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화. 조우 (1)
반파된 선착장을 떠난 준혁 일행.
그들은 전왕문이 뇌명숲 외곽을 뱅뱅 돌아간 것과 달리, 뇌명숲을 일직선으로 횡단했다.
전왕문도들이 뇌공조라는 뇌명숲에만 서식하는 새들을 피하고자 조심스럽게 이동했단 건 알았지만, 길을 알지 못하는 준혁으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얼마 지나지 않아 파도처럼 밀려오는 뇌공조 무리를 맞닥뜨리는 거로 돌아왔다.
“어쩌죠? 수가 너무 많아요.”
답지 않게 살짝 떨리는 조호랑의 목소리에 준혁은 무덤덤하게 전방을 가득 채운 뇌공조 무리를 관찰했다.
뇌공조는 하얀 몸통에 뇌전이 감긴 노란 날개를 한 두루미같이 생긴 새였는데, 원영급에서 화신기급까지 다양한 개체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무리의 수장들은 소천경급까지 있어, 웬만한 문파는 휩쓸리는 순간 아작이 날 듯해 보였다.
“어쩔 수 있겠습니까? 길을 모르니 저것들을 뚫고 지나가야지요.”
준혁을 비롯한 일행들 수준에선 손쉽게 해치울 수 있는 뇌공조.
다만 문제는 그들의 개체 수가 수십 수백 단위가 아니란 것이었다.
준혁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곁에 서 있던 소화여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인, 뇌공조는 뇌전을 쏘아 보내 무리를 부르는 특성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점점 그 수가 늘어날 테니, 그렇다면 빠르게 처리하고 지나가셔야 해요.”
지금은 겨우 수천의 개체였지만, 시간이 지나면 수만이 될 수도 있는 일.
그렇게 되면 아무리 수행 차이로 압살한다고 하여도 결국 영기 고갈을 피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특히 뇌공조는 뭉치면 뭉칠수록 강렬한 뇌전을 만들어냈으니 말이다.
하지만 소화여와 조호랑의 걱정과 달리 준혁은 피식 웃고는 손을 흩뿌리듯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조그맣지만 강렬한 기운을 풍기는 조각배 하나가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크기를 키워 100여 미터 가까운 전함으로 변했다.
“이, 이건? 천휴림의?”
놀라는 일행들의 모습에 준혁은 전함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들 타시지요. 굳이 저것들을 상대할 필요 없으니.”
잠시 후, 일행들이 전함의 보호막 안으로 이동하자, 준혁은 영역분신을 만들어냄과 동시에 용천과 천무를 영수대 안에서 불러냈다.
작지만 분리된 세상이나 마찬가지인 영보급 영수대 안에서 수련 중이던 용천 천무는 뇌공조 무리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그래, 너희들도 저것들이 보이겠지. 내 공능을 사용하면 저것들이 감지할 수 있는 범위를 단숨에 벗어나는 게 가능하지만, 너희에게 기회가 될 것 같아 불렀다.”
“기회 말씀이십니까?”
“산들, 청호가 아무리 수련을 게을리한다고는 하나, 그 아이들은 꽤 많은 역경을 견뎌왔지. 하지만 너희들은 지식과 수행을 쌓는 것 말고는 여지껏 몸을 사용해본 적이 없다.”
“그 말뜻은….”
이해한다는 듯 두 영수가 뇌공조 무리로 시선을 돌리자, 준혁이 수긍하며 답했다.
“그래, 내 분신으로 도와줄 테니 이곳을 지나는 동안 실전을 겪도록 하거라.”
오래전 자휴궁 궁주로부터 도망쳤듯, 일행들을 데리고 뇌공조 무리를 벗어나는 건 지금의 준혁에겐 크게 어려울 게 없는 일.
다만 산들 청호와 달리 강해지고자 하는 욕구가 넘쳐나는 용천과 천무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 준혁은 뇌공조를 강행 돌파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올 수도 있기에, 전함을 꺼내 일행을 보호하며 만약을 준비하는 것일 뿐.
“가거라. 가서 마음껏 날뛰어 보거라.”
***
명령이 떨어지자, 두 영수는 청룡과 비슷한 기운을 내뿜으며 뇌공조 무리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준혁은 그런 그들을 보조하기 위해 청룡 분신을 그들과 함께 보내며, 나머지 사신들로 하여금 주변을 적절하게 배회하게 함으로써, 한꺼번에 상대해야 할 뇌공조의 수를 적절히 조절했다.
