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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330화 (330/408)
  • 330화. 백랑족으로 (3)

    준혁의 제안이 이치에 맞는다고 여겼는지, 교천묘는 더는 혼사에 대한 거론 없이 일행들을 이끌었다.

    준혁의 거듭된 재촉으로 빠르게 북쪽으로 향한 그는 검은 두더지족의 영토를 피해 가지 않고, 직선으로 가로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지? 태백랑이라 하여 이렇게 오만방자하게 군다면 곤란한데.”

    결국 얼마 날아가지 못하고, 암왕이라 불리는 자를 마주해야 했다.

    암왕은 마족과 비교될 정도로 피부가 거뭇거뭇하고 안색이 어두운 사내였는데, 눈빛만은 광명정대하게 빛이 났다.

    “어이, 대부심. 그게 말이야 사정이 있어서.”

    잠시 후, 교천묘에게 상황설명을 들은 암왕이 앞으로는 주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그렇게 잠시 지체되었던 일행은 다시금 속도를 올려 숲을 가로질렀다.

    -조호랑 수사, 조금 전 암왕이 말한 것이 무얼 뜻하는 겁니까? 태백랑은 백랑족의 큰 어른이란 뜻 아니었습니까?

    준혁은 두 왕의 대화 중에 유난히 ‘태’라는 단어를 직위처럼 말하는 모습에 의문을 드러냈다.

    -정말 저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시는군요, 하긴 비승한 후 관심이 없었다면 그럴 수도 있겠어요.

    예전보다 한껏 친절해진 조호랑이 말을 이었다.

    -여덟 왕께서는 천 년에 한 번씩 수행을 겨루고, 가장 강한 분께 ‘태’를 부여해요. 할아버지께서 태백랑이 되시기 전엔 언제나 명왕께서 태를 사용하셨죠.

    -아! 그런 뜻이, 그렇다면 지금 저희가 찾아가는 그자가?

    -그래요. 태봉황이라 불리던 봉황족의 수장, 예전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분이 그분이셨죠. 가장 먼저 신선에 오를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가 나왔을 만큼.

    ‘봉황족? 명왕이 봉황족이었단 말인가?’

    종족 이름 앞에 ‘태’를 붙인 명칭의 유래보다, 명왕이 봉황족이란 말에 관심이 간 준혁.

    그가 알기로 독고제의 영수였던 주작 역시 봉황족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물건.’

    조호랑이 전해준 이야기에 공간팔찌 안에 고이 저장해두었던 ‘명왕지보’를 떠올린 준혁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자와 인연이 닿을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

    초록의 숲이 끝없이 이어진 곳.

    그곳의 상공을 몇몇 인사들이 초음속을 돌파하며 지나가고 있었다.

    빠른 이동을 위해 비행법기를 배제한 채 자력으로만 날아가는 일행은 준혁을 포함한 교천묘 무리였다.

    어느덧 암왕의 영토를 지나 명왕의 영토에 근접하는 그 시점.

    준혁은 아마르곤을 걱정하는 마음 한편으로 주서령에 대한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조호랑과의 혼인이 온전히 자신의 뜻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스스로 선택한 건 분명한 일.

    주서령이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지 한편으로 걱정이 되었다.

    여서령으로 살아온 날보다 주서령으로 살아온 날이 많은 그녀였기에, 생각의 정리를 마치고 나면 어떤 판단을 내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헤어지기 전 마지막에 보여준 그녀의 감정은 분명한 호감.

    그 호감이 자신이 혼인을 올리고 난 후에도 변하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었다.

    조호랑에게도 이와 같은 얘길 꺼내 보았지만, 그녀는 오히려 뭐가 문제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었다.

    영수족은 수행에 걸맞게 여러 반려를 맞이하는 게 보통이었기에, 애초에 가치관 자체가 달랐다.

    인족들도 수많은 반려를 거느리는 자들이 즐비하긴 했지만, 준혁의 혼인관 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걱정이 앞서는 것이었다.

    ‘그래, 변명할 필요는 없겠지. 사실 있는 그대로 말하면 될 뿐.’

    허나 준혁에게 닥친 고민거리는 그것뿐이 아니었다.

    주서령을 만나고 온 뒤로 유난히 눈에 보이게 호감을 표현하던 소화여. 그녀가 이제는 대놓고 호감을 드러낸다는 것.

    그녀는 준혁이 조호랑과 혼인하겠다는 말을 꺼낸 뒤부터 적나라하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준혁은 심란한 마음을 다잡지도 못하고, 주변 상황에 점점 머리가 아파져 옴을 느껴야 했다.

