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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321화 (321/408)
  • 321화. 대화성으로 (3)

    준혁의 손아귀에 목줄이 잡힌 청교장은 부들부들 떨며 말을 잇지 못했다.

    모두 합심하여 움직일 거라 생각했던 이들도 전부 사태를 주시하며 행동을 멈추자, 한 발만 잘못 디뎌도 자신의 생이 마감될 거란 걸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자존심이 상하지만, 결국 구걸을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사, 살려주시오….”

    “살려달라? 방금까지 저를 도모하려고 하시더니 금세 말을 바꾸십니다? 우선 적마도를 빼앗고 그다음에 추후 일을 논의하자고 직접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내, 내가 실언을 했소. 보, 보물을 얻은 자가 있다면 그가 정당한 주인 아니겠습니까? 저, 저는, 아니 저희 청심문은 앞으로 은원을 잊겠소…. 으, 으헉. 사, 살려….”

    여전히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상황을 반전시킬 궁리를 하는 청교장을 향해 냉소한 준혁은 손아귀에 잡힌 목을 통해 서서히 월광지력을 투입했다.

    그러자 청교장의 몸 위로 서리가 끼더니, 심장 앞으로 얼음에 꽁꽁 쌓인 푸른 원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말과 달리 뭘 준비하고 계시는 겁니까? 제가 모를 줄 알았습니까?”

    얼굴을 제외하고 꽁꽁 얼어버린 원영은 살려달라고 비는 청교장의 얼굴과 달리 악독한 눈빛으로 준혁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원영도 본체와 마찬가지로 절망에 빠진 듯 눈빛에 힘을 잃어갔다.

    어느새 준혁의 발끝에서 시작한 금빛 실이 청교장의 본체를 휘감으며 파고들었고, 원영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사, 살려….”

    “하실 말씀은 그게 다입니까?”

    잠시 후 준혁은 월광지력에 침식당한 채 금빛 실에 묶여가는 청교장의 원영을 손끝으로 툭 건드리며 주위에 퍼져 사태를 관망하는 수사들을 도도하게 둘러보았다.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한 이들을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다가 다시 청교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느덧 그는 눈과 입을 제외하곤 완벽히 얼어붙어, 이제는 어떤 수단을 써도 반전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됐음에도 그는 살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채 힘겹게 또 한 번 입을 열었다.

    만약 준혁이 진짜 손을 쓰려 했다면 이미 본체는 소멸하고 원영은 완벽하게 억압당했을 테니까.

    “서, 선사. 제, 제가 무얼 하면 살 수 있는 것입니까?”

    준혁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청교장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손가락 하나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손가락 위로 하얀 기운이 뭉치며 단약처럼 변했다.

    “이걸 받아들인다면 앞으로 우리 사이가 좋아질 듯합니다만?”

    준혁의 제안에 청교장은 눈을 쉴 새 없이 깜빡였다.

    “조, 좋소. 좋습니다. 무엇이든 받아들이겠소.”

    -그놈을 그냥 그렇게 살려주겠다고? 어떤 금제든 곁에 두지 않은 이상 결국 풀어내고 말 것이다.

    그때 놀란 눈으로 지켜보던 중괴가 급하게 전음을 날렸다.

    하지만 그 정도도 준혁이 고려하지 않았을 리는 없는 법.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절대 불가능할 테니.

    준혁은 중괴를 안심시키고는 청교장의 입술 앞으로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하얀 단약처럼 변한 기운이 그의 입속으로 쑤욱 들어가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중괴의 걱정에도 준혁이 확신하는 이유.

    청교장에게 주입한 기운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소멸시킬 수 없는 삼지행이었고, 영근을 가진 인족으로선 어찌할 수 없는 힘이었다.

    게다가 왕의 정수를 통해 삼지행 속에 굴복하라는 명까지 함께 담았기에, 청교장이 절대 금제를 스스로 풀어내지 못할 거라 준혁은 확신했다.

    잠시 후, 삼지행을 삼킨 청교장의 몸 위 서리가 사라지면서 그의 원영도 몸의 자유를 되찾았다.

    하지만 그는 아까와 달리 두려운 눈빛으로 준혁을 바라볼 뿐,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준혁이 만족한단 듯 씨익 웃고는 좌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 칠 대 이가 아니라 육 대 삼이 되었군요. 본격적으로 해보시겠습니까?”

