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화. 조우 (2)
“너, 수행을 숨기고 있었군.”
준혁이 전영을 만들어내자, 마족 사내는 움찔하며 재빨리 기세를 올려 방어 태세를 갖췄다. 준혁에게서 위선경급 기세를 읽어낸 상대는 긴장과 기대가 섞인 표정을 했다.
“숨긴 게 아니라, 그대가 알아보지 못한 건 아니겠습니까?”
“전마족이라…. 인족 혼혈인가? 재밌겠어.”
프스스-
준혁의 반문에 혼잣말로 답한 마족 사내의 등 뒤로 어둠보다 새까만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더니, 천천히 전영의 모습을 갖추었다.
‘역시 소문대로 진마족의 기운이 가장 순수한 마기에 가깝구나.’
위선경 마족 사내의 전영은 마치 준혁이 암흑마기만으로 만들어낸 전영과 매우 흡사한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잠시 후 전영을 불러내 전투 준비를 마친 마족 사내는 잔뜩 일그러진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그럼 어디 봐볼까?”
파징-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지더니, 순식간에 준혁의 앞에 나타나 정권을 내질렀다.
‘속도는 자신감 있을 만하구나.’
그 모습에 준혁은 가볍게 손을 내밀어 상대의 주먹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막아섰다.
그 순간 오른쪽에서 무언가 희미하게 빛난다 싶더니 또 한 명의 마족 사내가 나타나 똑같은 정권 지르기를 했다.
다만 이번엔 평범한 정권이 아닌 검은 칼날처럼 변한 주먹이었기에 방어하는 게 꽤 난도가 있어 보였다.
속도 역시 진선급과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거의 그들에 근접한 수준이었다.
‘이런 식으로 영역과 분신을 사용하다니, 특이하군.’
준혁은 상대가 사용하는 영역의 힘이 일반적인 수사들과 달리 매우 제한되어 있음에 호기심을 느꼈다.
보통 일정 공간을 영역으로 덮은 후 그 안에서 영역분신을 활동하게 하는 것과 달리, 상대는 분신으로 공격하는 순간에만 그 공간을 영역으로 만들었다.
그 말인즉, 보통 수사가 넓은 구를 만들어 그 안에서만 분신을 움직이는 것이라면, 상대는 분신의 몸만 영역으로 감싼 후, 자유자재로 어디에서든 활동하게 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특이한 운용 방법과 속도를 제외하면 결국 위선경 수사의 한계를 벗어나진 않았다.
“귀원패.”
준혁은 호기심에 상대를 바로 제압하지 않고, 거북이 형상의 분신을 불러냈다.
모습을 드러낸 귀원패는 상대의 공격이 진행되는 궤도마다 육각 타일을 소환해 방어에 나섰다.
탕-
“특이한 분신이네? 인족 비술인가?!”
몇 번의 공격이 전부 쉽게 막히자, 상대는 한껏 뒤로 물러났다. 그러더니 엄청난 속도로 준혁의 주위를 맴돌다가 번개처럼 파고들었다.
허나, 별의별 방법을 다 사용해도 준혁에겐 하나도 통하지 않았고, 제풀에 점점 지쳐만 갔다.
‘이 정도면 충분한가.’
진마족의 힘에 대해 파악하고자 했던 준혁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양성을 잃어가는 상대의 공격에 결국 마무리를 했다.
턱-
“커억”
잠시 후, 준혁이 한 발 크게 떼며 손을 뻗자, 번개처럼 움직이던 마족이 벽이라도 부딪친 것처럼 충격과 함께 멈춰 섰고, 직후 준혁에게 목이 잡힌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 으윽, 서, 설마 수행을 감추고….”
“숨긴 게 아니라 그대가 알아보지 못한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상대는 억울한 듯 이들 바득바득 갈았다.
그 순간, 상대방의 목을 잡고 있던 준혁이 상대를 뿌리치며 재빠르게 한 걸음 물러났고.
솨아악-
때에 맞춰 거대한 송곳처럼 생긴 말뚝이 준혁이 있던 자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준혁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흑마지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잠시 후. 그 안에서 냉혹한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마족 사내를 마주할 수 있었다.
‘진선급? 저자가 테오가라는 자군.’
***
흑마지에서 빠져나온 사내는 검보라색 피부에 흑색 장포를 몸에 걸치고 있었고, 옷 위로 눈에 보이는 아지랑이 같은 마기가 꿈틀대고 있었다.
사내는 준혁과 위선경 마족을 떨어트려 놓고는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제 수하가 실례를 범했나 보군요.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허나, 저 녀석이 죽는 걸 보고 있을 순 없어서 말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우리 대화로 풀어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어느덧 일행 곁으로 다가온 준혁은 새롭게 나타난 마족을 살피기 위해 기감을 퍼트렸다.
하지만, 상대가 눈살을 찌푸리다 손을 젓자, 사방으로 퍼져가던 기감이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허, 예사롭지 않구나.’
