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교환회 (5)
이제부터 같이 자겠다고 떼쓰는 산들바람을 떼어놓은 준혁은 소화여도 진정시키고는 대화의 주제를 변경했다.
조호랑이 자꾸 힐끔거리는 게 신경 쓰였지만, 조잘대는 조말랑을 상대하는 것도 벅찼기에 모른 척 외면했다.
그리고는 시침에 대한 주제가 나오기 전, 조호랑이 꺼냈던 대화 주제로 돌아가 지난 수백 년간의 일을 덤덤히 풀어냈다.
“그래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흑마지에서 100년이 아닌, 겨우 몇 해 만에 탈출한 것으로 꾸민 준혁의 일대기는 조말랑을 구출하고 소화여를 치료하는 것으로 끝맺음 맺었다.
그 후엔 사람들도 익히 알고 있는 요마족의 침공과 전투였기에 굳이 입 아프게 늘어놓진 않았다.
사실 소문으로 퍼진 것들은 대부분 허무맹랑한 게 많아서 일일이 변명하기가 귀찮은 이유도 한몫했지만 말이다.
“그럼 앞으론 이곳에 머물 건가요? 예전엔 누굴 찾는다고 하지 않았었던가요? 그분은 찾으셨어요?”
준혁의 얘기가 끝나자 조호랑은 자신이 학고응을 소개해줬던 이유를 떠올리며 질문했다.
“그렇지 않아도 교환회만 끝나면 즉시 떠날 생각입니다.”
“어디로요?”
“최종 목적지는 남운대륙입니다. 그 후엔…. 아마 다시 흑석대륙으로 돌아갈 것 같지만.”
흑석대륙이라는 말에 조호랑의 얼굴에 기대감이 서렸다.
“그곳엔 왜요?”
곧바로 되묻는 그녀의 말에 준혁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시선을 멀리 두었다. 그러다 한참 후에야 나지막이 들릴 듯 말 듯 입을 열었다.
“친우를 찾아야 해서 말입니다.”
***
한바탕 소란이 일긴 했지만, 소우자의 방문으로 조호랑 남매는 준혁의 거처 인근의 건물을 배정받아 숙소를 꾸렸다.
두 사람은 교환회에 참석할 계획은 아니었지만, 앞으로 준혁과 함께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중괴를 의식한 준혁이 그들을 외부에 머물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 조호랑은 틈이 날 때마다 준혁을 방문했고, 그때마다 항상 소화여가 그의 곁을 지켰다.
시침 발언 후 유아 역시 준혁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는데, 그녀는 소화여가 구해다 주는 단약만으로도 행복해했기에 문제 될 건 없었다.
애초에 그녀가 시침 시비를 자처한 건 고위 수사에게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탐냈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렇게 평화롭고 한가한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가 성주 취임식이 성큼 다가오자, 소우자가 수많은 보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준혁을 찾아왔다.
“주군, 각지에서 보낸 선물입니다. 필요한 게 있….”
“그대가 알아서 하게.”
하지만 준혁에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물건들이라, 대부분은 소우자에게 일임했고, 몇 가지 물품들만 영수들에게 나눠주었다.
“하면 취임식에 참석은 하실 것인지….”
볼일을 마치고 돌아가려던 소우자가 조심스럽게 물어오자 준혁은 단번에 고갤 저었다.
“나나 어르신이 전면에 나서는 모습이 보기 좋진 않을 것이네. 성주가 누군가의 꼭두각시란 소문이 돌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알아서 진행하시게.”
“알겠습니다.”
“대신, 얕보는 이들이 없게 실력행사 정도는 해야겠지. 그건 알아서 할 테니 그만 돌아가 보게.”
잠시 후, 두말하지 않고 소우자가 돌아가자 준혁은 바로 중괴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상의를 하다가 만족한 얼굴로 돌아와 자리에 좌정한 채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취임식이 진행되는 동안, 마치 망부석이라도 되는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자릴 지켰다.
***
대화성 취임식 당일.
수많은 인파가 성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특히 취임식이 열리는 남쪽 광장 쪽은 그야말로 콩나물시루가 가득 찬 것처럼 바닥을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취임식이 진행되면 성주가 실력행사와 동시에 배움에 대한 설법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한마디라도 듣기 위해 모인 수사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는 것이었다.
때가 이르러 태양이 성을 수직으로 내리비치자 드디어 소우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우자는 목소릴 드높이는 이들의 환호를 받으며 천천히 단상으로 올랐고 위엄을 보이기 위해 기세를 발산했다.
“감축드리옵니다!!”
“대화성의 무궁한 영광을!!”
취임식이 진행되는 현장엔 택요를 비롯한 대화성 수사들이 한쪽에 모여 성주를 보필하고 있었고,
그와 반대편엔 묘립성 출신으로 보이는 복장이 통일된 이들이 가득 모여 소우자를 향해 환호하고 있었다.
