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화. 성주 (2)
준혁은 소리 없이 눈물짓고 있는 소우자를 보며 그가 벌써 소화여를 만났다는 걸 알아차렸다.
“화여 소저를 만나고 오셨군요.”
“그렇습니다.”
평생의 숙원을 풀어서인지, 소우자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좋았다.
태식을 통해 준혁의 부름을 받았을 때만 해도, 그는 부름이 달갑지 않은 상태였다.
생사여탈권을 주긴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딸의 목숨을 연장하고픈 마음에서 행한 행동.
준혁이 맡길 일이 있다며 오라 가라 명령을 내리는 것에 마음이 편할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스스로 내뱉은 말이었기에 소우자는 제자에게 성을 맡기고 곧바로 전송진을 이용했다.
대화성 전송실에 도착한 그는 준혁의 명을 이행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오랜만에 딸을 만난다는 기쁨에 한달음에 소화여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는 목도한 현실에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준혁이 가진 월광지력이 딸의 생명을 연장해줄 거라는 믿음으로 하루하루 애타는 마음으로 지냈을지언정, 딸이 완치되리란 건 상상으로도 해본 적 없는 일.
환하게 웃음 지으며 자신의 품에 안기는 딸의 체온에 소우자는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것도 폭포수 같은 눈물을.
한참을 소리 내 울던 그는, 딸의 손길에 눈물을 멈출 수 있었고, 준혁이 어떤 일을 해주었는지 전해 듣게 되었다.
저주 같았던 딸의 몸속 태양지력을 치유 권능을 가진 성광지력으로 바꾸어 주었다니? 거기다 더해 수행까지 올려주었단 말.
믿을 수 없었지만 믿지 않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그 순간, 소우자는 결심했다.
딸에게 새 생명을 안겨준 그를.
자신뿐만 아니라 묘립성 수하들의 생사여탈권을 넘겨준 그를 이제 진심으로 주군으로 삼겠다고.
정확히는 이미 명원패를 가지고 목숨을 바친 지 오래였으니 주군이 아닌 주인으로 모시겠다는 다짐을.
“헌데, 주인이라니요. 듣기 힘든 말입니다. 그리고 일어나시지요. 저는 그런 예를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저를 포함한 생사여탈권을 받아 가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제 생명의 주인이 맞습니다.”
“허. 불편하게 자꾸 이러시깁니까?”
다 큰 어른이, 그것도 자신보다 수 배는 오래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소우자가 바닥에 바짝 붙어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에 준혁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더는 보기 민망했기에 손을 살짝 저어 대기를 조종했다.
하지만 움찔하던 소우자는 일어날 생각이 없는지, 몸을 더 단단하게 만들며 저항했다.
“딸아이와 떠나실 때는 그저 목숨을 저당 잡힌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고 싶으니 받아주십시오.”
드르륵-
그때 준혁이 머무는 곳의 문이 열리며 소화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다소곳이 걸어오더니 소우자 옆에 멈춰 서서 몸을 낮추고 고개를 숙였다.
“대인, 저 역시 대인께 평생 은혜를 갚기로 했으니, 저희 부녀의 마음을 받아주시길 바래요.”
“대가를 바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약속을 지키려고 했을 뿐.”
“조금 전 처음으로 아버지의 체온을 온전히 느껴볼 수 있었답니다. 차가우신 분인 줄 알았더니, 누구보다 따뜻했어요.”
뜬금없는 소화여의 말에 준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라고 왜 모르겠는가? 지금 이곳에서 소우자 부녀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게 본인이었다.
돌이켜보면 준혁은 동생을 치료한 것도 아니고, 치료할 수 있다는 솜털만큼 가벼운 희망이 생긴 것만으로도 여서령에게 충성을 맹세한 적이 있었으니까.
‘그래, 이들의 마음을 받는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지.’
결국 준혁은 두 사람의 충성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물론 달라지는 게 없진 않았다. 내 사람이 생긴다는 건 그만큼 짊어져야 할 무게가 늘어난다는 뜻.
소우자나 소화여가 아무리 고위 수사이며 제 한 몸 건사할 수 있는 강자라고는 해도, 보살펴야 할 사람이 생긴다는 건 행동에 제약을 줄 수밖에 없었으니까.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건가?’
외압에 휘둘리지 않을 정도로 강해져야겠다고 다짐했던 마음이 한층 더 두터워지는 순간이었다.