    ***

    준혁의 목소리가 사형선고라도 되는 듯 주변이 침묵으로 잠길 무렵.

    “나는 빠지겠습니다.”

    준혁이 순식간에 청교장을 제압하고 금제까지 가하는 모습이 너무나 충격이었는지, 백유라 불린 사내가 바로 발을 뺐다.

    그러자 다른 이들이 우왕좌왕하며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왔던가?

    적마가 훔쳐 간 종문의 보물을 되찾을 기회가 눈앞에 왔거늘, 그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건 다들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괴물 같은 상대를 상대하는 것도 꺼림직했기에 어찌해야 할지 판단하지 못했다.

    그들 중 누구도 청교장처럼 준혁에게 쉽게 당할 거라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준혁이 그를 너무나 빠르게 제압한 건, 결계를 믿고 있던 상황에서 미처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

    만약 제대로 전투가 시작된다면, 수적으로 유리한 자신들이 분명 이길 수 있다고 확신을 하고 있었다.

    다만, 그중에서 한두 명, 혹은 서너 명은 죽어 나갈 수 있을 테고. 그게 자신이 아니라 확신하지 못하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것까지가 준혁이 염두에 두고 있던 일.

    준혁은 애초에 청교장이 목표는 아니었으나, 누구 한 명을 제압하고 나면 분명 다른 이들이 쉽게 움직이지 못할 걸 계산하고 있었다.

    자신의 수행을 급상승시켜줄 단약 쟁탈전이라면 모를까, 수천수만 년을 보지도 만지지도 못했던 종문의 보물을 위해 목숨 걸고 움직일 인물은 많지 않았으니까.

    적마가 훔친 종문의 보물이 그저 상징적인 물건일 수도 있었고, 종문의 자존심을 제외하면 생각보다 중요한 물건이 아닐 수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해서 준혁은 분위기가 형성됐다 여기고는 준비했던 말을 꺼내 들었다.

    “백유 선사. 저를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머지 분들은 어쩌실 텝니까? 아직 몸도 풀리지 않았는데, 한번 시작해 보시겠습니까?”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한 선사들.

    “이렇게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는 적마가 어떤 물건들을 훔쳐 갔는지는 모르나. 그것들이 제 수행에 크게 도움이 될 거라고 여기진 않습니다. 중력괴 어르신의 말을 들어보니 적마가 수많은 보고를 털었던 건 그저 재미와…. 다른 이들의 괴로움을 즐기는 변태적인 성향 때문이었으니까요. 해서 이렇게 제안하고 싶습니다.”

    준혁이 잠시 호흡을 가다듬자, 여기저기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훗날 적마의 창고에 대해 알게 된다면, 그때 각 종문의 물건들을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정말 그리해줄 수 있단 말이오?”

    가장 먼저 청교장과 발을 맞추어 결계를 만들었던 백미 백염의 노인이 반문했다.

    준혁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물론입니다. 혹시 적마가 훔쳐 간 물건이 단숨에 규선이나 신선이 되게 만들어줄 보물입니까?”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세상에 그런 것이 어디 있겠소?”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그런 물건도 아닐진대 제 수행에 욕심낼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애초에 저는 저기 중력괴 어르신을 만나기 전까진 적마가 수많은 종문에서 물건을 훔친 사실도 몰랐고 말입니다.”

    “사실이다. 그놈은 아무것도 몰랐어.”

    준혁의 말에 중괴가 바로 호응하자, 백미 백염의 노인이 결계를 해제하며 날카롭게 생긴 송곳 같은 법기를 회수해 공격 의사를 거두었다.

    “그렇다면 나 역시 백유 수사와 마찬가지오. 이번 일에 손을 떼겠습니다.”

    그리고는 공간대에서 옥간 하나를 꺼내 그 안에 무언가를 담아 준혁에게 날려 보냈다.

    “나는 진산문(陳産門)의 학신도라 하오. 그 안에 우리 종문의 보물에 대해 적어 놓았으니. 훗날 선사께서 약속을 지켜주길 바라오.”

    진산문이란 말에 준혁은 살짝 놀라며 그가 던진 옥간을 잡아채 내용을 확인했다.

    잠시 후 새삼스러운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아는 진산문이 맞습니까? 대라멸진을 만들었다 전해지는?”

    준혁의 질문에 노인은 자부심이 서린 눈으로 고갤 끄덕였다.

