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화. 교환회 (1)
검은색 나무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우뚝 솟아있는 숲속.
짙은 어둠이 드리워진 지하 깊은 곳에 무심한 얼굴의 여인이 의자 걸이를 톡톡 건드리며 앉아있었다.
여인의 주위는 별빛이 내려앉은 것처럼 반짝이면서도 희미했는데, 안개 같기도 하고 마기가 농축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야소수의 명원패가 꺼졌다고?”
여인의 앞, 보랏빛 피부를 지닌 우락부락한 덩치의 사내가 벌벌 떨며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그, 그렇습니다. 군주시여.”
“흐음…. 호란대륙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그렇습니다. 대, 대화성의 인족들로부터 후, 후계를 데려온다 하셨습니다.”
말을 더듬는 것이 거슬리는지 여인은 짧게 혀를 차더니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그 모습이 한없이 차가워 보이면서도 도도한 아름다움이 흘러나와, 보는 이로 하여금 이질적인 공포를 불러왔다.
“그래. 진혈을 가진 아이를 찾아온다 했었지. 흠…. 보루마(保樓魔)는 어딨지?”
“보 선사께선 대….”
“그에게 이르거라. 야소수가 내 본명기를 가져갔으니 회수해 오라고.”
“파, 파뢰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리고 가는 김에 대화성주를 비롯한 인족 놈들을 싸그리 정리하라고.”
“아, 알겠습니다!”
여인의 명에 덩치남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붙잡으며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덩치남이 사라지는 걸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던 여인은 살짝 고개를 들어 어딘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궁주와 곡주 자리까지 비었다라…. 한동안 시끄럽겠군.”
세상사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무심한 표정을 하던 여인의 눈빛이 순간 번뜩였다.
***
구름을 뚫고 치솟아 오른 바위산.
바위산 한쪽엔 칼로 깎은 듯 넓은 평지가 존재했고, 평지의 끝엔 바위산 밑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정자가 놓여있었다.
지금은 구름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곳에 앉은 남녀는 구름 따윈 상관없다는 듯 주변을 감상했다.
사내는 거울처럼 반짝이는 눈을 하고 있었고, 여인은 붉은 입술이 유난히 매혹적으로 보였다.
“마선경 수사.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요? 석두가 소멸했다고요?”
“그렇습니다.”
“영원불멸은 우리의 상징이에요. 그런데 그런 상징이 깨졌다? 그대의 능력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닐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그리고 소멸했다고 여겨지는 건 그뿐이 아닙니다. 예전부터 연락이 닿지 않은 인물들이 한둘이 아니니.”
시선을 산 아래로 두고 있던 여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돌렸다.
“연락이 닿지 않는다라, 상대가 원할 때 차단할 수도 있잖아요?”
“다릅니다. 존재감 자체가 사라졌으니까요.”
마선경은 여인에게 보란 듯 옷가지를 만지더니 앞섬을 풀어헤쳤다. 드러난 그의 상체에 원형으로 그려진 문신과, 문신에서 이어진 108개의 선이 보였다.
각각의 선의 끝엔 기이한 문자가 적혀 있었는데, 개중 몇은 글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해져 있었고, 마지막 글자는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보이십니까? 공천귀를 포함해 적마, 인지괴, 귀원패, 삼청조 등. 몇몇의 존재감이 거의 사라진 상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태어난 초팔의 경우 완전하게 지워져 버렸지요.”
“예전에 공천귀를 포함한 몇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습니다. 그때만 해도 보이지 않을 뿐 그들의 존재감이 완벽하게 느껴졌었지요. 하지만 이젠 아닙니다. 얼마 전부터 그들이 세상에서 지워진 듯 존재감 자체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마 괴조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흐음. 궁주께선 알고 있나요?”
“물론입니다.”
여인은 마선경의 말에 심각성을 느끼고 이맛살을 구겼다. 한참을 인상 쓰고 있던 여인은 한참 후에야 한숨을 내뱉었다.
“휴우…. 그댄 내가 석두에게 뭘 가져오라고 했는지 아나요?”
“들었습니다. 마선기록방(魔仙記錄房) 아닙니까?”
“그래요. 적마가 훔쳐 갔다고 알려진 그 물건이죠. 아니 마선이라고 해야 하나?”
“흠.”
“왜요? 그것을 마선이라 칭하는 것이 불편한가요?”
“자유 의지가 없으니 마선이라 부를 순 없습니다. 기(器)라 칭해야지요.”
마선경이 언짢은 표정을 내비치자, 여인이 차게 웃었다.
