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화. 인연이란? (2)
마족 삼인방의 원영을 중괴의 도움을 받아 흡수하는 데 걸린 시간은 7년.
가장 약했던 요라제의 원영을 흡수하는 데 3년이 걸렸고, 그 뒤로 두 명은 점차 익숙해져 시간이 단축되었다.
그냥 흡수하고 체화시키는 것이었다면 달랐겠지만, 고밀도로 압축하며 화신체 비술로 다듬다 보니 꽤 오래 걸리고 만 것이다.
세 원영의 흡수를 끝낸 준혁은 나머지 대천경 수사 두 명의 원영은 그대로 보존한 채 산맥을 벗어났다.
그리고는 곧장 고문성으로 돌아가 천운대륙의 중심인 천운성으로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그 후에 한두 번만 더 전송진을 이용하면 최종 목적지인 남운대륙의 회화성이 목전이었기에 여정은 쉽게 끝을 볼 것 같았다.
하지만 일행의 이동은 중괴의 저지로 또 한 번 멈출 수밖에 없었다.
준혁이 대막리를 만난 것에 대해 알게 된 중괴는 천휴림의 지배를 받는 천운성을 피하자고 제안했고, 일행은 천운대륙을 비행으로 횡단해야만 했다.
그렇게 수년을 날아 천운대륙 남단의 하류성으로 이동.
그곳에서 다시 전송진을 이용해 남운대륙의 회화성으로 이동한 후, 성을 벗어나 목적지를 향해 하늘을 갈랐다.
그리고 마침내. 일행은 회화 군락지에서 공허한 눈으로 사색에 빠진 여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 아이냐?”
비행 법기의 조종을 영역분신에게 맡긴 준혁이 멀리 바라보며 그리운 눈빛을 보내자, 중괴가 무심하게 말을 걸었다.
“그렇습니다.”
“제법 반반하게 생겼구나. 인족놈들은 껍데기에 집착한다던데, 꽤나 시달림 좀 당했겠어.”
자고로 미인은 풍파를 피해갈 수 없는 법.
중괴의 말에 준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가 아는 여서령은 욕망도 많고 결단력도 있는 여인이었다. 그런 이들은 대체로 풍파가 닥쳐도 깨부수고 나갈 강인한 사람이었기에, 시달린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물론 지금의 여서령이 전생의 그녀와 같은 사람이라는 전제하에 말이다.
“우릴 발견했구나.”
그때 사색에 잠겨있던 여인이 시선을 준혁 일행에게 고정했다. 태세를 갖춘 걸 보면 외부인에 대해 경계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에 준혁은 복잡한 감정을 내비치다가 중괴의 말에 깨달은 바가 있어 놀라고 말았다.
“헌데 저 아이. 소천경 수사구나.”
“예?”
‘소천경이라고? 그녀의 환생이라면 그 기간이…. 설마?’
오래전 태식이 말했던 남운대륙의 천재 수사.
삼백 년도 되질 않아 화신기에 오르고 그 뒤로 경천동지할 수행 속도로 소천경에 이르렀다는 여인.
천운대륙을 넘어 남운대륙으로 오면서 몇 번이나 흘려들은 적 있던 여수사에 관한 얘기가 문뜩 떠올랐다.
‘그녀가 그 수사였군.’
준혁은 발아래 펼쳐진 회화의 모습에 소문으로 들었던 천재 수사가 여서령과 동일 인물임을 깨달았다.
‘예전에도 천재 소리를 듣더니. 사람의 기질은 변하지 않나 보구나.’
물론 지금처럼 세상을 놀라게 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지만, 하계에서도 여서령은 오라비들을 압도할 정도로 천재 소리를 듣고 자랐었다.
“긴장하고 있는 것 같으니, 빨리 가시지요.”
그때 여서령으로 추정되는 여인이 전음부를 날리며 제대로 된 방비 태세를 갖추는 모습에 준혁이 이동속도를 올리며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
일행보다 한발 앞서 지상에 내려온 준혁은 자신이 보일 수 있는 가장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주서령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의 기세로 보아, 외부 세력에 대한 적대적 방어 태도를 유지하는 것 같아 최대한 안심하라는 듯이.
“드디어 만났습니다. 서령 아가씨.”
준혁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주서령은 가슴이 철렁한 표정으로 눈빛이 흔들렸다.
“누, 누구시죠? 남운성주가 보냈나요?”
