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화. 대화성으로 (1)
흥분한 듯 숨겨왔던 생각을 가감 없이 표출하는 중괴의 모습에 준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준혁의 태도가 불만이었는지, 그는 쐐기를 박듯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네놈이 그놈을 처치해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네놈도 마선인 이상 결국 그놈이 손을 뻗을 것이니까. 아니 식아에 대해 알게 된다면 모든 일에 우선하여 너를 잡으려 하겠지.”
“흠.”
“천신라를 피하고자 법문에 귀의해도 마찬가지다, 결국 마규보 그놈도 네놈의 힘을 원할 테니까.”
이제 어쩔 거냐 식으로 중괴는 말을 마치고 준혁을 조용히 응시했다. 마치 선택권 따위는 없다는 듯이.
준혁은 중괴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 보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그럼 대부분의 마선들은 두 세력에 나뉘어 몸을 의탁하고 있는 겁니까?”
“그렇진 않다. 나처럼 자유로운 삶을 놓지 않은 자들도 많지. 하지만 그런 자들은 대부분 어딘가에 숨어 살고 있겠지. 마선경과 괴조의 연락을 차단한 채 말이다. 너는 그러고 싶으냐? 그놈들은 더 웃기는 놈들이지, 말로는 자유의지를 지키겠다는 것이지만 결국 그건 자유를 잃는 일 아니냐?”
‘아, 그래서 그들을 보기가 힘들었구나.’
좁디좁은 지구에서도 꽤 많은 마선들을 획득했던 준혁은 선계에 올라온 후 우연히라도 그들에 대한 소식을 접하지 못한 게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아무리 선계가 넓고 마선들의 숫자가 적다고는 하나, 이름을 날리며 활동하는 자들 중 마선이 없다는 게 너무 이치에 맞지 않았기 때문.
중괴의 대답에 이제야 납득이 갔다.
‘전부 숨어 있거나 한곳에 모여있었던 것이군.’
잠시 후, 중괴가 몇 번이나 대답을 종용하다가 무반응에 입을 다물자, 준혁은 생각을 정리하고 말했다.
“어르신의 말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얘길 논하기엔 시기상조인 거 같습니다.”
“시기상조라니! 유비무환이라는 말 모르느냐? 나중에 천신라가 손을 뻗어오면 그땐 준비해도 늦는다.”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어르신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해도 우선 제 수행을 올려야 그에게 맞서든 말든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저 역시 외압에 휘둘리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최선을 다해 수행을 올리겠습니다. 그러니 나중에 다시 논하자는 것이지요.”
준혁의 말이 완전한 승낙은 아니었지만, 일부분 따르겠다는 뜻이었기에 중괴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럼 내 제안을 받아들인 것으로 알고 나는 내 나름으로 준비를 하겠다!”
준혁의 태도를 확정 지었다는 듯 씩 웃는 중괴.
그 모습에 준혁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그의 말대로 어쩔 수 없음을 인정했다.
‘결국 나와 대치점에 설 수밖에 없겠지.’
모든 마선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려는 천신라.
반대로 마선을 잡아먹는 준혁.
누가 보아도 두 사람은 절대적인 반대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
준혁이 독고제의 뜻을 받들어, 모든 마선을 흡수하고 천혈을 성장시켜 천혈족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생각은 없었지만, 결국 천신라와는 언젠가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랬기에 중괴의 허무맹랑한 제안에 단호히 거절 의사를 밝히지 않은 것이었다.
잠시 후, 주가의 전경에서 시선을 완전히 거둔 준혁은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며 비행 법기를 움직였다.
그녀가 혼란을 바로잡고 바로 서는 그날이 언제일지는 모르나, 그동안 준혁은 자신을 위해 희생한 동료이자 친우.
아마르곤의 생사를 확인하러 떠날 생각이었다.
***
“무엇 때문에 흑석대륙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냐?”
