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화. 손님 (2)
거처를 나선 준혁은 손목 위로 은은하게 모습을 드러낸 공천령을 보이지 않게 만들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 위로 적지주의 인연실을 칭칭 감아 기운을 봉쇄했다.
혹시나 공천귀를 준혁이 흡수했단 사실을 알고 나면 그의 무덤을 찾자고 중괴가 설레발을 칠 수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 추궁할 것이 귀찮기도 했고 말이다.
“각자 휴식 시간을 갖다 더니 웬일이냐?”
건물의 가장 상층부에 기거하고 있던 중괴는 갑작스러운 준혁의 방문에 어리둥절해하다가, 고즈넉한 풍경이 보이는 창가로 안내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이것 좀 마셔 보거라. 소우자 그놈 아주 마음에 들어. 돌아왔더니 이 귀한 선주를 준비해두지 않았겠느냐?”
창가의 탁자 옆으로 라후지가 아끼던 것으로 추정되는 선주가 즐비한 모습을 보며 준혁은 의자에 몸을 걸쳤다.
준혁이 자리에 앉자, 맞은편에 자리한 중괴가 손을 가볍게 저었다.
그러자 술병 하나가 허공에 떠올라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술을 흘려보냈고, 아무것도 없는 공간의 대기가 마치 잔처럼 변하며 술을 받았다.
준혁은 술 한 잔 마시는 것도 요란하게 먹는 중괴를 바라보다 피식 웃고는 대기를 뭉쳐 만든 술잔을 잡아채 천천히 술을 음미했다.
그리고는 잔을 비워 허공중에 흩어버리며 입을 열었다.
“매우 좋군요.”
“그렇지? 네놈 덕분에 호강하는구나. 그래 무슨 일이냐? 당분간 몸을 추스른다더니.”
중괴 역시 술 한 모금을 마시고 잔을 대기 중에 녹여 흩어지게 했다.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 말입니다. 어르신께서 공천귀와 친분이 있다고 하셨지요?”
“그래. 한번 말하지 않았느냐. 오래전엔 그와 친우였다고.”
“해서 말인데. 혹 그의 마선으로서 권능에 대해 알 수 있겠습니까?”
“응? 권능?”
중괴는 준혁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입을 열었다.
“뭐 어려운 거라고. 그가 천신라의 창고지기를 했던 건 알고 있지 않으냐? 그게 그의 권능이었다. 무한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 정확히는 자신이 그 공간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지만.”
중괴의 거침없는 답변에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던 준혁이 말을 이었다.
“그게 다입니까?”
“그럼 무엇이 더 있단 말이냐?”
“제가 알기로 공천귀는 먼 거리를 도약할 수 있다 알고 있습니다. 마치 적마와 비슷한….”
“아아, 그것 말이냐?”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냐는 듯, 준혁을 흘기듯 바라보던 중괴.
준혁은 그런 그의 눈빛을 덤덤히 받아냈다.
“그건 그의 권능이라기보다는…. 비술이라 칭함이 옳다.”
준혁은 자신이 기다리던 주제로 넘어가자 귀를 쫑긋 세우며 반문했다.
“비술 말입니까?”
“그래, 비술. 공천귀의 공간도약은 천신라의 공간을 다루는 능력만큼이나 신비한 데가 있지. 하지만 그 능력은 함부로 사용할 수 없던 힘이다.”
“??”
“쯧, 마선기를 사용하는 권능과 다르게 그 비술은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는 기술이란 뜻이다. 이동한 거리에 비례해 생명이 줄어들어, 종국에는 계약자가 죽어버리는 것이지. 그럼 새로운 계약자를 찾아 또 수행을 올려야 되니 함부로 사용할 수 있겠느냐? 게다가 동화율이 올라간 상태라면 계약자뿐 아니라 본신의 혼백에도 타격이 갈 테니 쉬이 사용할 수 없기도 하고 말이다.”
‘생명력을 담보로 사용하는 비술이라고?’
섬뜩한 말에 준혁은 그의 설명에 의문을 제기했다.
“진선, 혹은 그 이상의 수행을 가졌다 해도 말입니까?”
“그건 말이 조금 다르지. 아마 그럴 땐 수행에 타격을 받을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래전 그와 관련된 얘길 들어 본 적이 있긴 하다. 공천귀 그놈이 자신의 기운과 흡사한 돌을 이용해, 생명을 담보로 잡는 대신 비술을 사용할 방법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는걸.”
“아!”
중괴의 설명이 끝나자 준혁은 그동안 공천령의 반응에 대해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내 손에 들어왔을 땐, 공간석을 이용한 능력을 확보한 후구나!’
생각해보면 처음 공천령을 사용했을 당시 준혁은 거의 죽음을 체험한 정도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아마 그 당시 공천령이 보유하고 있던 기운이 너무 적어 준혁 본인의 생명력 일부를 끌어다 사용한 게 분명했다.
