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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318화 (318/408)
  • 318화. 인연이란? (3)

    모두가 긴장한 듯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석실 안.

    주서령의 높고 낮은 호흡만이 반복적으로 들리며 이상한 기류를 만들어냈다.

    적지주의 권능으로 전생의 기억을 받아들인 주서령은 여전히 두 눈을 감은 채 눈 주위를 파르르 떨어댈 뿐이었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괜찮습니까?”

    그녀가 기억을 정리할 시간을 가졌다고 여긴 준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주서령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는 한참이나 안타까운 눈빛으로 준혁을 응시했다.

    스르륵-

    잠시 후, 한걸음 성큼 다가가더니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는 준혁의 얼굴을 한 손으로 가볍게 만졌다.

    “당신….”

    “…….”

    “당신은 불쌍한 사람이군요.”

    “그게 무슨.”

    주서령의 뜻밖의 말에 준혁이 의문을 담아 바라보자, 그녀는 준혁의 한쪽 뺨을 쓰다듬던 손을 내려 준혁의 심장 어림에 손을 두었다.

    “여서령이란 여인의 기억과 감정뿐 아니라 당신의 감정 일부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래서 묻고 싶어요. 당신은 그녀를, 아니 저를 애정하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온 건가요?”

    “그건….”

    “아닐 거에요. 기억 속의 당신은 그녀, 아니 저를 한 번도 바라본 적이 없어요.”

    준혁이 범인이던 시절, 여서령의 미모에 가슴이 쿵쾅거린 적이 있긴 했지만, 그 감정이 애틋한 사랑의 감정은 아니었다.

    “저 혼자 당신을 염려하고 그리워하다, 당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위해 무리를 한 것뿐이죠. 그러다 생각지도 못한 죽임을 당한 것이고.”

    주서령의 말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이, 그녀는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다시 물을게요, 당신은 저를 애정하는 마음으로 전생의 인연을 만나러 이곳에 온 건가요? 아니면 죽기 전 그녀가 원했던 다시 만나자는 약속, 그것 하나만을 지키기 위해 온 건가요?”

    “그건….”

    준혁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주서령은 스스로 결론을 내려버렸다.

    “그래서 당신이 불쌍하다고 말한 거예요. 모든 수도자는 영생을 꿈꾸며 수련을 하고, 각자의 이상을 위해 살아가죠. 하지만 당신은 뭔가요? 어째서 스쳐 지나갔어도 괜찮을 그런 작은 약속 하나를 위해 평생을 달려온 건가요?”

    준혁은 주서령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온다는 것도 모른 채 그녀가 던진 화두에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녀의 말대로 그는 약속 하나만을 위해 쉬지 않고 달려온 게 맞았다.

    그 과정에서 여러 부침이 발생했고, 강해지고자 하는 욕구가 생기긴 했지만, 그것 역시 외적인 요소에 흔들리기 싫었기 때문이지 수행 자체를 올려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런 준혁이 촌철살인과 같은 주서령의 말에 고뇌에 빠진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이 모든 일이 준혁이 적지주의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 생긴 일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여서령의 기억만 전해 받아야 했을 주서령이 준혁의 기억과 감정 일부까지 함께 전달받아 그녀 역시 혼란한 건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에 그녀의 목소리가 떨린 이유도, 준혁이 자신에게 감정이 있는 것인지 아닌지 알고 싶어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었다.

    미련하게 약속을 지키려 한 상대방도 안타까웠지만, 한편으론 누군가를 짝사랑하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죽은 과거의 자신도 불쌍했으니까.

    남자란 생물에 대해 혐오까진 아니어도 완전히 배척하며 살아온 것과 같은 자신이 누군가를 위해 한평생을 마음 졸이다 목숨까지 잃었으니 말이다.

    준혁은 자신을 말없이 바라보는 주서령의 눈빛에서 슬픔을 읽었다.

    하지만 그 슬픔이 누굴 향하고 있는 것인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본인의 감정도 모르시고 살아오신 건가요? 그럼 생각할 시간을 드릴까요?”

    망설이던 준혁이 결국 입을 열었다.

    어느새 망설이던 눈빛은 사라지고, 생각의 정리가 끝나 보였다.

    “아닙니다. 말을 듣고 보니 분명 그러한 바가 없지 않습니다. 나는 나와 내 동생을 위해 희생한 당신을 마음에 담았고 당신과 한 약속을 이행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살았습니다.”

    “그러시군요….”

    “당신을 애정하여 이곳까지 온 거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확신을 담아 말하긴 힘듭니다.”

    준혁의 입에서 원하는 답변이 나오지 않자 주서령은 마음이 아리는 느낌에 살짝 흔들렸다.