“알겠습니다. 소우자, 그럼 그대에게 주군으로서 첫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준혁의 입에서 허락이 떨어지자 부녀가 동시에 고개만 치켜들었다.
“앞으로 대화성의 성주가 되어 주셔야겠습니다.”
***
결정을 내린 준혁은 거리낌 없이 행동에 나섰다.
우선 대화성의 주요 인사인 택요를 비롯한 수사들을 불러 그들이 가지고 있던 제약을 전부 풀어주었다.
“앞으로 대화성은 여기 소우자 수사가 맡을 것이다. 묘립성의 성주였으니 다들 알고 있겠지? 그리고 나 역시 대화성에 적을 둘 터이니 앞으로도 외압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대화성에 온전하게 소속될 생각은 없지만, 든든한 뒷배가 되어 줄 생각이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충복이 된 소우자가 관리하는 성이니 결국 준혁의 산하에 들어오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전에 그대들에게 선택권을 주겠다. 당장 소 성주가 이곳을 관리한다고 하여도, 그를 도울 손이 부족한 건 사실. 그렇다고 묘립성을 비워두고 다른 이들을 불러올 수도 없다. 그래서 원한다면 그대들 전원 누리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게 할 것이다. 다만 그대들이 라후지와 도모하여 나를 해하려 했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 그대들에게 다른 마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전까진 금제를 가할 생각이다. 그러니 원하지 않는 자 떠나라.”
금제라고 해봐야 정혈을 심거나 삼지행의 기운을 일부 집어넣어 언제나 격발할 수 있게 만드는 것.
준혁의 단호한 목소리에 택요가 대표로 나서며 말문을 열었다.
“저희 역시 온전하게 예전과 같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한 가지만 여쭙고 싶습니다. 마음을 어떤 방식으로 보여야 하는 겁니까?”
“흐음….”
‘어떤 금제인지가 아니라, 충성을 증명할 방법이라….’
택요의 말이 의외라 생각한 준혁은 잠시 턱을 괴었다. 일반적으로 금제라는 것은 생명을 저당 잡히는 행동이기에, 그 강도에 따라 수사의 많은 것이 제약당할 수 있는 일.
그러니 어떤 방법을 사용할 건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택요를 비롯한 대화성 수사들의 태도를 보자니, 처음부터 그것을 염두에 둔 것인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사실 주어진 상황만 놓고 보자면 대화성에 혈족을 비롯한 모든 기반이 남아있는 수사들이 다른 짓을 꾸밀 가능성은 지극히 낮았다.
그들이 성을 관리할 소우자를 없앤다고 해도, 그 후엔 결국 다른 종문의 하부세력으로 전락할 테니 오히려 지금보다 더 나쁜 상황이 될 건 뻔한 일.
아무리 멍청해도 그런 판단을 할 리는 없었다.
다만 준혁이 걱정하는 건 한가지였다.
만에 하나라도 복수심에 사로잡힌 이가 있다면 얘긴 달라졌기에.
라후지에 대한 복수심을 가지고 있다면 모든 제반 사항은 무시한 채, 오로지 상대에게 큰 타격을 줄 것만을 고려할 테니까 말이다.
준혁이 질문에 답을 찾고 있을 때, 소우자의 전음이 전해졌다.
-주인이시여, 이 일은 저에게 맡겨주시겠습니까?
-그러도록 하십시오. 헌데 그 주인이라는 말 좀….
청호나 산들바람같이 귀여운 꼬맹이 같은 느낌의 영수가 하는 ‘주인’이라는 말과 중년 아저씨의 ‘주인’이라는 느낌은 상당히 달랐다.
-그럼 앞으로 주군이라 부르겠습니다. 그리고 편히 말씀해주십시오.
-그러지.
왠지 소우자의 목소리에 웃음이 느껴져 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눈매가 가늘어졌다.
준혁 옆에 조용히 시립해 있던 소우자가 대답을 원하는 택요의 앞으로 나섰다.
“주군께서 내게 모든 일을 일임하셨으니, 그에 대한 답은 내가 드리겠네.”
묘립성의 성주이자, 오랫동안 대천경 수사로 군림했던 소우자의 입에서 주군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택요를 비롯한 수사들이 깜짝 놀라 움찔거렸다.
“주, 주군?”
“뭘 그리 놀라는가? 그럼 주군의 명도 아닌데, 내 성을 팽개치고 한달음에 이곳을 맡겠다고 달려왔겠는가?”
