뭐라!!”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지, 명왕 주변의 대기가 잘게 떨려옴이 느껴졌다.
“혹, 명왕지보는 피리 형태의 법기가 아닙니까?”
“맞네!! 정말 그자가 그 물건을 손에 넣었단 말인가?!”
준혁은 자신의 공간대에 고이 모셔져 있는 물건을 떠올리며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우연히 그자가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불타는 사막의 유적과 관련된 물건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얻은 피리가 명왕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고.”
급하게 짜 맞춘 이야기였지만, 얼추 사실과 들어맞고 있었다.
파앙-
준혁의 말이 끝난 직후, 명왕은 분노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당장 안내하게! 당장! 전왕문이라면 뇌명숲 너머에 있는 곳일 터, 내 바로 움직여야겠으니!”
‘백랑족의 일을 모르는구나.’
자신이 가진 물건이 진짜 금지의 열쇠인지 확인이 필요했던 준혁은 확인 작업이 끝나자 송구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진정시켰다.
“이미 그곳엔 아무도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전왕문은 백랑족의 핏줄인 조말랑 수사를 제물로 사용하려 한 죄로 이미 태백랑께서 그곳을 초토화시켜 버렸습니다.”
“그럼 그에게?”
전리품의 행방에 대한 오해가 생기기 전, 준혁은 고갤 저으며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태백랑께서 그곳을 방문했을 땐, 이미 전왕문이 피신한 후였습니다. 당연히 신배란 자도 잡지 못했을 테고요.”
“그래? 그래도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순 없지! 누구에게 있는지 안 이상, 전 대륙을 뒤져서라도 찾아내야 하네!”
“그럼 이렇게 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준혁은 자신의 말로 인해 괜히 피해를 보는 이들이 생겨나지 않게 하기 위해, 상대의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빨리 말하라는 듯 붉어진 얼굴로 노려보는 명왕의 시선에 준혁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다만, 차분한 표정과 달리 머릿속을 맹렬히 회전했다.
“현재 전왕문이 자리했던 곳에 저와 가까운 이가 새로운 문파를 세웠습니다. 제가 그리 부탁했는데 왜인지 아시겠습니까?”
“빨리 말하게.”
“전왕문은 평생을 뇌명숲을 이용해 발전해 왔습니다. 지금은 태백랑의 화가 미치기에 도망쳤지만, 결국 돌아올 거란 뜻이지요. 저 역시 그들에게 받아야 할 빚이 있기에 미리 준비시켜 놓은 것입니다.”
태식이 문파를 재건하면 언젠가는 전왕문주가 찾아올 테니, 모든 게 거짓은 아니었다.
실제로 시간이 흐르고 태백랑이 더 이상 손을 쓰지 않는다는 것 알면 슬금슬금 나타날 게 분명했으니까.
“빚?”
“저 역시 조말랑 수사와 함께 유적을 여는 제물로 사용될 뻔한 추억이 있어서 말입니다.”
“흐음…. 그런 일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가만히 있을 수 없네. 그자가 언제 돌아올지 알고 보고만 있는단 말인가? 우리는 한시가 급한 것을.”
대화의 흐름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자 준혁은 마지막 제안을 꺼내 들었다.
처음부터 의도한 건 아니지만, 명왕에게도 도움을 주면서, 태식까지 보호할 방법을.
“허나 그들이 어디에 있는 줄 알고 찾아 나선단 말입니까? 차라리 이렇게 해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말해보게.”
“명왕의 이름으로 선포하십시오. 뇌명숲을 오고 가는 이들을 위해선 전왕문이 했던 역할이 꼭 필요한 일이니, 앞으로 그곳에 자리 잡은 이들을 지지하겠다고 말입니다.”
“지지?”
“아마 그렇게 하신다면 도망갔던 이들이 소리소문없이 합류하려고 할 겁니다. 지금 전왕문을 대신하고 있는 이들도 전왕문이 버리고 간 하급 수사들이니까요. 결국 자신의 밥그릇을 찾고자 돌아올 겁니다.”
“흐음….”
명왕이라는 뒷배가 생기고 안전만 보장해준다면 반드시 도망간 이들이 전부 돌아올 거란 얘기.
준혁은 태식을 보호하는 수단을 마련함과 동시에, 적당한 기회에 명왕지보를 건네 우호를 돈독히 할 생각이었다.
