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화. 인연이란? (1)
대화성 전송실에서 대륙 남쪽 끝의 명규성으로 이동해 온 준혁 일행은 성주의 신분패를 이용해 곧바로 전송진을 재이용하려 했다.
전송진 하나가 드넓은 대륙을 전부 커버할 순 없었기 때문에 천운대륙으로 가기 위해선 중간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송진 발동에 시간이 필요했기에, 진법이 발동되는 모습을 보며 잠시 대기 시간을 가졌다.
‘그때 그자 이름이 독고진이라 했던가?’
그사이 준혁은 선계에 올라온 직후 만났던 수사를 떠올리고 있었다.
대막리 수하와 함께 있었던 명규성 출신이라던 그자는 천혈족 마지막 후인인 독고제와 같은 성을 쓰고 있었는데, 명규성에 오자 혹시나 하고 그의 존재가 떠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독고 성씨는 흔하다는 조호랑의 말에 피식 웃고는 상념을 날려버릴 수 있었다.
그렇게 또 다른 상념을 불러와 고민을 거듭하는 사이 재전송이 가능하다는 말에 일행들과 진법 위에 올라섰다.
“그럼 천운대륙의 고문성(高門城)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전송진이 발동되며 또다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
천운대륙의 북서쪽 끝이자, 대륙의 성문 역할을 하는 고문성.
고문성에 도착한 일행은 바로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지 않고, 중괴의 제안에 가까운 산맥으로 숨어들었다.
정확히는 중괴와 준혁의 제안이었다.
준혁은 잡아들인 진선급 선사들의 원영을 흡수해야 할 필요를 느꼈고, 중괴의 도움을 받기 위해 조용한 곳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혈단법의 금빛 실로 원영을 묶어두는 것만으로 영력 소비가 꽤 심해,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저 아이들도 함께할 것이냐?
어느덧 산맥 깊은 곳에 이르자 중괴가 소화여 등을 향해 눈짓하며 물었다.
-그럴 순 없지요. 가까운 이들이라고는 하나 어르신과 저만 알고 있으면 합니다.
원영의 기운을 흡수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져 봐야 좋을 게 없었기에 준혁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중괴의 도움을 받는 것이긴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기괴한 능력으로 보일 게 분명했으니까.
잠시 후, 준혁은 요마족 선사들과의 전투 후유증이 남았다는 핑계를 대고 중괴와 더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고, 나머지 일행은 그런 그를 기다리며 산맥 입구에 진을 쳤다.
깊은 산맥으로 숨어들어온 준혁은 땅을 파고들어 지하 깊숙한 곳에 공동을 만들어 중괴와 자리했다.
“우선 하나 꺼내 보거라.”
중괴가 기대에 찬 듯 말하자, 준혁은 세 원영 중 가장 약했던 요라제를 공간대에서 꺼냈다.
금빛 실에 누에고치처럼 감겨있는 요라제의 모습에 중괴가 고소하다는 듯 비웃었다.
그리고는 주변으로 자신의 영역을 퍼트리더니 의지를 금빛 누에고치로 집중했다.
그러다 긴장한 준혁과 눈이 마주치자, 중괴답지 않게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헌데 버틸 수 있겠느냐? 네놈 말대로 네놈이 진짜 대천경에 불과하다면…. 잘못하면 몸이 붕괴할 수도 있다. 네놈이 장담하길래 돕긴 하지만. 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역시 단번에 힘을 소화할 자신이 없기에 미리 준비해 놓은 게 있습니다.”
준비라는 말에 중괴가 턱을 위로 까닥거렸다. 빨리 말해보란 듯이.
준혁은 도움받는 처지에서 숨길 이유가 없었기에 어느새 옥간과 마정을 꺼내 들고는 중괴에게 보여주었다.
“설마….”
“예. 요마족 화신체 비술을 연구하다 보니 제게 도움이 될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그들의 기운을 일부만 흡수하고 나머진 화신체처럼 만들어 보관하려 합니다.”
물론 진짜 화신체처럼 의지를 지닌 분신이 되진 않겠지만, 진선급에 이르는 고밀도 영기를 보관하기엔 적합한 충전지가 되어줄 수 있었다.
중괴가 준혁을 괴물 보듯 쳐다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어디서 이런 놈이 나온 건지.”