한편, 환호하는 이들과 달리 못마땅한 듯한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많았는데, 그들이 내뿜는 기운만으로 주변의 대기가 무거워져 사람들이 접근하길 꺼렸다.
대표적인 무리로는 호란대륙의 4대 종문이라 알려진 자휴궁과 오검문, 그리고 태청문과 묘존청 수사들이었고.
수행원들을 잔뜩 이끌고 온 타 성의 성주들 역시 심사가 편한 건 아닌지 연신 투덜거리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그중, 푸른 수실이 달린 부채를 든 태청문의 부문주가 모두가 들으라는 듯 볼멘소리를 냈다.
“듣자 하니 소우자 뒤에 중력괴와 또 다른 진선급 선사가 있다던데? 어째 모습도 보이질 않습니다.”
“저도 소문 들었습니다. 중력괴도 중력괴지만, 요마족 선사들을 단숨에 처리한 그 실력자 말씀이시지요?”
“얼마가 콧대가 높은지, 우리 따위는 하찮은가 봅니다. 얼굴도 비치지 않는 걸 보면.”
태청문 부문주의 말에 주위가 웅성거렸다.
비록 진선급 인사들이 직접 불만을 얘기하진 않았지만, 그들의 불만을 대신 풀겠다는 듯, 휘하 수사들이 여기저기서 불만 가득한 소리를 내었다.
그때 단상에서 행사를 진행 중이던 소우자가 큰소릴 내며 손을 치켜들었다.
“오늘부로!!”
그 모습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사이.
쿠르르릉-
갑자기 성 전체가 잘게 진동하며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기세를 내풍기더니.
팟-팟-파앗-
성 곳곳에서 진선급 수사의 영역분신으로 보이는 분신이 나타나 하늘로 치솟기 시작했다.
그 수가 총 여덟이었는데, 넷은 각각 다른 기운을 품은 독특한 외형의 사신 분신이었고, 나머지 넷은 노인 모습을 한 중괴의 분신이었다.
“모습을 드러내려는 것인가?”
누군가의 외침이 4대 종문과 타 성주들 사이에서 퍼져나가는 사이.
마치 연꽃이 피듯, 성 위로 여덟 잎 빛 그림자를 만들어내며 하늘로 치솟던 여덟 분신이 갑작스레 공중 중앙에서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충돌했다.
콰아앙!-
그 충격이 얼마나 큰지, 원영기 이하의 수사들은 몸을 벌벌 떨어댔고, 하늘 같은 수사들을 구경하러 나온 범인들은 정신을 잃고 혼절하고 말았다.
“저, 저게!”
잠시 후, 폭발과 함께 거대한 기류를 만들어낸 분신들의 잔해가 어떤 힘에 이끌리듯 대화성 상공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는 번쩍하는 빛을 내비치며 모두의 시선을 앗아가는가 싶더니, 빛이 사라진 후엔 거대한 거인의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거, 거신이다!”
거인의 모습은 너무 거대해 감히 크기를 측정하기 힘들었는데, 중력괴의 중력을 다루는 힘 때문에 시야가 왜곡되었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거인은 한 손만 뻗어도 광장에 모인 인사들 전원을 압사시켜버릴 것 같은 위엄을 내뿜었다.
“설마…. 그 실력자의 정체가 거신의 후예란 말인가.”
“그럴 리 없습니다! 적마의 계약자라는 소문이 있던데! 거인족이라니요?!”
위엄을 내뿜던 거인은 잠시간 성내의 인물들을 내려보다가 태청문을 비롯한 4대 종문의 무리를 지긋이 관찰했다.
그러다 아무도 없는 공간을 향해 피식 웃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잠시 후, 고개를 치켜들던 거인이 마치 태양을 잡아채려는 듯 두 손을 뻗자 환하던 하늘이 어둑어둑 변해갔다.
화아악-
그렇게 점차 밤이 되어가는 건 아닌가 싶은 순간,
퍼엉-
거인은 한순간에 터져나가더니 다시 뜨겁고 밝은 태양 빛이 드러나며 모두의 마음에 작은 두려움을 만들어냈다.
그 순간, 소우자가 마치 명령을 내리듯 소리쳤다.
“오늘부로! 나 소우자가! 대화성의 성주위를 이어받는다!”
“와아아아아!!”
“와아아아아!!”
어둠이 사라지고 태양이 돌아온 대화성 상공.
신세계를 경험한 듯 경의에 찬 수많은 수사들의 환호가 대화성을 잠식했다.
***
성주 취임식이 끝난 지 닷새째 되는 날.
소우자의 길고 긴 설법이 끝나갈 무렵, 준혁은 인상을 찡그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쉽지 않구나.”
그리고 준혁의 말에 대답하듯, 대전의 문이 열리며 중괴가 들어왔다.