그때를 떠올린 준혁은 자신이 무사히 살아서 도망친 것이 천운이었다는걸 깨달았다.
정확히 계산한다고 했지만, 만약 조금만 더 무리를 했다면, 생명력이 고갈돼 이승에 머물 수 없었을 테니까.
‘소우자를 통해 공간석을 더 확보해야겠어.’
진선에 오른 후엔 생명에 지장이 없다지만, 수행이 떨어지는 것도 문제긴 했다.
공천귀의 공간도약 능력은 절체절명의 순간 목숨을 구할 비장의 한 수가 될 수 있었으니, 미리 준비를 통해 공간의 기운을 확보해야겠다 준혁은 다짐했다.
다만, 훗날 깨닫게 되는 것이지만, 계약자의 생명력만을 담보로 공간도약을 사용했다면 준혁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 것이었다.
마선들과의 동화율이 제로에 가까운 준혁. 그런 그를 보조할 공천귀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게 궁금했던 것이냐?”
“그렇습니다. 어르신 덕분에 궁금증이 해결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눈을 흘기던 중괴가 한참 동안 준혁을 응시하다가 슬쩍 의문을 던졌다.
“설마…. 공천귀의 흔적을 알아낸 건 아니겠지?”
“그러겠습니까? 만약 그랬다면 어르신께 말씀드렸겠지요.”
“그래, 네놈이 비밀이 많긴 해도. 나를 속일 위인은 아니지. 믿는다.”
“예. 그럼 마저 즐기시던 걸 즐기시지요.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속으로 뜨끔하긴 했지만, 아직은 공천령의 존재에 대해 밝힐 때가 아니라 여긴 준혁은 중괴를 뒤로한 채 거처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다시 공천령의 문신이 드러나게 만든 후 그것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상념을 정리했다.
“언젠가 만나볼 날이 오겠지.”
마치 누군가에게 들으라는 듯 기대감을 드러낸 준혁은 문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만들고 다시 적지주의 붉은 실로 손목을 칭칭 감아버렸다.
그리고는 침상으로 이동해, 오랜만에 꿀 같은 잠에 빠져들었다.
수면이 필요 없는 수행이라고는 하나, 정신적인 피로는 풀어야 했기에.
***
“선사 어르신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 있지도, 저희가 함께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리옵니다.”
잠에서 깨어난 준혁의 처소에 처음 방문한 손님은 태식과 그의 사제였다.
준혁에게 태식에 대해 알려준 그의 사제는 소우자의 노력으로 대화성으로 올 수 있었고, 결국 둘은 함께 문파를 세우겠다며 준혁을 찾아왔다.
“사제 간의 정이 두 사람을 여기까지 이끈 것이지. 내가 한 게 무어 있겠나. 헌데 묘립성에 자리를 트겠다고?”
“그렇습니다. 소 성주께서 도와주신다고 하여 그곳에 자리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과거의 인연과 닮아있는 태식이 좋은 일로 떠난다고 하자,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다만 대화성에 자리를 잡을 거라 생각했던 태식이 묘립성으로 간다고 하자 한편으로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하긴, 전왕문이 자리했던 곳이 주운대륙이니…. 그곳에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말을 마친 준혁은 떠나려는 그들에게 공간팔찌 하나를 건네주었다.
“큰 도움은 주지 못해도, 함께한 정이 있는데. 가져가게. 앞으로 문파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될걸세.”
“아, 아닙니다. 이미 소 성주께 충분히.”
태식이 손사래 치며 거부하는 사이, 그의 사제는 준혁이 날려 보낸 팔찌를 낚아채더니 그 안을 빠르게 훑었다.
그리고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어깨를 잘게 떨었다.
“사, 사형…. 이, 이 안에….”
사제의 놀람에 한사코 거부하던 태식도 공간팔찌 안을 확인하고는 그의 사제만큼이나 화들짝 놀랐다.
“어, 어르신. 이건 너무 과합니다요.”
“됐네. 자네에게나 과한 것이지. 나에겐 의미 없는 물건들이니. 다만 부탁 하나만 하자면, 면교만을 반면교사 삼아 좋은 스승, 좋은 문주가 되어주게나. 그리할 수 있겠지?”
준혁의 말이 뜻밖이었을까?
태식은 결국 소리 없이 눈물을 보였다.
“그리하겠습니다요.”
그리고는 거듭 준혁의 선물을 거부하다가 결국 팔찌를 소중히 안고 자리를 떴다.
잠시 후, 태식이 떠나자 기다렸다는 듯 소우자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주군, 적루의 교호홍 선사와 청심문의 청교장 선사께서 찾아뵙길 요청하십니다.”
준혁은 진작에 그들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기에 그들을 안으로 불러들였다.
“들어오라.”
명이 떨어지자 소우자를 필두로 홍의를 입은 여인과 푸른 법복의 사내가 나타나 허리를 살짝 숙였다.