    적지주의 능력으로 잠시간 동안 전해 받은 기억과 감정이라고는 하나, 여서령이 했던 모든 행동과 기억이 이미 각인되듯 새겨졌기에 준혁의 말에 가슴이 아려왔다.

    그 아려옴이 주서령 본인의 아픔인지, 전생의 여서령의 아픔인지는 분간할 수가 없었지만, 분명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그때 할 말이 남았다는 듯 준혁이 말을 잇자 주서령의 동공이 확장됐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그게…. 무엇인가요?”

    떨리듯 묻는 주서령의 목소리.

    준혁은 그녀의 눈빛을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이 보고 싶었습니다.”

    “아….”

    덥석-

    주서령이 준혁의 품을 파고들며 그를 안았다.

    ***

    한참 후.

    “험험.”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주백강이 흐뭇한 미소로 기침 소리를 내자, 주서령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급히 몸을 추슬렀다.

    “내가 무슨 짓을.”

    그리고는 빤히 바라보는 준혁을 향해 눈을 흘기며 변명했다.

    “방금 이건 제가 원한 게 아니에요. 그녀, 그러니까 여서령의 감정이 저를 움직이게 한 거예요.”

    누가 물어보지도 않은 말에 변명하는 그녀를 보며 준혁은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특히 준혁은 적지주의 능력을 사용한 당사자였기에 누구보다 주서령의 상태를 확실히 파악하고 있었다.

    지금의 주서령과 과거의 여서령.

    두 사람의 감정과 기억이 하나의 몸 안에 공존하며 한창 혼란스러울 터였으니 말이다.

    “이제 볼일은 마친 것 같은데.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되겠느냐 서령아.”

    주서령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그 시점, 시기적절하게 주백강이 끼어들자 준혁과 주서령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주백강의 안내를 받으며 수련공간처럼 보이던 석실을 빠져나가기 위해 움직였다.

    “과거의 인연을 만나 좋으신가 보네요?”

    그때, 모든 일을 마쳤다는 듯 홀가분해 보이는 준혁을 향해 소화여가 은근하게 의중을 물어왔다.

    준혁이 답변하려는 사이.

    “그러게요. 누가 보면 수행이라도 오른 것처럼 행복해 보이시네요.”

    조호랑이 소화여의 말에 맞장구치며 옆을 스쳐 지나갔다.

    준혁은 소화여의 말에 대답하려다 그녀마저 조호랑과 빠르게 자리를 뜨자, 피식 웃고는 그 뒤를 따랐다.

    ***

    회화 군락지가 내려다보이는 상공.

    한쪽으론 조그맣게 주가의 전경이 눈에 들어오는 위치.

    준혁은 조각배 법기의 끝에 서서, 주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각종 연회를 비롯한 주백강의 환영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주서령이 감정을 추스르고자 혼자 있고 싶다는 말에 주가를 떠나온 준혁.

    그녀는 준혁이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으면 자신이 주체가 아닌, 과거 여서령의 감정에 휘둘릴 거 같다고 준혁에게 떠나주길 바랐다.

    그리고 전생의 기억과 현생의 감정이 균형을 잡아 온전하게 자기중심을 잡는다면, 그때 준혁을 다시 찾겠다고 했다.

    준혁 역시 그 의견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전생의 기억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정체성의 혼란으로 심각한 상황을 맞닥뜨릴 수 있고, 심하면 심마로 수행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으니까.

    “이제 어쩔 것이냐? 정해진 계획은 있고?”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중괴가 기척을 내며 다가와 준혁 옆에 바짝 붙었다.

    ‘계획? 해야 할 일은 많지.’

    중괴의 물음에도 준혁은 여전히 주가의 전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마르곤을 찾고 지구와의 통로를 연결하고, 시간이 된다면 공천귀의 무덤과 적마의 창고를 찾는 것까지. 거기다 더해 마선기록방이 있을 것으로 의심되는, 면교만이 발굴하려던 사막의 유적지까지.

    하지만 중괴의 물음이 그런 세부적인 사항을 묻는 게 아님을 눈치챈 준혁은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돌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 겁니까?”

    “크흠. 뭐, 꼭 하고 싶다기보다는…. 내가 제안을 하나 하고 싶은데 말이지.”

    “편히 말씀하십시오.”

    살짝 주저하는 중괴의 모습에 준혁은 드디어 때가 왔음을 눈치챘다.

    면교만에게서 자신을 구해줬을 때부터 시작해 크고 작은 도움을 베풀었던 중괴.

    그가 예전부터 자신에게 바라는 게 있음을 눈치챘기에 언제쯤이면 그것에 대해 입을 열지 궁금해했었다.

    “흠…. 오해 말고 듣거라.”

    “걱정 마시고 말씀하시지요.”

    “흠, 나를 도와 천신라를 처치하지 않겠느냐?”