기감이 퍼지지 못하게 막는다는 건, 그만큼 영역 공간을 완벽히 지배하고 있다는 뜻.
준혁의 의지가 보이지 않게 간섭하는 상황에서 그러할 수 있음은 분명 쉽게 여길 만한 것이 아니었다.
마족 사내는 마치 기감이라는 보이지 않는 기운을 만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빈손을 바스락대며 말했다.
“원 참. 초면에 실례이지 않습니까? 궁금한 게 있으면 대화를 통해 알아가면 될 것을. 먼저 통성명부터 하는 게 예의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니, 좋습니다. 저는 호란대륙에서 건너온 최가입니다.”
“최가?”
“최가 준혁이라 합니다. 선사께선 누구십니까?”
“아! 혹, 얼마 전 요마족들과 분탕질을 했던?”
준혁이 이름을 밝히자 상대의 얼굴에 호기심이 짙어졌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던 듯, 크게 놀라는 모습은 아니었다.
“분탕질까진 모르겠지만, 몇몇 요마족 선사들과 다툼이 있긴 했습니다.”
“하하, 이리 유명 인사를 내가 몰라보았습니다. 나는 테오가라고 합니다. 선사 덕분에 우리 진마족이 제법 얻은 것들이 많으니 먼저 감사 인사를 전하지요.”
“무엇을 말입니까?”
준혁이 반문하자, 상대는 잔인하지만 화사한 미소로 화답했다.
이어진 그의 설명에 의하면 준혁이 처리한 요마족 선사들의 빈자리로 인해, 요마족 내부에서 직위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벌어졌고, 그 덕에 진마족은 흑마지를 비롯한 옛 구지대륙 일대를 완벽히 장악했다는 것.
그것에 더해 마족들이 주를 이루는 계면에서도 요마족 심천군주가 활동을 멈춰, 그 덕에 적지 않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고, 테오가 역시 그 혜택을 받은 인물 중 하나라는 이야기였다.
“선사께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는데, 이리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준혁은 상대의 너스레에 쓰게 웃음 짓다가 한 손으로 흑마지를 가리켰다.
“그럼 제가 저곳을 확인 좀 하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준혁의 질문에 마족 사내는 자신의 수하를 힐끔 바라보다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혹 무슨 일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찾는 게 있어서 말입니다.”
“혹 진마정이라도 찾으시는 겁니까?”
사람 좋은 미소로 지그시 바라보며 말하는 상대의 질문에 준혁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나 저에게 소중한 물건을 저 안에 두고 와서 말입니다. 해서 저 안을 꼭 확인해야겠습니다.”
테오가는 준혁의 대답에 눈을 게슴츠레 뜨며 살짝 웃음 지었다. 마치 ‘네가 뭘 찾고 있는 줄 안다’라는 듯이.
“잘 알았습니다. 보아하니 꽤 중요한 일인 듯하군요. 허나 아쉽게도 허락해 드릴 순 없을 듯합니다. 저 역시 이곳을 지켜야 하는 처지라서…. 함부로 외인을 흑마지로 들이면 곤란해질 수도 있어서 말입니다.”
“......”
“다만 평소 눈엣가시 같던 요마족들을 그리 만들어준 공로를 인정해, 가시는 길을 방해하진 않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조용히 떠나시겠습니까?”
상대의 친절한 목소리에 준혁은 피식 웃고는 일행들에게 뒤로 물러나라는 듯 손짓했다.
“결국 이리될 것을, 다른 마족들과 달리 대화가 통하는 분이신 줄 알았더니, 아니었군요.”
파앗-
그리고는 강렬한 암흑마기를 뿜어대며 등 뒤를 지키고 있던 전영을 몸 안으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준혁의 피부색이 변하며 그의 이마에 기다란 뿔이 자라나 순식간에 전마족의 외형처럼 변했다.
“오호라.”
그 모습에 테오가는 놀란 눈을 하다가 잔인하게 입꼬리를 늘어트리면서 양손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그의 양옆으로 네 명의 영역분신이 솟아나듯 나타났고,
“어디 소문의 실력 좀 확인해보겠습니다.”
쇄애액-
그가 손을 앞으로 뻗자 그것을 신호로 분신들이 검은 번개가 되어 준혁에게 쇄도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대화로 일을 해결하는 마족 따위는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
상대의 선공에 준혁 역시 네 명의 영역분신을 불러내 맞서게 하며 몸을 움직였다.
마족을 상대하는 데 암흑마기가 상성 상 우위에 있었기에, 다른 힘을 배제하고 오직 암흑마기만을 온몸에 두른 채.
콰앙!
다른 마족과 달라 보였던 테오가는 겉모습만 그러했던지, 무식하게 전력을 쏟아부으며 몸을 부딪쳐왔다.
그리고 첫 접전에서 준혁은 자신의 암흑마기가 요마족 때와는 달리 완벽한 우위를 점하지 못함을 깨달았다.
‘이자, 진마기를 다룰 줄 안다.’