“시작하시지요. 예상키로 적잖은 시간이 걸릴 테니 한시라도 서두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원래 화신체는 원영을 만들어 화신기급 수행의 인형을 만드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후로 계속해서 영기를 주입하고 성장시키며 천천히 수행을 올리는 게 비술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준혁은 단숨에 진선급 영기를 품은 화신체를 만들어야 했고, 그 말은 엄청난 기운을 압축하고 또 압축해 초고밀도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 과정이 얼마나 지난하고 지루할지 알 수 없었기에, 일행에게 수련의 시간을 보내며 기다려달라는 말만 했었다.
“그래. 그럼 시작하마. 네놈 말을 들어보면 분명 일리가 있지만,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일인 건 분명해. 아니, 시도할 엄두조차 못 낼 일이지. 그러니 나는 보조역할을 넘어설 수 없으니 모두 네 의지에 달렸다. 정신 단단히 붙잡거라.”
“예, 어르신.”
준혁의 굳은 대답 직후,
지하 공동을 가득 메우고 있던 중괴의 영역의 힘이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그러자 땅과 하늘이 뒤집힌 듯 모든 기운이 역전하기 시작했고, 준혁이 만들어놓은 금빛 실타래가 하나씩 벗겨나가며 미증유의 힘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그렇게 얼마나 집중과 압축의 시간이 지났을까, 중괴의 외침에 준혁이 혈단법을 운용하며 의지를 발산하자 한 오라기씩 풀어헤쳐지던 금빛 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요동쳤다.
그리고는 개구리를 잡아먹는 뱀처럼 무섭게 회오리치더니 정신을 잃고 공중에 둥둥 떠 있는 요라제의 전신을 파고들었다.
그 순간, 준혁이 마정을 삼키고 원영을 움직였다.
‘가라! 우선 혼백을 지워야 한다!’
그러자 중괴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 준혁의 내부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금빛 실을 통해 요라제의 기운이 흡수되자, 준혁의 원영의 눈빛이 핏빛으로 변하며 귀여운 아기 같은 외형이 불그스름하게 변해 천혈의 힘이 발현되기 시작한 것.
이제는 준혁의 원영과 하나 돼버린 천혈의 권능이 원영의 손끝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이잉-
핏빛 광선이 나타나 준혁의 몸속으로 들어오는 기운들을 소리 없이 녹여버렸다.
그리고는 요라제의 기운이 원래의 힘을 잃어버린 듯 흐물거리자 준혁의 원영은 크게 입을 벌려 그것들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붉게 변한 원영의 이마에 검은 수정체가 나타나 흡수되기 시작한 기운을 나눠 가져갔다.
‘된다!’
그 모습에 준혁이 쾌재를 부르는 사이, 준혁의 모습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중괴는 등줄기로 소름이 올라와 순간적으로 영역의 힘을 풀어버릴 뻔했다.
‘이 무슨! 이 지독한 살기는 무엇이란 말인가?!’
원영뿐 아닌 준혁 본체의 모습.
지금 준혁의 눈은 보고만 있어도 모든 걸 갈라버릴 듯한 괴랄한 핏빛 안광을 분출하고 있었다.
훼멸의 기운이 가득한 핏빛 안광은 지금껏 중괴가 보았던 그 어떤 것보다 극악의 기운을 담은 것처럼 느껴졌다.
중괴는 덜덜 떨리는 마음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겨우 보조를 맞춰가야만 했다.
***
천운대륙과 맞닿아 있으면서 선계의 가장 큰 대륙 중 하나라 여겨지는 남운대륙.
남운대륙 중심에 자리한 남운성에서 서남쪽으로 이동하다 보면 회화 군락지가 나왔다.
초연단의 중요 재료 중 하나인 회화를 탐내는 이들 때문에 그곳은 항상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곳의 터줏대감이나 다름없는 주가(住家)의 아침은 찢어질 듯한 고성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싫다고 했어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어요!”
스치듯 보아도 넋을 잃고 바라볼 만큼 아름다운 여인의 고성에 주가의 구성원들이 어쩔 줄 몰라 했다.
특히 주가의 가주인 주백강은 딸의 고성에 쉽게 말문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가주로서 해야 할 말은 해야 하는 법.
“서령아. 누가 이 혼담을 받아들이자고 했느냐? 그저 고려해 보라고 말….”
“사내라면 질색이라고 분명 말씀드렸어요!”
주가의 꽃이자 500년 만에 소천경에 이른 천재 수사 주서령.
그녀의 미모 때문에 끊이지 않던 혼담이 그녀가 소천경에 오른 후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남운성 성주가 은근히 손을 내밀고 있었는데, 주백경은 그의 뒷배경이 무서워 차마 바로 거절하지 못했고, 결국 이 사달이 나고 만 것이다.