“아, 오해가 있는 듯싶습니다. 우선 제 소개를 하도록 하죠. 저는 지구라고 불리는 하계에서 비승한 비승 수사 최준혁이라 합니다.”
범인들이나 쓸법한 아가씨라는 말에 이상한 느낌을 받고 있던 주서령은 비승 수사라는 말에 또 한 번 놀랐다.
“예? 비승 수사? 그런데 저에겐 무슨 볼일….”
“뭐?! 비승했다고?! 참말이냐?!”
준혁의 입에서 나온 말에 마주하고 있던 주서령보다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중괴가 더 놀라 목소릴 높였다.
그리고 그건 소화여도 다르지 않았는데, 조호랑만이 그것도 몰랐냐는 듯이 작게 웃음 지었다.
마치 준혁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고 있어 우월하다는 듯이.
-어르신, 나중에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속일 의도가 있던 건 아니지만, 자신의 비승 사실을 알려봐야 딱히 좋을 게 없기에 그동안 말하지 않았던 진실.
준혁은 중괴를 달래놓고 주서령에게 집중했다.
“혹시 적지주에 대해 알고 있으십니까?”
“들어본 적은 있어요.”
태세가 살짝 풀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경계의 자세를 유지하는 주서령의 모습에 준혁은 편안하게 최대한 자세한 얘길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얘긴 준혁을 따라온 일행들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에 숨소리마저 감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이런 말이 이상하게 들리실 수도 있지만 저는 수행을 쌓기 전 범인이던 시절에 그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시작해 이어진 준혁의 이야기.
물론 자신의 모험과 관련된 건 전부 배제하고 여서령과 연관된 것들만을 풀었기에 그토록 많은 얘길 담고 있진 않았다.
하지만 듣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불러오기에 충분한 이야기였기에, 주서령의 표정도 점차 심각해져 갔다.
잠시 후, 준혁의 입이 닫히자 주서령이 생각에 빠진 듯 말이 없다가, 한참이 지나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수사의 말씀은 제가 수사와 인연이 있는 여인의 환생이란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여서령. 저는 그녀와의 약속을, 아니 당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입니다.”
화악-
주서령의 반문에 준혁이 답한 그때, 준혁의 등 뒤로 붉은 거미가 나타나더니 여덟 다리를 오므렸다.
그러자 주서령이 깜짝 놀란 얼굴로 뒷걸음질 치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에 손을 들었고, 그녀의 손목에 생전 처음 보는 붉은 실로 만든 팔찌가 나타났다.
“이, 이게?”
“적지주의 인연실입니다.”
놀라는 주서령을 향해 준혁도 손을 들어 올려 붉은 실로 감긴 자신의 손목을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적지주의 권능을 발현하자, 그녀의 손목에 자리한 붉은 실이 실타래처럼 풀어지며 준혁의 손목의 붉은 실과 하나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허락한다면, 그대의 과거, 아니 전생을 보여주겠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
남운대륙 서남쪽에 위치한, 회화를 지킨다는 주가.
주가의 구성원들이 전부 모여 사는 이곳에 오늘 특별한 손님이 찾아온 상태였다.
주가의 꽃이자 보물인 주서령이 데려온 손님은 대륙 전역에 이름이 알려진 중력괴라는 마선과 그의 동료들.
주서령의 전음부를 받고 바로 전력을 꾸리던 가주 주백강은 갑작스러운 강자들의 출현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딸아이의 전생을 알려주시겠단 말입니까?”
준혁의 제안을 받아들인 주서령은 한 가지 제안을 걸었다.
처음 보는 이들에게 정확히 어떤 술법인지도 모를 것을 받아들여야 하니, 최소한의 안전은 보장해야겠다는 것.
그리고 그 방법으로 준혁이 적지주의 능력을 사용하기 전, 가문의 보호를 받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주서령은 중괴와 준혁의 수행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고, 가문으로 함께 이동한 뒤에야 그들이 진선급 강자임을 알게 되었다.
그제야 그녀는 준혁 일행이 자신에게 강제로 술법을 걸 수 있음에도 배려해준 것이란 걸 깨닫고, 조금 더 마음을 편하게 먹을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준혁이 손목을 들어 올려 보이자 나타난 붉은 실에 주백강은 침음을 흘리며 자신의 딸을 살폈다.
딸의 손목에도 똑같은 붉은 실이 있었고, 은은하게 준혁의 손목과 이어져 있는 모습에 수긍하고 말았다.