상대는 암흑마기의 또 다른 이름인 진마기를 미약하지만 다룰 줄 알았고, 그로 인해 준혁의 암흑마기에 무력하게 무너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굳이 이들의 전투방식을 따라줄 필요는 없지.’
무식하게 강체 공법으로 상대와 직접 맞부딪쳤던 이유는 오직 상성의 유리함 때문.
준혁은 한 번의 접전으로 상대의 실력을 간파하고는 즉각 그를 피해 몸을 날리며 한자 길이 정도의 피리를 꺼내 가볍게 휘둘렀다.
삐이익-
그러자 피리에서 귀를 거슬리는 소리가 나더니 주변에 수십 개의 무형 칼날이 만들어져 상대에게 날아들었다.
“그건!”
테오가는 무형의 칼날들이 밀어닥치자 재차 달려들지 못하고 급하게 몸을 보호했다.
그 모습에 준혁이 재차 피리를 휘두르며 의지를 돋구자, 수십 개의 칼날이 수백 개로 늘어나다가 종국엔 수천 개로 변해 전방에 모든 걸 찢어버릴 듯 휘몰아쳤다.
“요라제의 영보!!”
“그와 안면이 있으신가 봅니다? 맞습니다. 그에게 선물 받은 것이지요.”
준혁이 냉소로 답하자, 테오가가 마기를 뭉쳐 자신의 몸을 공처럼 뒤덮어 버렸다.
파바바박-
그 순간 수천 개의 칼날이 테오가가 만든 구체를 찌르고는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요란한 충격파가 없었을 뿐, 그 효과가 미미한 건 아니었다.
‘무형의 칼날이 영력으로 만들어낸 보호막을 관통한다.’
보이지 않고 무한정 수를 늘릴 수 있다는 것뿐 아니라, 방어력을 일부 무시하는 능력까지.
준혁은 요라제에게서 획득한 영보가 생각보다 강력함에 새삼 놀라며, 그가 이것을 사용하지 않았음을 다행이라 여겼다.
그리고는 재차 피리를 든 손을 전방을 향해 휘둘렀다. 얼굴엔 득의함을 가득 담은 채.
하지만 겉모습과 달리 속으론 진땀을 흘리는 중이기도 했다.
칼날의 피리는 영력을 사용하지 않고 의지력만 충분하다면 무한히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의지력의 소모가 생각보다 심했다.
그로 인해, 상대방이 만들어낸 진선급 영역에 대항하고 있던 준혁은 그것을 계속 사용하는 것에 버거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마냥 좋은 건 없구나.’
만약 동급 선사였다면 칼날의 피리를 사용함에 무리가 없었겠지만, 더는 사용이 힘들 것 같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휘두르고는 허공을 박차며 상대에게 미칠듯한 속도로 쇄도했다.
‘방어 일변도를 유지하는 지금이 적기다. 단숨에 처리하고….’
하지만 그때 누구도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어둠뿐이던 흑마지 상공의 하늘로 검은 뭉게구름 같은 기운이 모여들었고, 그것은 순식간에 월계관 같은 모양의 거대한 진법으로 변하였다.
테오가를 향해 움직이던 준혁은 그 모습에 우두커니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저, 저것은!’
진법이 무슨 용도인지는 파악할 필요도 없이, 그 모습은 준혁의 뇌리에 깊이 박혀있었다.
바로 하계에서 만났던 목족의 여왕이 사용하던 공간이동 진법과 거의 흡사한 모양.
그 말인즉 누군가 공간이동을 통해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뜻이었다. 준혁은 급하게 조각배 모양의 법기를 꺼내며 일행들에게 외쳤다.
“모두 안으로!”
잠시 후, 준혁이 꺼낸 법기가 거대한 전함으로 변하자, 일행은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갑판 위로 올라갔다.
그사이 상황이 변한 걸 깨달은 테오가가 방어 태세를 풀었고,
그때에 맞춰, 월계관 같은 거대한 공간 이동진 사이로 검은 안개가 퍼져나가며 그곳에서 비단결 같은 머리칼은 가진 마족 사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공간 진법에서 흘러나오는 영기파동이 심상치 않았기에, 만에 하나 새로 나타난 이가 감당 불가의 강자라면 바로 전함을 발동해 도망치려고 준비 중이던 준혁.
그는 공간이동진에서 나타난 사내를 보고 넋이 나간 듯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사내는 분명 처음 보는 외모였지만, 전혀 낯설지 않았기 때문.
“서, 설마…. 아마르곤 수사?”
준혁의 입에서 그리운 이름이 흘러나오자, 공간 이동진을 빠져나온 마족 사내가 손을 가볍게 흔들며 준혁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는 싱그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웃어 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최준혁 수사. 저는 진마족을 책임지고 있는 자타라고 합니다.”
그 순간 전투 중이던 테오가를 비롯해 주변 모든 마족이 몸을 바짝 숙였다.
“하늘을 뵈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