“아니, 이 아비도 사내고, 네 오라비들도 사내인데…. 어찌 그리도 남자를 혐오하느냐?”
주백경의 안타까운 목소리에 주서령이 신경질적으로 받아쳤다.
“혐오가 아니라 그저 쓸모없다 여길 뿐이에요!”
주서령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족을 제외한 남자를 멀리했었다. 마치 그래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커가면서 접하게 된 잦은 시선의 불쾌함에 점점 그 정도가 심해졌고 말이다.
그것 때문인지 커가며 수행을 쌓는 데만 몰두했는데, 전생에 수행을 쌓지 못해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는지, 한번 몰두하면 수년에서 수십 년을 잠도 자지 않을 정도였다.
수도자가 수행을 함에 있어 잠이 필수요건은 아니었지만, 정신적인 피로함을 풀기 위해 그만한 것이 없기도 했다.
그런 잠을 수십 년간 자지 않을 정도니, 그녀가 얼마나 독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잠시 후, 아버지의 거듭된 요청에 결국 주서령은 땅을 박차고 가문을 벗어나 버렸다.
“사내 따위 수행을 쌓는 데 방해만 될 뿐인 것을. 아버지는 어째서!”
신경질적으로 가문을 벗어난 주서령은 생각 없이 하늘을 갈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화 군락지에 도착했다.
그녀가 마음을 다스릴 때마다 들르는 곳이었기에, 정처 없이 움직였는데 이곳으로 오고 만 것이었다.
“정말, 아버지나 오라비들이나 남들 눈치나 보고 말이야.”
그 순간 바람이 불며 회화 향기가 흐트러지듯 코끝을 간지럽히자, 그녀는 부글부글 끓었던 마음이 조금은 안정됨을 느꼈다.
“남운성주? 삼백 년? 아니 백 년이면 내가 따라잡을 수 있어. 두고 봐.”
오래전 보았던 남운성주는 점잖게 생긴 중년의 모습이었다. 언뜻 보기엔 진중하고 대인의 모습을 갖춘 존경받는 수사.
하지만 주서령은 그의 눈빛에서 더러운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정말 싫어!”
그뿐만 아니라 모든 사내들이 그랬다.
자신을 볼 때면 항상 욕정이 가득했고, 한 명의 수사가 아닌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을 보듯 여자로만 대했다.
“반드시 대륙 제일 수사가 되고 말 거야. 반드시.”
주서령은 지금도 모두가 놀랄 만한 성장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더 빨리, 더 높게 올라가고 말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가슴에 되새겼다.
그때, 그녀의 시야로 일단의 무리가 회화 군락지로 접근하는 게 보였다.
기감으로 살피자, 사내 세 명과 여인 두 명.
그들은 정체를 숨길 생각이 없는지 기운을 풀풀 휘날리고 있었는데, 유독 한 사람만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묘한 이질감을 전해주었다.
그들을 천천히 살펴보던 주서령은 그들이 회화 군락지가 아닌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설마. 남운성주가 보낸 건가?”
그리고는 께름칙한 생각에 즉시 아버지에게 전음부를 날리고는 영역을 선포해 방어 태세를 갖췄다.
혼사를 진행하려는 남운성주가 무력을 사용할 리는 없었지만, 세상사 예상대로만 흘러가는 게 아니었으니까.
만에 하나라도 자신을 납치하려 하는 거라면 단 하나도 살려줄 생각이 없었다.
외부로 알려지기론 500년 만에 소천경에 이른 천재라 소문났지만, 실상은 그보다 더한 것을 숨기고 있는 그녀였으니까.
자신을 겨우 소천경 초입의 수사라 여기고 덤벼든다면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보여줄 자신이 있었다.
잠시 후, 그녀가 만반의 준비를 갖춘 사이.
일단의 무리가 가까이 날아오더니 그녀의 앞에 내려섰다.
‘응?’
자신을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삼남이녀의 무리는 매우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었다.
‘저자는….’
하지만 준비했던 태세가 무심하게도 주서령은 일단의 무리 중 가장 앞에 서 있는 사내를 보자마자 심장이 철렁하는 기이한 느낌을 받아야 했다.
그건 평생토록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는데, 뭉글뭉글하면서도 아련한 것이 마치 잃어버린 자신의 무언가를 다시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순간, 무리를 대표하듯 가장 앞에 서 있던 사내.
반듯한 외모에 정순한 눈을 한 사내가 마치 오래 보아온 사람을 부르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드디어 만났습니다. 서령 아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