“그래요. 그 마선기. 그대의 능력과 비슷한 그 물건을 가져오라 보냈는데, 그대가 석두에게 다른 일을 시키는 바람에 차질이 생기고 말았어요. 그러니 이번엔 그대에게 부탁드리겠어요.”
“…….”
“다른 이들에게 부탁하든 직접 움직이든. 마선기록방을 찾아오세요. 공천귀로 의심되는 이도 다시 한번 찾아가 보고 말이에요. 기왕 움직인 것 석두를 소멸시킨 자도 찾아야겠죠?”
***
회복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공기마저 차갑게 얼어붙은 방 안.
준혁이 깊은숨을 내쉬자, 그의 등 뒤로 나타나 있던 마족 전영이 양손을 세차게 휘둘러 준혁을 연달아 두드렸다.
쾅! 쾅!
겉보기엔 마치 몸을 두 쪽 내려는 듯 내려치는 모습이었지만, 실상은 마족의 강체술법으로 몸을 단련하는 중.
마치 장인이 쇠를 단련하듯 회복과 동시에 몸을 담금질하고 있었다.
한동안 본체를 담금질하던 전영이 할 일을 마쳤다는 듯 홀연히 사라지자, 준혁이 천천히 눈을 뜨며 깊은숨을 내뱉었다.
“후우….”
그리고는 다시 눈을 감고 내면으로 침잠하다가 다시 두 눈을 번쩍 떴다.
샤아아-
그러자 두 눈에 비친 안광이 전면으로 폭사하며 여러 겹으로 만든 보호 진법을 단번에 깨트려 버렸고, 동시에 건물의 벽면이 박살 나며 터져나갔다.
콰르릉-
“이런.”
벽면이 터져나간 순간, 준혁이 재빨리 손을 휘두르자 무너지던 벽면이 테이프를 거꾸로 감듯 원상태로 돌아왔다.
준혁은 그 모습에 만족스러운 듯 씨익 웃음 지었다.
“쓸만하군.”
마족 원영을 흡수하기에 앞서, 혈단법의 누에고치를 조종해 그들의 공간대를 회수한 준혁은 그 안을 살펴보다 하나의 옥간을 발견했다.
그건 요마족 고위 선사들이 익히는 강체술법이었는데, 일반적인 강체술 공법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내면을 단련함으로써 영기를 바탕으로 외면까지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마기를 망치처럼 만들어 마치 대장장이가 무기를 만들 듯 신체를 단련하는 방법.
말 그대로 단련이 아니라 담금질이라 하는 게 옳은 수련법이었다.
“재미있을 것 같아 해보았더니, 이렇게 효과적일 줄이야.”
회복에만 전념하던 준혁은 독특한 방법에 관심이 갔고, 시험 삼아 가볍게 시도해보았는데 효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본격적으로 익힌다면 몸의 강도가 몇 단계나 상승할 게 틀림없을 정도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몸이 붕괴할까 두려워 영기주입을 멈출 일은 없겠지.’
수행과 신체의 불균형을 해결할 단초를 잡은 것 같아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잠시 후, 어느 정도 회복을 끝냈다고 여긴 준혁은 기감으로 중괴를 살폈다.
하지만 자신과 달리 크게 나아지지 못한 중괴를 보고는 쓴웃음을 짓다 기감을 다른 이들이게 돌렸다.
그리고는 어처구니가 없어 황당해하다가, 산들바람과 청호가 같이 수련하고 있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확히는 두 녀석이 놀고 있는 곳을 향해.
“야. 그게 아니라 이렇게! 이렇게 하는 거야? 잘 봐 따라 할 수 있, 어?”
누군가에게 큰소리치고 있던 산들바람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몸을 돌렸다가 준혁을 발견하고는 와락 안겨들었다.
“뭐 하는 것이냐?”
준혁은 그런 산들바람을 떼어놓고 그녀의 뒤를 눈짓하며 말했다.
산들바람 뒤에는 보랏빛 소년이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얘 내 부하야! 소 아저씨가 데려왔길래 내가 이것저것 가르치고 있었어!”
‘소우자가? 아! 진혈에 대해 알게 되어 나에게 보낸 것이구나.’
준혁이 회복에 전념하고 있으니 건물에서 대기하라 명했고, 그사이 산들바람의 마수가 뻗쳐온 것이었다.
“무얼 가르쳤느냐?”
“응? 저번에 배운 요리도 가르치고, 요즘엔 꼭두각시 인형 만드는 것도 배워서 그것도.”