“친우를 구하기 위함이라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아니, 그러니까, 가까운 곳에 적마의 창고가 있는데, 왜 우선순위를 가장 먼 흑석대륙으로 정하냔 말이다!”
회화 군락지를 떠나 전송진이 있는 회화성으로 향하는 길목.
중괴는 가까운 곳에 위치한 중림에 들러 적마의 창고가 실존하는지 확인하자고 했다.
하지만 준혁에게 적마의 보물은 우선순위에서 밀렸기에 의견대립이 일어났다.
중괴는 효율적으로 가장 가까운 중림으로 향하자고 했고, 준혁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거부한 상태였다.
“중림에 적마의 창고가 있다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내 감으론 확실하다니까?”
“그리고 그곳을 방문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적마의 보물이 우선순위에서 밀리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중림의 혈수림이라는 곳에 방문하기 꺼려지기 때문.
인족을 식용으로 사용한다는 종족을 마주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정확히는 그들의 특성을 인정해줄 마음의 그릇이 준비되지 않았다.
“에잉~ 맘에 드는 게 하나도 없구먼.”
결국 중괴는 투덜거리며 자리를 비켜섰다.
그리고는 무어라 중얼거리며 준혁을 빠르게 성장시킬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계획한다고 원하는 대로 되는 게 아닌 것을.’
그런 중괴의 모습에 준혁은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는 시선을 거둬버렸다.
그때, 소화여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저, 대인.”
“??”
소화여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망설이다 입술을 달싹였다.
“지구라는 하계…. 그곳에 대해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무엇을 말입니까?”
“어떤 것이든요. 대인에 대해 더 알고 싶…어요.”
수줍어하며 볼이 발그레해지는 소화여의 모습에 준혁은 살짝 당황했다.
“나도 궁금해요, 아 물론 비승이나 하계면에 대해서 말이에요…. 뭐…. 그렇다고요.”
조용히 엿듣고 있던 조호랑도 소화여 말에 맞장구를 치며 끼어들었다.
준혁이 눈치가 없는 사람도 아니고 왜 모르겠는가?
두 여 수사의 마음이 자신에게 일정 부분 향해있다는 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소화여의 경우 목숨을 구함 받았기 때문에 그로 인한 고마움이 표출되는 것이라 여겼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조호랑은 혈맥의 특성상 자신의 심영근과 천혈 때문에 호감을 느낀다는 걸 알았기에 오해하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조용히 눈치만 보내던 두 사람이 주서령을 만나고 온 후, 조금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 내심 당황하는 중이었다.
눈치는 빨랐지만, 여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준혁의 한계였다.
질투라는 감정을.
***
천운대륙에서 호란대륙으로 넘어가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고문성.
대륙을 잇는 전송진이 설치된 고문성의 상공엔 다양한 복장의 수사들이 무리 지어 있었다.
총 일곱 명인 그들은 각각의 복장만큼이나 다양한 생김새의 비행법기 위에 올라 있었는데, 하나같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중 푸른 법복을 입은 자가 조금씩 떨어져 있는 수사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얼굴 보기 힘든 분들이 죄다 모이셨군요. 다들 마선경이 보낸 소식을 전해 들으셨나 봅니다?”
푸른 법복을 입은 사내의 말에 불타는 듯한 홍의를 입은 여인이 냉소를 치며 말을 받았다.
“흥, 마선경? 나는 내가 가진 세작들의 정보를 듣고 온 것이다. 멍청하게 아직도 마선들에게 놀아나나 보지? 당신은?”
“허허, 교호홍 수사는 여전히 입이 거치십니다. 어디 그래서 시집이나 가시겠습니까? 아참! 이미 일곱 번이나 가셨다 오셨지요?”
“뭐! 이 빌어먹은 지렁이 같은 게 지금 해보자는 거야?”
여인은 푸른 법복의 사내를 향해 비아냥거리다가 자신의 과거를 들추는 청갑을 입은 사내의 말에 발끈했다.
“허허, 지렁이라니 우리 용설족(龍雪族)을 그리 부르는 사람은 그대밖에 없을 겁니다.”