그들 뒤로 소화여도 따라 입장했는데, 그녀는 마치 준혁을 보호하겠다는 듯이 조용히 곁으로 다가오더니 슬그머니 기세를 끌어올렸다.
준혁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살짝 눈길을 주었다가 두 선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오랜만이라고 하기엔 너무 이른 만남인가요, 최 선사?”
“최 선사를 뵙습니다.”
두 사람은 각자 성격에 어울리게 한 명은 가볍게, 또 한 명은 진중하게 인사말을 건넸다.
“만남에 이르고 늦음이 있겠습니까? 인연이 되면 다시 보는 것이지요.”
“호호호, 말 재밌게 하시네요? 그 말은 우리가 인연이란 뜻인가요? 호호.”
교호홍은 준혁의 말에 과하게 웃어 보이더니 한참 후에야 자세를 바로 하며 말을 이었다.
“제가 이번에 방문한 건 다름이 아니라 이곳 대화성에 적루의 지부를 마련하고 싶어서예요.”
“지부?”
“여수사들이 주축이 되어 고위 수사들만 상대하는 기루입니다.”
소우자가 발 빠르게 설명하자 준혁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루라고 하지만, 술과 몸을 파는 것이 아닌, 선주와 수행을 파는 곳.
교합을 통해 수행을 올리는 적루의 특수한 공법과 그것을 돕는 선주를 이용해 방문하는 수사들의 수행을 돕는 것이었다.
물론 그럼으로써 수사들을 상대하는 적루의 여수사들도 수행이 올랐으니, 그녀들 입장에선 재화도 벌고 수행도 올리는 일거양득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적루가 손을 뻗었던 조그마한 종문들 같은 경우엔 그녀들의 하부세력으로 전락한 예가 많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 건 성주가 결정할 문제인 것을 어찌 저에게 오신 겁니까? 소 성주, 성의 일은 내 소관이 아닙니다. 내 말 하지 않았습니까? 성의 가장 웃어른은 내가 아니라 성주라고.”
“호호,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성주의 윗사람임을 말하는 건 아닐까요?”
준혁의 질책에 소우자가 답변하기도 전 교호홍이 교태를 터트리며 대답했다.
“허나, 소성주를 너무 나무라지 말아주세요. 이번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으니까.”
더 말해보란 듯 준혁이 말없이 응시하자, 이번엔 소우자가 말을 이었다.
“교호홍 선사께서 제안하시길, 지부의 책임자로…. 선사께서 직접 오신다고 하여, 제가 결정할 일은 아니라 판단했습니다.”
“맞아요. 이번엔 다른 이가 아닌 제가 직접 이곳에 머물 생각이거든요.”
‘나를 감시하려는 것이군’
준혁은 교호홍의 의도를 파악하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교호홍 선사. 그대가 적루의 주인이거늘, 그대가 이곳에 머문다는 건 지부가 아니라 본문을 옮겨온다는 뜻이 아닙니까?”
“호호호, 그게 그렇게 되나요? 그렇다면 그렇게 생각하셔도 상관없어요.”
그녀의 뻔히 보이는 수작에 준혁은 웃음을 잃지 않으며 손을 살짝 들어 올려 알아서 하란 듯한 행동을 취했다.
“그럼 그렇게 하십시오. 다만 소 성주가 정한 성내의 규율을 어기지 않는다는 조건을 명백히 약조하시고, 말입니다.”
“역시 화끈하시네요. 제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어요. 좋아요. 그럼 조만간 다시 뵙도록 하죠. 소 성주? 우린 그럼 할 얘기가 있겠죠?”
준혁에게서 허락이 떨어지자 교호홍은 소우자에게 눈짓을 보내더니 바로 몸을 돌려 사라졌다.
입가엔 만족이 걸려 있었다.
‘소우자는 공법 특성상 상관없으나, 다른 이들은 제법 고생 좀 하겠군.’
적루의 유혹하는 기술은 그쪽 일에 관심이 없는 준혁도 들어 본 바가 있을 정도였다.
눈만 마주쳐도 정신력이 약한 자들은 그녀들의 품에서 헤어 나오질 못한다는 소문도.
하지만 한편으론 분명 수행을 올리는 데 도움이 될 일이었고, 조만간 자리를 비워야 하는 준혁 입장에선 성 내에 또 한 명의 진선급 강자가 머문다는 건 환영할 만한 일이었기에 허락했다.
그녀의 수행에 그녀가 손을 뻗을 만한 자는 자신이나 중괴, 아니면 소우자 정도였으니 그녀 자체를 조심해야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저 여자 눈빛이 불쾌해요.”
조용히 경계하듯 들리는 소화여 목소리에 준혁은 떠나가는 교호홍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고는 푸른 법복의 사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청교장 선사, 청심문에선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이미 예상하는 바가 있었지만, 모르는 듯 능청스럽게 질문하는 준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