    ‘수행을 올리는 건 이런 것에 비하면 고행이라 할 수도 없겠어….’

    그때, 준혁의 고민을 일시에 날려버릴 만한 말이 교천묘에게서 흘러나왔다.

    “다 왔다. 저곳이 명왕의 영토. 우지가 숨어있는 곳이다.”

    드디어 아마르곤을 구할 방책을 얻을 수 있는 곳에 다다랐다.

    ***

    명왕의 영토에 발을 들인 교천묘는 어딘가로 영기파동을 퍼트리더니 말없이 대기했다.

    잠시 후, 이곳저곳에서 봉황족 수사로 보이는 이들이 하나둘 나타났고, 곧이어 하늘에 붉은 그늘이 생기더니 그곳에서 고아하게 생긴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은 척 보기에도 규선급 강자로 보일 만큼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신가?”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그대는 여전하군. 그래, 태백랑께서 이 누추한 외곽까지 무슨 일로 오셨을까 궁금하군.”

    상반되는 기질을 가진 두 사람의 대화는 묘하게 주변을 무겁게 했다.

    “그래, 본론부터 꺼내는 게 좋겠지. 자네와 함께 지내는 이 있잖아? 우지, 그자 좀 만났으면 하는데?”

    “우지? 흐음.”

    “그래, 여기 내 손녀사위가 그를 좀 만났으면 해서 말이야.”

    “손녀사위? 저 인족 말인가?”

    두 사람의 대화로 인해, 좌중의 시선은 준혁에게 모였다.

    준혁은 명왕의 시선에 앞으로 나서며 몸을 숙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부탁을 들어줄 것 같진 않구나.’

    우지라는 이름이 나왔을 때부터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명왕의 모습에 준혁은 빠르게 계산을 끝마쳤다.

    대부분의 고위 인사는 한 번 내뱉은 말을 다시 번복하는 데 매우 인색했으므로, 거절의 뜻을 비치기 전에 그를 설득할 생각이었다.

    “명성은 익히 들어왔습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최준혁이라 합니다.”

    말을 내뱉으며 은연중에 주작의 기운을 흘리자, 명왕뿐 아니라 교천묘도 깜짝 놀라 준혁을 확인했다.

    “자네…. 평범한 인족이 아니군. 우리 봉황족의 기운이 느껴져. 어찌 된 일인지 물어도 되겠나?”

    예상했던 대로 상대가 관심을 보이자, 준혁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교천묘의 궁금증도 풀어줘야 했으니 사실을 조금만 왜곡했다.

    “저는 비승 수사입니다.”

    “호오, 그래서?”

    “제가 비승한 곳은 옛 구지대륙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곳이었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사신이라 불리던 이들의 유적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봉황족과 인연이 있으신 주작 선사와 백호족의 수장이신 백호 선사를 만나 뵐 수 있었고, 제 체질이 혈맥을 다루기에 적합하다 하여 그분들의 진전을 조금이나마 잇게 되었습니다.”

    준혁의 설명에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명왕이 틀린 부분을 지적했다.

    “자네가 만난 그분은 인연이란 말로 설명하긴 부족하네, 우리 봉황족의 시조시니까.”

    ‘역시.’

    어느새 경계의 태도가 누그러진 상대의 목소리에 준혁은 주작의 힘을 드러낸 자신의 판단에 만족했다.

    그리고는 상대에게서 주작에 관한 자세한 질문이 쏟아지기도 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이걸 받아주시겠습니까?”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호감을 확실하게 굳혀야겠다고 생각한 준혁은 곧장 빈 옥간 하나를 꺼내 이마에 가져갔다.

    잠시 후, 옥간 안에 주작에게 받았던 기억을 온전히 담아 명왕에게 건넸다.

    “이건?”

    “그분께서 이런 일을 예상하진 않으셨겠지만, 그분이 남긴 것을 후인에게 전달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해서 그분이 제게 전해주신 모든 것을 그 안에 담았습니다.”

    “아!!”

    “다만, 혈맥의 힘은 이미 제 안에 완전히 녹아있기에 돌려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명왕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옥간을 건네받더니, 교천묘를 한번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워. 어찌 보면 처음 보는 이에 불과한데. 이리 과분한 것을 건네주다니. 앞으로는 그대를 우리 봉황족의 일원이라 여기겠네.”

    만약 교천묘 없이 혼자 방문했다면 준혁은 절대 주작과의 인연을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예상대로 주작이 봉황족의 시조였다면, 시조가 가진 지식과 힘을 어떻게든지 빼앗으려고 했을지도 몰랐으니까.