“아직 공법도 익히지 못한 아이에게. 아!”
오늘도 산들바람이 산들바람 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던 준혁은 마족의 공간대에서 얻은 옥간 중 각성에 대한 것이 떠올라 소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참 동안 아이를 살피자 마족 소년이 두려움에 빠진 듯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짝-
직후, 산들바람이 준혁의 팔뚝을 세게 때리며 화를 냈다.
“왜 애를 무섭게 해! 개미처럼 약한 애야! 큰둥이 나빠!”
마족 소년이 준혁에게 두려움을 느낀 건 그 어떤 마기보다 순수한 암흑마기 때문이었지만, 산들바람이 보기엔 살기로 짓누르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 오해할 만했다.
준혁은 그녀의 마음 씀씀이에 가슴 한쪽이 따뜻해지면서도, 또 한편으론 버르장머리를 고쳐놓는 게 나중에 도움이 될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이 아이가 마음에 드느냐?”
“응? 응!”
“그럼 너희처럼 내 종속으로 둔다면 잘 보살펴줄 자신은 있고?”
“응? 응응!”
종속이란 말에 전혀 거부감 없이 고갤 끄덕이는 산들바람의 모습에 준혁은 피식 웃고는 마주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리고는 마족 아이와 함께 방을 나서기 직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각성만 마치고 올려보낼 테니.”
***
각성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옥간에 적힌 방법은 영수를 종속시키는 것과 비슷했는데, 시전자가 마기를 다룰 줄만 알면 됐기에 크게 어려울 건 없었다.
다만 준혁이 생각지도 못한 것이 있었는데, 아이의 순수한 마기가 각성을 마치고 나자 준혁의 암흑마기와 동조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마치 전영을 사용할 때처럼 자신의 마기로 마족 아이를 다룰 수 있었다.
‘이런 현상에 대한 건 없었는데.’
준혁은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걱정되어 여러 방면으로 연구해보다가 각성을 마친 후에도 아이의 마기가 여전히 순수함 그 자체인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이유가 자신이 평범한 마기를 사용한 것이 아닌, 그 무엇보다 순수하고 고밀도로 압축된 암흑마기를 사용해서임을 인지했다.
‘새로운 방식으로 도움이 될 수도 있겠구나.’
만약 마족 소년이 자신의 의지를 감당할 만큼 강인한 신체를 가지게 된다면, 생각지도 못한 한 수가 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이름이 있느냐?”
“없어요.”
아까완 달리 준혁의 물음에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마족 아이. 각성을 해야 진짜 구성원이 되기에 이름을 부여받지 못했다.
“그럼 앞으로 너를 마휴(魔休)라고 하겠다.”
“무슨 뜻인가요?”
“그저 내 곁에 있는 동안 편히 쉬듯이 지내라는 뜻이다.”
마휴는 준혁의 말이 마음에 드는지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원래는 너에게 고위 수사가 익히던 강체술법을 알려주려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당분간은 아무것도 익히지 말고 산들과 함께 놀고 있거라. 조만간 너에게 맞는 강체공법을 따로 만들어줄 테니.”
“네! 알겠어요.”
“혹시 산들이 이상한 걸 알려주려 해도 아무것도 익히지 말고.”
마족 고위 수사가 가지고 있던 몇 가지 수련 방법을 개선해 암흑마기를 다룰 수 있게 할 생각이었다.
거기에 강체술법을 포함시킨다면 마휴에게 어울릴법한 훌륭한 공법이 만들어질 것 같다고 여겼다.
잠시 후, 마휴를 산들바람에게 보낸 준혁은 곧장 마족 삼인방에게 얻은 공간팔찌를 꺼냈다.
팔찌 안 내용물 중 꼭 필요한 옥간들만 가볍게 살폈었기에, 이제는 완벽한 습득을 위해 재확인이 필요했으니까.
파칭-
그때 여러 물품과 함께 공간팔찌에서 딸려 나온 법기 하나가 사용자도 없는데 혼자서 움직이려 했다.
“이게 무슨?”
준혁은 하얀 기운을 퍼트리는 꼬챙이처럼 생긴 법기를 보며 암흑마기를 손에 두른 채 그것을 잡아챘다.
잡아채는 순간 단(丹) 안에 있던 식검이 파르르 떠는 걸 느끼며 그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게 어르신이 말한 파뢰구나.”
마선을 약화시킨다는 심천군주의 본명기.
그것이 준혁의 기운에 반응해 혼자서 발동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