잠시 후, 준혁이 전함 위로 올라오자, 조호랑이 조말랑과 함께 다가왔다.
조호랑은 준혁의 꺼낸 전함의 진정한 공능은 몰랐지만, 전함 자체가 아무리 많은 뇌공조가 몰려와도 버틸 만큼 단단한 것임을 알아보고 마음을 편히 먹고 있었다.
“저 아이들을 성장시키시려는 것이군요? 혹시 괜찮다면 이 녀석이 합류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조말랑, 내 분신들로 도움을 줄 테니 자네도 저곳에 어울려보게.”
“예! 형님!”
조호랑의 물음에 준혁은 곧바로 조말랑을 밖으로 내보냈다.
직후, 조말랑이 두 영수에게 합류해 뇌공조를 상대하기 시작하자, 조호랑이 새삼스럽다는 눈빛으로 전함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천휴림과는 어떤 관계세요?”
준혁은 조호랑이 평소보다 긴장하고 있다는 걸 느끼고는 피식 웃으며 시선은 두 영수에게 고정했다.
“이것은 용각족이 남긴 물건입니다. 천휴림과는 아무 상관 없지요.”
“아….”
“왜? 신경 쓰이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조호랑은 살짝 망설이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들은 자신들을 제외한 이가 이런 것을 가지고 있는 걸 알면…. 반드시 빼앗으려고 할 거예요. 충분히 그럴 자들이니까요.”
“대황대륙의 영수족은 천휴림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맞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니까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의 걱정에 준혁은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실제로 천휴림은 악명이 자자한 세력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이들에게 호의적인 곳도 아니었다.
중괴의 말에 의하면 그들이 가진 전함도 전부 다른 세력들로부터 빼앗은 것들이었으니까.
‘만에 하나 욕심낸다면…. 후회하게 될 뿐이겠지.’
잠시 후, 생각을 정리한 준혁은 전함을 전진시켰다. 그리고는 뇌공조 무리를 떨쳐버리지도, 그렇다고 너무 모이지도 않게 유지하며 숲을 가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적절한 시기마다, 영수와 조말랑을 불러들여 단약으로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는 다시 뇌공조 무리 속으로 던져버렸다.
***
뇌공조를 상대하느라 시간을 지체하긴 했지만, 예전과 달리 숲 자체를 직선으로 관통해서인지 생각보다 빠른 시간에 숲을 벗어난 일행.
뇌명숲을 벗어남과 동시에 전함을 회수한 준혁은 다른 비행법기를 꺼내 쉬지 않고 흑석대륙을 가로질렀다.
그렇게 검고 회색만 가득한 땅을 가르던 준혁은 옛 구지대륙과의 경계 근처에 다다르자, 방향을 살짝 틀어 남서쪽으로 이동했다.
“그쪽은 서봉산맥 쪽인가요?”
“그렇습니다. 잠시 확인할 게 있습니다.”
몇 주 후.
서봉산맥에 도착한 준혁은 자신이 처음 비승했을 때 도착했던 장소를 확인했다.
‘희미하지만 여전히 천제단의 기운이 남아있다. 다만 인력으로 통로를 만들긴 어렵겠구나.’
하지만 흔적만 남아있지, 공간의 틈 자체를 안정적으로 확장할 방법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이곳엔 무슨 일인가요?”
“아닙니다. 가시죠.”
결국, 당장 지구로의 통로를 여는 건 어렵겠다고 판단한 준혁은 궁금해하는 일행들을 인솔해 다시 옛 구지대륙과의 경계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암흑기로 가득 찬 공간을 마주할 수 있었다.
“또 오게 됐네요.”
무겁게 파고들려는 암흑기로 가득한 공간.
조호랑은 좋은 추억이 아닌 듯 인상을 찌푸렸고, 그건 준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준혁은 아마르곤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에 기대감이 가득 차올라 두 눈이 반짝거렸다.
“갑시다.”
잠시 후, 준혁은 옛 추억을 떠올릴 시간 따윈 없다는 듯, 암흑만이 가득한 공허의 공간으로 몸을 날렸고, 소화여를 비롯한 일행도 곧바로 뒤를 따랐다.
***
암흑기로 가득 찬 공간을 가로지르기도 두 달여.
아무런 방해 없이 순탄하게 이동해 온 준혁은 어느 순간부터 심각해진 얼굴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굳은 입술로 팔짱을 유지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그의 심리를 대변해 주었다.
“정말 이상하군.”
“그러니까요. 정말 이상해요.”