“적지주의 인연실…. 듣기는 했지만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저 아이가 전생의 인연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준혁의 손목에 감긴 붉은 실을 보는 주백강의 표정은 심란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감이 잔뜩 담겨있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주서령은 본인이 생각지도 못한 과거의 기억을 전해 받아야 하기에 미지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지만.
주백강은 딸로 인해 최강자 계열의 선사들과 인연을 맺을 수가 있으니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 인연실은 서로가 서로를 잊지 않기 위해 맺은 약속이었으므로, 준혁이라는 강자가 딸과 엮이는 건 아비로서 매우 반길 만한 상황이었다.
특히 혼사 문제로 속을 썩이고 있는 현재 상황에선 더더욱.
잠시 후, 주백강의 안내를 받은 준혁 일행은 주서령과 함께 화려한 대전으로 이동했다.
그곳엔 이미 지시를 받은 것인지, 수많은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준혁 일행이 나타나자 중간 정도의 예를 올리며 다 같이 몸을 숙였다.
“두 분 선사를 환영합니다.”
그중, 가장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이가 일행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저는 가주의 애비인 주류라고 합니다. 명성이 자자한 중력괴 선사와 최근 호란대륙을 강타한 최 선사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버님, 이분들을 아십니까?”
주백강은 중력괴는 알아보았지만, 준혁이 정확히 어떤 인물인지 몰랐기에 주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대화성의 주인에 대해 듣지 못했느냐?”
“아! 설마 이분께서!”
“그래. 동급 선사 수명을 잡아 죽, 크흠…. 혼자서 상대하신 그분이다. 자, 이럴 게 아니라 우선 저쪽으로 가셔서 가벼운 담소나 나누시지요.”
주류의 말에 주백강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준혁을 응시하다가 그 옆에 조용히 시립해 있는 딸을 향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가문의 분위기를 읽은 준혁은 불편한 듯 단호하게 자기 뜻을 밝혔다.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우선, 제가 해야 할 일을 해야겠으니 다른 것들은 미루심이 어떠십니까?”
“아…. 그, 그렇습니까?”
준혁의 발언에 주류와 주백강은 순간적으로 말을 잃고 당황했다. 그러자 주서령이 한발 나서며 두 명을 노려보았다.
“두 분의 마음은 알겠으나, 저 역시 이분 생각과 같아요. 여기까지 이분들을 모시고 온건 제 안전을 고려한 것이지, 수다나 떨자고 한 건 아니니까요.”
“크흠. 큼!”
평소에도 올곧은 대나무처럼 뻣뻣한 주서령의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주류가 불편한 심사를 고스란히 표현했다.
주서령은 그런 할아버지를 외면하고 준혁에게 한쪽을 가리키며 앞장섰다.
“이곳엔 보는 눈이 너무 많으니 저쪽으로 가시죠.”
***
처음 들어섰던 화려한 대전과 달리, 고즈넉한 느낌의 석실.
주서령이 공법을 수련할 때 주로 기거하는 곳인 듯, 곳곳엔 옥간과 사람의 인체 지도가 걸려있었다.
중괴와 소화여 등을 포함한 준혁 일행과 주백강을 비롯한 몇몇 소수의 인원만 함께한 자리.
“저는 준비됐어요.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 거죠?”
준혁은 당당한 주서령의 모습에 여서령의 옛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고는 그녀의 앞에 마주 섰다.
그리고는 적지주의 권능을 발휘해 붉은 거미를 소환하며 한 손을 앞으로 뻗었다.
“가만히 있으시면 순식간에 끝날 겁니다. 다만 경계를 지우고 마음을 편히 가지십시오. 그래야 인연 실이 그대를 잃어버린 전생으로 안내할 테니.”
주서령은 준혁의 설명이 끝남과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몸을 보호하던 기운들을 전부 해제해버렸다.
그리고는 진짜 무방비 상태가 되어 준혁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여전하구나. 한번 마음먹으면 당차게 행동하는 모습이.’
준혁은 그런 주서령의 모습에 아련한 눈빛을 머금다가 식검으로 이어진 적지주의 권능을 발현했다.
화아악-
그 순간, 준혁 손목의 붉은 실과 주서령 손목의 붉은 실이 하나로 연결되었다.
“아아….”
실이 연결되자 주서령은 눈을 파르르 떨더니, 자신도 모르게 환희에 찬, 하지만 슬픔이 담긴 목소리를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