    “예? 농담이 심하십니다.”

    중괴가 어떤 말을 하든 긍정적으로 대답하려 했던 준혁은 갑작스러운 제안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천신라라면 삼대 세력이라 불리는 선마궁의 주인이자, 수많은 마선들을 거느린 최강자.

    이미 신성경에 다다라 하늘 같은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마선.

    준혁이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하자 중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지금 당장을 말하는 건 아니다. 훗날 네놈이 그만한 실력을 갖추었을 때를 준비하자는 거지. 수락만 한다면 내 모든 걸 동원해 네놈의 수행을 돕겠다.”

    “진심이십니까?”

    “그럼 내가 네놈과 말장난이라도 하려는 줄 아느냐?”

    “흠…. 설명이 너무 부족한 거 같습니다. 혹 복수를 원하시는 겁니까?”

    중괴는 준혁이 표정을 달리하자, 장난스러운 모습을 지우고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크흠, 그래 내 생각에도 너무 갑작스럽긴 했지. 하지만 복수 때문만은 아니다. 흠.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나. 그래. 거기서부터 하지. 네 녀석은 마선이 어떤 존재인지 정확히 아느냐?”

    천혈을 전해 받으며 독고제에게 충분한 정보를 들었기에 누구보다 마선의 기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준혁.

    하지만 중괴가 어떤 말을 할지 궁금했기에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대충은 들어보았으나 자세히 아냐고 물으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지? 그럴 줄 알았다. 그러면 거기서부터 시작하지.”

    준혁과 중괴의 대화가 호기심을 자극했는지, 어느새 소화여와 조호랑도 바짝 몸을 기울였다.

    중괴는 몇 번의 헛기침으로 좌중을 집중시키고는 말을 이었다.

    “마선은 고대 종족의 힘의 일부였다. 그러던 것이 무슨 이유에선지 분화하기 시작했고, 자유의지를 지닌 지금의 존재들로 태어난 것이지.”

    그렇게 마선기로부터 태어난 마선들은 다른 수도자들과 달리 천방지축이었고 제멋대로 살아갔다.

    처음부터 영원불멸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수행을 쌓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고, 무언가에 집착하지도 않았다.

    누군가는 상인이 되어 세상을 떠돌았고, 또 누군가는 농부가 되어 밭을 일구기도 했다. 물론 수행을 올리는 데만 집착하는 이도 있었고, 극악한 짓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이도 있었다.

    그렇게 바람이듯 구름이듯 자유롭게 살아가던 마선들은 천신라라는 천재지변과도 같은 이를 마주하게 된다.

    “천신라가 그들을 억압하기 시작한 겁니까?”

    “그래, 그놈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가두려 했지.”

    가장 먼저 태어나 선천적으로 가진 권능이 그 누구보다 우월했던 천신라는 권력과 지배라는 의지가 확고한 이였다.

    그는 마선 전원을 지배하에 두길 원했고, 그럴만한 실력이 있었기에 실행에 옮겼다.

    “처음 천신라에게 맞선 건 법문을 세운 마규보였다.”

    마선기로부터 두 번째로 태어난 마규보는 자신의 자유의지를 억압하려는 천신라에 대항했고, 힘이 부족하자 세력을 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월이 의지를 좀먹는다고 했던가?

    세력을 키워 천신라에 대항하던 마규보는 본래의 의미가 퇴색하게도 계속해서 세력을 키우는 데만 집중했다.

    “그놈도 권력을 잡고 나니 알게 된 거지. 천신라가 왜 그것에 집착하는지. 그래서 내가 나서게 됐다.”

    마규보를 도우며 천신라의 억압에 대항하던 중괴는 결국 몇몇 친우들과 천신라를 상대하기에 이르고 만다.

    하지만 아무리 중괴가 손꼽히는 최강자였다고는 하나 그의 앞에선 중과부적.

    결국 힘의 일부를 빼앗기고는 겨우 목숨만 건져 도망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지금도 진선인데…. 그럼 그전엔 더 수행이 높았단 말인가?’

    준혁은 공천귀의 무덤을 찾아야 한다고 목소릴 높이던 중괴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는 사이 중괴의 말이 이어졌다.

    “그 후 나는 모든 걸 포기하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그러다 네가 뇌명숲에 찾아왔을 때, 그때! 새로운 희망을 찾게 된 거지.”

    “식아 때문이군요.”

    “그래! 모든 마선을 먹어 치울 운명을 타고난 아이! 그 아이가 계약한 너, 천신라를 막을 자는 너 하나뿐이다!”

    “흐음….”

    “그것뿐이냐! 거기에 더해 마선들을 억압할 힘도 가지고 있지 않으냐? 네놈이 화여를 고친 걸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놈이면 된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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