    든든한 뒷배가 있기에 상대가 손을 쓰지 못한다는 걸 계산에 둔 준혁의 행동이었다.

    “허면, 그분께선 지금도 하계에 계신 건가?”

    “아닙니다. 제가 만났을 땐 잔혼만 남은 상태셨고, 그 상태 또한….”

    “아! 무슨 말인지 알겠네. 여튼 고마우이.”

    명왕은 옥간 안에 담긴 내용을 빠르게 훑더니, 준혁을 향해 환히 웃어주었다.

    준혁에겐 사신결의 일부가 된 정보일 뿐이었지만, 적통을 이은 그에겐 전혀 다른 의미로 중요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었기에 명왕은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었다.

    다만 추후의 상황은 준혁의 예상과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자네가 우지를 찾아온 것이라 했지?”

    “그렇습니다.”

    “헌데 이걸 어쩌나. 이리 소중한 것을 내게 주었는데, 나는 그댈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으니. 미안하네만 자넬 그에게 데려다줄 수 없으니 말일세.”

    주작이 가진 지식을 내놓으면 그걸 봐서라도 당연히 부탁을 들어줄 줄 알았건만, 명왕은 곤란하다는 듯 미리 선수를 쳤다.

    ***

    다행이라면 축객령을 내렸어야 할 명왕이 준혁 일행을 자신의 거처로 초대했다는 것이었다.

    그가 준혁에게 느낀 고마움은 진심이었는지, 교천묘조차도 놀랄 만큼 귀한 선주와 진선 이상의 수사에게도 도움이 될 만한 단약까지 선물로 내놓으면서 말이다.

    그랬기에 준혁은 그의 의도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자를 만날 수 없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저에겐 정말 중요한 일이라서 말입니다.”

    결국 준혁의 부탁에 교천묘를 비롯한 전원을 밖으로 내보낸 명왕은, 거처를 외부와 완벽히 차단한 후 준혁에게 사실을 알려주었다.

    준혁이 주작의 기억을 넘겨주지 않았다면 절대 알 수 없었을 내용을.

    “그대가 우리의 잃어버린 지식을 가져다주었기에 말해주는 것이네. 절대 외부로 알려지면 안 될 일이란 걸 명심하게.”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후우. 금지라 불리는 그곳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완벽히 독립된 공간일세. 그곳을 찾아가기 위해선….”

    우지가 숨어있는 장소는 봉황족의 금지.

    그곳이 금지라 불린 이유는 봉황족의 힘의 근본이나 마찬가지인 순수한 불의 기운이 가장 강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진선에 이르러 순수한 불의 기운에 원영이 침식당하지 않게 되면, 봉황족 선사는 그곳에 머물며 수행을 쌓았고, 불의 기운을 몸에 충분히 쌓고 나면 외부로 나와 활동을 이어갔다.

    그곳은 비경처럼 천연적으로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장소였기에, 그 어떤 곳보다 안전한 수련 장소이자 피난처이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천신라로부터 몸을 숨기고 싶던 우지는 그곳으로 피신하길 원했고, 그에게 빚이 있던 명왕은 그걸 수락하고 말았다.

    그렇게 대부분의 시간을 금지에 숨어 살다가, 가끔 밖으로 나와 자신의 도움을 바라는 영수족을 돕고 살아가던 우지에게 문제가 생긴 건 봉황족의 보물이 도난당한 이후였다.

    “도난당한 게 무엇이길래 그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된 겁니까?”

    “그가 나오지 못하는 게 아니라 누구도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걸세.”

    “설마….”

    “그래. 그곳에 출입하는 데 필요한 열쇠가 사라져버렸네.”

    으드득-

    친절하게 설명을 이어가던 명왕이 누굴 떠올린 것인지 두 눈에 엄청난 살기를 담았다.

    ‘항상 태를 부여받던 봉황족이 약해진 것도 이런 이유였던 건가?’

    조호랑에게 들었던 얘길 떠올리는 사이 명왕이 설명을 마무리했다.

    “그래서 그대를 그에게 안내하지 못하는걸세. 그 물건을 찾기 전까지…. 그도 우리도. 서로 왕래할 수 없으니. 그러니 너무 서운해하지 말게나.”

    상대가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음은 분명히 느껴졌다.

    ‘열쇠라….’

    다만 이상한 감이 준혁의 입을 열게 했다.

    “혹, 그 열쇠에 명칭이 있습니까?”

    준혁의 질문에 명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찌 알았나? 명왕지보라 적힌 지도의 형태를 띤 물건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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