“어우우 이 망할. 한 번만 더 했다가는 영기 고갈로 사망하시겠구나.”
“고생하셨습니다.”
준혁은 어느새 다가온 중괴에게 깊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소우자의 든든한 뒷배 역할을 하기 위해 만들어낸 거인 환영.
실력자들이 즐비했기에, 실제 의지력을 지닌 환영을 만들어내야 했고, 준혁은 자신이 지닌 능력을 총동원해야만 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역할은 중괴의 중력을 다루는 힘이었기에, 준혁이 고생한 만큼 중괴는 더 힘들어하고 있었다.
만약 중괴의 힘이 없었다면 분신들의 어마어마한 영력을 뭉칠 수도 없었고, 거인 환영은 만들자마자 표표히 사라지고 말았으리라.
그나마 취임식이 진행될 무렵 중괴가 회복을 끝마쳤기에 할 수 있던 일이지, 아니면 애초에 시도조차 못 할 일이었다.
“그나저나 마지막의 그 힘은 무엇이냐? 정말 태양의 기운을 잡아끌기라도 한 것이냐?”
“아닙니다. 어르신의 힘은 시야를 왜곡하게 하더군요. 그걸 이용해 잠시 눈속임을 한 것입니다.”
거인의 등장 마지막에 광명이 찾아오듯 화려한 연출을 하기 위해 준혁은 거인족의 삼지행을 이용했다. 다만 굳이 오해를 살 필요가 없었기에 거짓으로 말을 돌렸다.
“그래? 흐음…. 아닌데….”
중괴가 의심스럽다는 듯 두 눈을 흘겼지만, 준혁은 시치미를 뚝 떼고는 다른 주제로 대화를 옮겼다.
그때, 인기척과 함께 유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아직 취임식의 행사를 잊지 못하는 건지 새삼스러운 눈으로 준혁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곧 교환회가 열린다고 하옵니다. 어쩌실지 성주께서 여쭤보라 했습니다.”
교환회란 말에 준혁과 중괴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나는 됐다. 가봐야 귀찮은 일만 잔뜩이지. 너는 영수댄가 뭔가 구해야 한다 하지 않았느냐?”
“그랬었지요. 헌데 저도 참석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중괴는 준혁의 의도를 알겠다는 듯 사악하게 미소 지었다.
지금 준혁이 교환회에 참석해 수많은 수사들 앞에 나선다면 말 그대로 동물원의 원숭이 꼴이 될 수 있었으니까.
준혁은 중괴의 시선에 어깨를 으쓱하며 유아에게 말했다.
“성주에게 알려라. 나는 참가하지 않을 테니, 일전에 말한 것들만 구해오라고.”
***
대화성 전송실.
넓은 전송실 가운데엔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원형 진법이 그려져 있었고, 그 위에는 준혁이 복잡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의 곁엔 중괴와 소화여, 그리고 조호랑 남매가 함께하고 있었는데, 산들바람을 비롯한 영수들은 하나도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이렇게 어처구니가 없긴 오랜만이군.”
“크큭, 이놈아, 뻔히 돌아올 고생길을 누가 가고 싶겠느냐? 크큭”
준혁은 옆에서 키득거리는 중괴를 흘겨보다가 소우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내가 없는 동안 아이들을 잘 부탁하네. 수행만 높지 아직 철들이 없으니 혼낼 땐 따끔하게 혼내고.”
“걱정 마시고 다녀오십시오. 화여 너는 주군을 살뜰히 살펴야 한다. 너에게 새 생명을 주셨다는 걸 잊지 말고.”
소화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하자, 소우자가 만족한 듯 뒤에 서 있는 수사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럼 전송진을 발동하라.”
“발동하겠습니다!”
우우웅-
신호에 수사들이 영력을 주입하자 전송실 가득 환한 빛이 가득 차며 전송진법 문양이 살아있는 것처럼 떠올랐다.
준혁은 떠오르는 문자들을 보며 다시 한번 곁에 없는 영수들을 떠올렸다.
교환회를 기다리며 대화성에 머물기가 몇 년인가?
그동안 영수들이 안전하게 수련을 할 수 있게 영수대를 구하려 한 것이었는데, 지금 준혁에겐 빈 영수대만이 쥐어진 상태였다.
남운대륙을 방문 후 다시 돌아올 거란 말에 산들바람이 성에 남아 놀길 원했고, 덩달아 청호도 함께하길 거부했다.
용천과 천무는 아무리 영보급 영수대 안이 편하다고 해도 성에서 수련하는 게 더 효율이 높았기에 대화성에 남길 원했다.
반대로 마휴는 배우고 익혀야 할 게 너무 많아서 당분간 소우자가 신경 쓰기로 했고 말이다.
“참나.”
파앗-
잠시 후 아무것도 남지 않은 전송진 위에 준혁의 볼멘소리만이 떠돌아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