소문이 퍼져나가면 진짜로 전왕문주가 문도들을 데리고 방문할지 모르지만, 그건 그것대로 환영할 일.
몇몇 고위 수사들만 제압해 버리면, 전왕문주 휘하의 수사들을 빨아들일 수 있을 테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태식의 문파는 예전 명성을 빠르게 되찾을 테니 말이다.
준혁은 고민하는 명왕에게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제 사람들이 그곳에 있으니, 그들이 돌아오는 대로 물건을 회수해 보내드리겠습니다. 어떠십니까? 제 생각엔 전 대륙을 뒤지고 다니는 것보다 훨씬 빠를 것 같은데?”
“정말 그렇게 해줄 텐가?”
의심과 염려가 섞인 듯한 명왕의 눈빛에 준혁이 확신을 담아 말했다.
“물론입니다. 대신 그때가 되면 저를 우지란 자와 꼭 대면시켜주셔야 합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만약 그것을 찾아만 준다면 내 살아있는 동안 자네가 도움이 필요할 때 무슨 일이든 돕겠네!”
어느새 친근해진 명왕의 목소리에 준혁은 환하게 마주 보며 웃어주었다.
***
명왕과의 밀담이 끝나자, 그는 우호의 표시로 봉황족의 고위 수사들을 불러서 준혁과 소개시켜 주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고위 수사들 대다수가 모이자 인족들의 연회 비슷한 걸 열어 축제를 선포하기까지 했다.
모든 게 인족인 준혁을 고려한 명왕의 감사 인사.
하지만 정작 축제를 가장 즐긴 건 태백랑 교천묘였다.
“와하하, 내 살다 보니 봉황족의 환대에 축배를 드는 날이 오다니! 마시자!”
태백랑은 명왕이 준비한 선주들을 쉴새 없이 들이켰고, 기분이 좋아서인지 같은 영수족임에도 경원시했던 봉황족 수사들에게 가르침을 내리기까지 했다.
“해서 너희 종족은 가진 기운을 억제하기보다 폭발적으로 운용해 외부로….”
그렇게 연이어 며칠을 이어가던 축제 도중, 준혁은 소화여와 조호랑을 대동한 채 봉황족의 터전을 구경하고 싶다는 의견을 내비쳤고,
“내 안내할 이를 붙여주지. 궁금한 게 있으면 무엇이든 물어보게.”
“아닙니다. 대황대륙에 처음 방문해 견문이 너무 부족하기에 영수족이 사는 모습을 눈에 담고 싶은 것이니 그리 신경 써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도 어찌 혼자 보낸단 말인가?”
“혼자라니요? 여기 제 여인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들과 소소한 얘기도 나누며 걷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니….”
“허허, 좋네! 좋아. 아쉽군. 내 슬하에 자네와 어울리는 아이가 없다는 게.”
준혁은 수줍어하는 소화여와 잽싸게 옆으로 와 팔짱을 끼는 조호랑을 대동한 채, 명왕의 허락하에 따로 축제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
태백랑도 준혁이 두 여인만 대동한 채 조용히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고는 눈초리를 가늘게 뜨며 음흉한 표정으로 웃기만 했다.
잠시 후, 축제장을 벗어난 세 명은 숲 곳곳에 퍼져 마을을 형성한 채 살아가는 봉황족의 삶을 천천히 눈에 담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길 한참.
그동안 함께한 시간이 있어서인지, 준혁의 태도가 평소와 다름에 소화여가 먼저 얘길 꺼냈다.
스르륵-
동시에 얇은 막이 주변을 감쌌다.
“제 여인이라…. 대인께서 저를 그리 불러주시니 나쁘지 않네요. 하지만 진짜 이들을 살펴보시려고 하신 건 아니시겠죠?”
준혁은 기감으로 소화여가 만든 막이 제대로 소리와 기운을 차단할 수 있는지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다행히 두 분께서 자연스럽게 연기를 해주신 덕에 별 의심 없이 명왕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궁금하단 눈으로 바라보는 두 여인.
그들은 믿을 수 있었기에 준혁은 사실을 말해주었다.
“현재 봉황족의 금지는 명왕을 비롯한 누구도 왕래할 수 없게 봉쇄된 상태라고 합니다. 허나 저는 우지라는 자를 만나야 하니 이렇게 몰래 움직이지 않고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봉쇄된 상태라면서요? 그곳에 갈 방법은 있으시구요?”