그의 곁에선 조호랑 역시 비슷한 자세로 어둠만이 가득한 공간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요? 전 아무것도 느껴지질 않아요.”
두 사람과 달리, 심지어 조호랑보다 수행이 높은 소화여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에 대해 의문을 드러내자, 준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이상합니다.”
“예?”
“이곳은 원래 이렇게 조용한 곳이 아닙니다. 흑마자라는…. 암흑기에서 태어난 괴생명체들이 수시로 달려들어야 정상인데, 이렇게 조용한 것이 위화감을 조성하는군요.”
“맞아요. 지금껏 수십 번은 넘게 그것들의 습격을 받았어야 하는데…. 너무 이상해요.”
그랬다. 두 사람은 오래전 대막리와 함께 방문했을 때 겪은 상황과 지금이 너무 달라, 위화감을 느끼는 중.
준혁은 전력으로 기감을 퍼트리며 흑마자의 존재를 확인하려 했지만, 그 어떤 생명체도 기감에 걸려들지 않았다.
“흐음….”
그렇게 얼마나 이동했을까?
흑마자의 방해 없이 계속해서 이동해 온 일행은 목적지인 흑마지 인근에 다다라서야 생명체를 마주할 수 있었고,
그들은 예상하던 요마족이 아닌, 검보라색 피부를 지닌 진마족(眞魔族)이었다.
전마족과 요마족의 시초라 일컬어지는 진마족, 개체 수는 가장 적지만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마족.
하지만 다른 마족들과 달리 약탈 본성을 잠재우고 일반 수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수행을 상승시키는 것에 몰두한다는 그들.
준혁은 흑마지를 지키는 이들이 예전과 다르자, 무작정 손을 쓰기보다는 대화를 위해 그들에게 접근했다.
잠시 후, 마치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듯 준혁이 기세를 흘리며 다가오자, 흑마지를 지키던 마족들이 바짝 긴장하며 앞을 막아섰다.
“멈추십시오. 무슨 일로 방문한 지는 모르오나, 이곳은 테오가님의 수련 장소입니다. 당장 돌아가 주시길 바랍니다.”
“수련 장소? 흑마지가 말인가?”
준혁은 수십 명으로 이루어진 화신기급 마족들을 마주하며 의문이 담긴 눈길을 보냈다.
“그렇습니다. 아셨다면 돌아가 주십시오. 테오가님께선 수련 기간 동안엔 어떤 분쟁도 원하시질 않습니다.”
‘싸우길 싫어하는 마족이라….’
준혁은 지킴이들의 말에 피식 웃으며 혀를 찼다.
“그건 어렵겠군. 나도 저 안에 볼일이 있어서 말이야. 다만 테오가란 자의 수련을 방해하진 않을 거라 약속하지.”
파앗-
그때, 준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흑마지 상공의 공간이 흐릿하게 변하더니 그 안에서 검은빛이 터져 나왔다.
어둠과 암흑기뿐인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검은 빛은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소름 끼치는 기운을 품고 있었다.
잠시 후, 빛이 사라지자 그곳엔 위선경 마족 한 명이 나타났는데, 생김새로만 보면 샌님처럼 보였지만, 피부 위로 흐르는 기운은 절대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닌 강자였다.
“인족 놈들은 꼭 말이 통하질 않지. 눈물을 흘려야만 잘못을 뉘우쳐.”
모습을 드러낸 위선경 마족은 준혁 일행을 훑어보며 혀를 할짝댔다.
그러다 소화여를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저자를 믿고 까부는 것이었군. 제법 강해 보여. 그러고 보니 동급수사를 만난 것도 오랜만인데 마침 잘됐군.”
준혁이 기세를 풍기고 있다고는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화신기 수사들을 위축되게 하려고 했던 것.
기세를 제외하곤 준혁의 수행이 전혀 보이질 않는 상황이었으니 마족 사내는 기세로만 준혁의 수행을 어림짐작하고는 무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소화여가 자신과 동급임을 알아차리고 진심으로 기뻐했다.
‘역시 저래야 마족이지.’
잠시 후, 마족 사내가 전신에 진득한 마기를 피워 올리며 전투를 진행할 것 같은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에 준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한발 크게 내디뎠다.
화아악-
그리고는 등 뒤로 전영술로 만든 3미터가량의 마족 전영을 만들어내고는 사내를 향해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진마족의 전영술에 대해 궁금했었는데, 마침 잘됐습니다. 어디 전마족과 얼마나 차이가 있나 비교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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