“아!”
소우자의 말에 대다수 수사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준혁이 성주라는 이익을 거부한 행동이 이해가 갔던 것이다.
“아무튼 본론부터 말하겠네. 대화성에 남을 이들은 우선 전원 명원패를 내주면 되네.”
명원패는 혼백 일부를 저당 잡히는 것이기도 했지만, 생사 확인과 위치추적 등 여러 방면으로 활용되기에 대부분의 직속 관계에서 바치는 것이라 다들 아무렇지 않게 수긍했다.
“그리고 각 가문에서 가장 자질이 뛰어난 수사 두 명씩 선발하여 묘립성으로 보낼 것이네.”
“예?! 묘립성으로 말입니까?”
“주군께선 나를 걱정하여 그대들에게 금제를 가하려 하신 거지만, 나는 자네들이 그리 어리석은 이들이라 여기지 않네. 그러니 금제 대신 후계를 묘립성으로 보낼 것이야.”
소우자의 말에 택요가 물었다.
“말만 다르지 결국 후계를 인질로 잡아 저희의 행동을 제약하시겠단 뜻 아닙니까?”
준혁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자신도 모르게 살짝 택요의 말에 동조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인질이지. 하지만 다르네.”
“무엇이 다르단 말입니까?”
“내가 그대들의 후인들을 묘립성으로 보내려는 이유는 세 가지. 첫째는 굳이 말할 필요 없고, 두 번째는 그들이 묘립성의 동급 수사들과 인연을 맺고 임무를 수행하며 친우가 되길 바래서네. 그러면 지금보다 더 좋은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겠지. 더 다양한 것들을 교류하고,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을 테니. 서로 말이야.”
“아….”
“세 번째는 각 가문의 주요 인사가 뒤섞이며 생활하다 보면 저절로 화합이 이루어질 테니, 굳이 노력하지 않고도 두 성은 혈맹이나 다름없이 될 것이기 때문이네. 두 성의 가문들 사이에서 혼사가 생긴다면 더욱더 가속화되겠지.”
두 성의 주인이 같다고 해도 긴밀한 사이가 된다는 건 다른 말이었다. 전송진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고는 하나 그건 소수에 해당하는 일.
거리도 거리이거니와 각 성을 구성하고 있는 가문의 성향도 천지 차이였을 테니 오히려 반목하지 않으면 천만다행이었다.
“아! 맞습니다. 생각대로 될지는 모르지만, 그렇게만 된다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라후지가 이 성을 어찌 관리했는지 모르네. 하지만 우리 묘립성에선 가문보다 능력이 우선! 그러니 그대들의 후인들은 볼모가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네.”
‘묘립성이 괜히 주운대륙의 중심 성인 것이 아니었군.’
대화성이 호란대륙의 북동쪽에 치우쳐져 있다면, 묘립성은 주운대륙의 정중앙에 위치했다.
하지만 성의 위치와 상관없이 묘립성이 대륙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준혁은 왠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분명 인질로 후계를 보내야 함에도, 다들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하군.’
소우자의 긴 설명이 끝나자, 택요를 비롯한 수사들은 전부 표정이 밝아진 채 자리를 떠났다.
성대한 성주 취임식을 준비하겠다는 말만 남겨놓고.
그리고 그 시각으로 대륙 곳곳에 소우자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를 지지하는 두 명의 선사에 대해서도.
***
소우자는 성주 임무를 수행하기 전 자신의 생각을 간략하게 전했다.
처음엔 후인들이지만, 나중엔 주요 인사들까지 묘립성과 교체해, 대화성의 인물들이 뭉치지 못하게 하겠다고.
그도 준혁과 마찬가지로 문제를 일으킬 만한 인물이 나오진 않을 거라 판단했지만, 싹 자체를 잘라버리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보이는 금제를 가하진 않겠지만, 다들 알아차리지 못하게 명원패를 배제한 최소한의 억제책을 마련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업무를 보기 위해 자릴 떠났다.
“괜히 성주 자리에 앉아있는 게 아니긴 하군.”
준혁은 꼼꼼한 그의 처사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잠시 후 소화여마저 떠나고 혼자 남자, 준혁은 입구를 막고 주변에 보호진을 설치했다.
그리고는 다른 방에서 몸을 추스르고 있는 중괴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보진단을 꺼내 삼켰다.
준혁도 초연단은 아낄 생각이었기에, 우선은 회복에 전념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