“용설 좋아하네. 네 것들이 원신을 드러낼 때 허연 지렁이처럼 변하는 걸 모르는 이들이 있을까?”
“허허, 저 주둥이를 꿰매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허허.”
한두 번 티격태격 해본 게 아닌지, 당장이라도 싸울 것처럼 투덕대는 두 사람을 나머지 인원들은 본체만체 신경도 쓰지 않았다.
먼저 말을 꺼냈던 푸른 법복의 사내도 두 사람이 원래 그러는 걸 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시선을 멀리 둘 뿐이었다.
“저 역시 마선경 그자의 전언을 전해 들었습니다. 조만간 적마가 이곳을 방문한다더군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선경에게 소식을 들은 후, 드디어 그 도적놈을 잡을 생각을 하니. 도통 수련에 집중할 수도 없어 일찍부터 이곳에 와 대기 중이었습니다.”
여전히 투덕거리는 두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인원들은 푸른 법복 사내에 말에 호응하며 대답을 이어갔다.
“분명 우릴 이용해 어부지리를 노리려는 건 줄 알면서도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으니 원 참….”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마선들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 능력은 그자밖에 없으니까요. 우리가 적마를 잡음으로써 그자에게 어떤 이득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우린 우리가 필요한 것만 얻으면 됩니다.”
“맞는 말입니다. 저도 적마가 훔쳐 간 저희 종문의 가…. 크 흠…. 아무튼 원하는 것만 얻는다면 마선경의 손아귀에 놀아나도 딱히 상관없습니다.”
백미가 유난히 고풍스러운 노인이 이를 바득거리며 내뱉은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여기 모인 이들은 전부 적마에게 보고를 털린 경험이 있었고, 적마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발만 동동 구르며 그를 찾았던 이들이었으니까.
그때, 남쪽 방향에서 비행 법기로 추정되는 조각배가 하늘을 가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허, 정말 전송진이 아니라 비행으로 대륙을 종단했군요.”
“흘흘, 적마 그자가 천휴림이라고 사이가 좋겠습니까? 간이 콩알만 해 천운성의 전송진을 이용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옵니다. 다들 준비한 게 있다고 알고 있으니 이번엔 절대 적마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겁니다.”
“부문주나 신경 쓰시오. 나는 오늘 적마를 놓칠 바에야 귀천을 택할 테니.”
점처럼 보이던 비행 법기가 점점 가까워지자, 푸른 법복의 사내가 모두에게 신호를 보냈고, 신호에 맞춰 일곱의 인원이 거리를 두며 멀어졌다.
잠시 후, 빛살처럼 날아오던 조각배가 마중 나온 수사들을 인지한 건지,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멈춰 섰다.
혹시나, 비행법기 위에 있을 것이라 예상되는 적마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도망갈까 염려하는 사이.
조각배 위에서 누군가의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누구야? 허연 지렁이 왕 백유 아닌가? 나를 기다렸던 건 아닐 테고? 무슨 일이지?”
잠시 후, 조각배가 모습을 감추며, 삼남 이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운대륙을 떠나온 준혁 일행이었다.
거리를 두고 대기하고 있던 일곱의 인물 중, 여인과 쉬지 않고 투덕거리던 사내를 향해 중괴가 반가운 듯 인사하자, 백유라 불린 사내가 멋쩍은 듯 난감한 표정을 했다.
“허허, 오랜만일세 중력괴.”
“여긴 어쩐 일이지?”
“흠…. 자네를 만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면하게 돼서 참으로 곤란하네. 나는 그대 옆에 있는 저자. 적마를 만나러 온걸세.”
“적마?”
백유의 손짓에 중괴가 준혁을 흘겨보다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뒤로 물러났다.
“그렇다는데?”
중괴의 장난스러운 행동에 준혁은 피식 웃고는 무리 앞으로 나서며 가볍게 인사했다.
“다들 저를 기다리신 듯한데, 무슨 일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