걱정이 담긴 눈으로 조호랑이 반문하자, 준혁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적마도를 꺼내 보여주었다.
‘진실은 알려준다 해도, 비밀은 아는 자가 적을수록 좋겠지.’
준혁이 꺼낸 붉은 장검을 본 두 여인이 무언갈 깨달은 듯 손뼉을 마주했다.
“아…. 그렇죠. 최 선사껜 적마가 있었죠.”
“그렇습니다. 되든 안 되든 우선 적마의 힘으로 상황을 해결해볼 생각입니다. 다만 금지라고 불리는 곳을 허락도 없이 제 마음대로 드나드는 건 결코 이들이 반길 만한 상황이 아니라….”
파앗-
말을 끝맺음 함과 동시에 준혁 옆으로 그와 똑같이 생긴 분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분광소의 능력을 이용했기에, 가까이에서 마음먹고 확인하지 않는 한 절대 알아볼 수 없는 분신.
준혁은 손가락에 의지를 담아 분광소의 이마로 흘려보내며 동시에 무영기를 이용해 자신의 기운을 완벽하게 차단했다.
그리고는 상황을 눈치챈 듯한 두 여인을 향해 웃으며 설명했다.
“대충 짐작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혹시. 이 분신과 함께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벌라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명왕이 규선에 이르렀다고는 하나, 제가 가진 공법이 특수하기에 절대 알아차릴 수 없을 겁니다.”
봉황족 영토 전체가 명왕이 상시로 운용하는 영역의 범위.
언제 어디서든 그가 원한다면 준혁의 행동을 면밀히 살필 수 있을 게 분명했다. 그랬기에 준혁이 축제장을 벗어나는 것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터.
“두 분께선 지금처럼 제 분신과 함께 제가 돌아올 때까지 계속 움직여주시면 됩니다.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
준혁에게 마음이 있던 두 여인은 당연하게 그의 부탁을 받아들였고, 명왕이 의심하지 못하게 은은하게 자신들의 기운을 흘리며 분신에게 밀착했다.
준혁은 곧장 용천무의 날개를 꺼내 공간으로 숨어든 후, 두 여인이 분신과 자리를 떠나자 빠르게 움직였다.
‘금지가 위치한 곳은 명왕의 거처로부터 북쪽.’
축제를 즐기며 몇몇 고위 수사에게 유도 질문을 쏟아부으며 알게 된 사실을 상기하며 곧장 북쪽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소리 없이 이동하길 한참.
겉보기엔 다른 장소와 같은 평범한 숲이지만, 기질 자체가 상이한 장소를 찾아낼 수 있었다.
‘다행히 아무도 없구나.’
혹시라도 명왕이 눈치챌까 봐 조심스럽게 기감을 퍼트린 준혁은 금지로 의심되는 일대에 어떤 기운도 감지되지 않음에 안도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 예전엔 금지였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누구도 출입할 수 없으니 지키는 이가 없는 게 이상하진 않았다.
‘그래도 모르니.’
하지만 지키는 이가 없다고 보는 눈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기에, 공간의 틈에서 나오지 않고 숨어있는 그대로 적마를 발동해 상이한 기운이 느껴지는 지하의 공간으로 순간이동을 감행했다.
파앗-
그 순간, 준혁이 머물던 근처에 황금빛을 띤 눈알 두 개가 둥둥 떠오르더니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한참 동안 주변을 둘러본 눈알은 준혁이 적마를 이용해 무시하고 지나가 버린 직선상의 길을 예의 주시했다.
“흐음 이상하군, 분명 결계에 무언가 접근한 거 같은데…. 아무것도 느껴지질 않는다니. 내가 예민한 건가?”
고민에 찬 목소리를 흘리던 눈알은 둥둥 움직여 준혁이 숨어있었던 장소로 이동했다가, 다시 한번 주변을 살펴보고는 또 한 번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는 멀리 축제가 열리는 방향으로 시선을 두다가 준혁이 소화여 등과 사라진 방향으로 천천히 시선을 움직였다.
“이 친구는 무얼 하고 있나 자세히 좀 봐볼까?”
그리고는 공중에서 팍하며 자취를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