    “맞소이다. 시조께서 승천하시기 전 하늘의 뜻을 적어두었고, 그것을 후대가 연구해 대라멸진을 만들었지. 허나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대라멸진은 실전된 지 오래오.”

    “완전히 소실되었다는 말입니까?”

    “보아하니 우리 진산문에 대해 잘 모르고 있나 본데 숨길 게 무어 있겠소. 우리에게 남은 건 십육방 대라멸진이 전부요. 그것만으로 감히 다른 이들이 쉬이 무시하지 못하지만 말이오.”

    다른 이들이 말없이 고갤 끄덕이는 모습을 보면 진산문의 사정은 널리 알려진 듯했다.

    준혁은 대라멸진에 관심이 많았기에 그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주위 눈치가 있어 말을 참았다.

    하지만 그에게 후일 방문해도 되냐며 물었고, 환영한다는 말에 만족했다.

    “정말 약조를 지켜준다면, 우리 적루(赤樓)도 선사의 행보에 더는 관여하지 않겠어요.”

    잠시 후, 학신도가 만족한 듯 한발 물러나자, 홍의를 입은 여인이 옥간 하나를 건넸다.

    그리고 뒤이어 남은 자들도 질세라 자신들의 종문에서 도난당한 물건에 대한 정보를 넘겼고, 준혁은 그들 개개인의 신상을 듣고는 생각보다 대단함에 놀랐다.

    자신이 선수필승의 전략으로 빠르게 상황을 전환시킨 게 천만다행이라 여기면서.

    “수사께선 필요 없으십니까?”

    “저, 저도 해당되는 겁니까?”

    준혁은 마지막으로 백유 수사까지 옥간을 건네고 물러나자, 근처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청교장에게 말을 걸었다.

    청교장은 다른 이들과 달리 자신은 금제에 당했기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가 준혁이 말을 걸자 재빨리 옥간을 건넸다.

    준혁은 그런 그의 행동에 피식 웃고는 은밀하게 전음을 남겼다.

    -수사. 제가 주입한 힘은 금제이기도 하나, 수사께 도움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 그게 무슨….

    -종문으로 돌아가신 후 확인해보시면 될 겁니다. 그리고 훗날 청심문에 방문할 테니 그때 더 많은 얘길 나누었으면 하는군요.

    금제에 당한 자신에게도 다른 이들과 똑같이 대해주자, 청교장은 의심이 담긴 눈으로 준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준혁이 말한 도움이 된다는 뜻을 파악하기 위해 내면을 들여다보려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

    “많기도 하네.”

    일곱 종문의 선사들이 후일의 약조를 기대하며 떠나가자, 그들을 따라온 수많은 하위 수사들이 지상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는 준혁 일행을 기습하려는 의도로 숨어 있던 이들이 모두 가벼운 예를 표하며 그들의 수장을 따라 모습을 감췄다.

    “헌데 정말 돌려줄 생각이냐?”

    중괴는 모두가 떠나자, 음흉한 미소로 물었다. 마치 교묘하게 남들을 잘 속인 준혁을 칭찬하듯이.

    준혁은 그런 중괴를 보고 피식 웃고는 긴장한 채 숨죽이고 있던 일행에게 고개를 돌렸다.

    “화여 소저. 힘을 거두시지요. 조호랑 수사도.”

    “저들이 정말 저렇게 포기하고 떠날까요?”

    모두가 사라진 후에도 혹시 모를 일을 걱정하는지, 소화여와 조호랑은 기세를 칼날처럼 세워 주변을 감시했다.

    일곱 종문이 동시에 움직일 만한 일은 대륙이 전쟁으로 물들지 않은 한 보기 힘든 일이었기에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다들 목적을 이루었는데 남아서 무얼 하겠습니까?”

    “내 말에 대답이나 하거라. 정말 돌려줄 것이냐? 저들이 저렇게 나섰다는 건 적마가 훔쳐 간 것들이 정말 대단하다는 방증 아니냐?”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일행을 안심시킨 준혁은 집요하게 묻는 중괴의 질문에 결국 입을 열었다.

    “돌려줄 겁니다. 다만 빈손으로는 안 되겠지요.”

    “어? 그게 무슨 뜻이냐?”

    중괴의 궁금증에 준혁이 또 한 번 입가를 끌어올렸다.

    “적지주가 인연을 만들었듯, 저 역시 은원을 쌓아두면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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