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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309화 (309/408)

309화. 성주 (1)

준혁의 발언에 좌중은 압도당해 말을 잃었다.

누구 하나 용기 내 입을 열지 못했다.

수백의 인사가 모였는데도 침묵만이 맴돌자, 준혁은 혀를 차고는 먼저 입을 열려고 했다.

그때, 택요가 양손을 교차해 양어깨에 올리며 반 무릎 자세로 최상의 공경을 표했다.

탁-

침묵만이 가득했던 곳에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선사께서 저희를 용서해 주신다면, 앞으로 주군으로 모시고 따르고 싶습니다.”

택요의 말이 울려 퍼지자, 이어서 다른 수사들 역시 동시에 반 무릎 하며 몸을 숙였다.

마치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이.

탁탁탁-

만약 이 모습을 성내의 범인들이나 저급 수사들이 보았다면, 믿을 수 없다며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준혁은 그런 그들의 행동에 별 감흥이 없는지,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군이라…. 라후지가 죽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섬김을 옮기는가? 그것이 그대들이 내린 결과의 책임인가? 실망이군.”

준혁은 적잖이 실망한 듯 가볍게 혀를 찼다.

그리고는 관심 없다는 듯 손을 저었다.

“쯧, 되었다. 그런 부질없는 자리에 얽매일 생각은 없으니, 성주 자리를 나눠 가지든 말든 그대들 알아서 하라. 마음 같아선 이 자리의 누구도 살려주고 싶지 않지만. 오늘 흘린 피가 많으니 더 이상 징치는 없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대화성 수사들이 준혁을 섬기겠다고 한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함이었던 바.

그래서인지 준혁의 말에 곳곳에서 안도의 숨소리가 전해졌다.

곳곳에서 들리는 안도의 숨소리를 들으며 준혁은 코웃음을 치며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택요 수사.”

“예! 선사!”

“성을 개방하려면 정비가 필요할 듯하니, 알아서 해결하시게. 나는 거처로 돌아갈 테니.”

전쟁에 참여했던 수사들과 마족의 시신은 전부 수습했지만, 격전의 흔적은 그대로 남아, 온통 파헤쳐지고 부서진 파괴의 흔적은 여전했다.

범인들이 사용하던 도로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고, 곳곳에 술법과 진법의 영향으로 각종 기운이 남아있었다.

수도자들이야 상관없었지만, 범인들이 그런 기운을 실수로라도 접한다면 목숨이 위험할 수 있는 일.

준혁의 지시에 택요뿐 아니라 몇몇 수사들이 동시에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잠시 후, 준혁이 정말 관심 없다는 듯 중괴와 함께 성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택요가 잠시 인상을 찌푸리다 다른 이들에게 행동을 지시하기 시작했다.

몇몇은 여기저기 움푹 팬 땅을 다시 수복하기 위해 움직였고, 몇몇은 들판에 꽃과 나무를 만들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후지가 귀천했다는 소식은 단숨에 대륙 전역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최강자 반열에 든 진선의 죽음이기도 했지만, 하나의 성을 온전히 차지하고 있던 자의 죽음이었기에 수많은 종문들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

대화성 내에 마련된 준혁의 거처.

-택요 수사. 다들 불러주시지요.

거처로 돌아온 준혁은 곧장 택요에게 전음부를 날렸다.

이미 대화성에 도착하기 전, 청호가 가지고 있던 삼청조를 통해 안부를 전해 들었기에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었다.

오히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철없이 좋아하고 있던 청호와 산들바람 때문에 어처구니없기까지 했다.

둘을 떠올리던 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건강하게만 자라거라.’

자신보다 오래 산 산들바람과 봉인된 시간까지 포함한다면 엄밀히 말해 조상급인 청호였지만. 준혁에겐 철부지 애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래도 그들이 있었기에 일로정진하는 수사의 삶에서 가끔씩 웃음 지을 때가 생겼기에, 항상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성주 자리도 차버리고 무엇이 즐거워서 혼자 실실 쪼개느냐?”

준혁이 영수들을 생각하며 웃는 모습에 중괴가 핀잔을 주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 이것 받으십시오. 라후지의 공간대에서 찾은 것입니다.”

어느새 준혁의 손위엔 세 알의 초연단이 올려져 있었다.

“됐다. 물론 도움은 될 테지만 아깝게 낭비할 필욘 없지. 시간이 해결해 줄 테니, 그것들은 아껴두거라.”

“흠. 알겠습니다.”

두 번 권유하려던 준혁은 중괴의 말이 일리 있다고 여기고, 단약을 다시 자기병에 담았다.

“이제 네놈에 대해서도 널리 퍼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자연스레 삼대 세력도 관심을 가지겠지.”

“삼대 세력이라….”

선마궁, 법문, 그리고 천휴림.

“뿐만이겠느냐? 요마족의 진정한 힘이라는 심천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지.”

“그러고 보니 심천군주는 어떤 자이길래 그리 경계를 하신 겁니까?”

야소수와의 대화 중 그자에 대해 언급될 때마다 중괴가 꺼림직해 했었다.

“마선들을 약화시키는 영보인 파뢰. 파뢰를 사용하는 그는 가히 마선들에겐 사신이나 다름없다. 나 역시 천신라에겐 덤벼들 용기가 있었어도…. 심천군주에겐 그럴 생각조차 못 했지.”

“심천군주라….”

“특히 파뢰를 이용한 그놈의 봉인술은…. 정말 끔찍하지.”

‘봉인술? 설마?’

중괴의 말에 별빛이 흐르던 신비경의 전경이 준혁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가 식아를 비롯한 마선들을 봉인시킨 인물인 건가?’

오래전부터 준혁이 가지고 있던 물음.

마선들은 계약자가 죽고 나면 태초의 모습으로 떠돌다 적합한 수사를 만나 다시 수행의 길에 오른다.

선마궁이나 법문 같은 세력에 속한 마선들은 그것조차 없이, 죽은 후 즉각 계약을 맺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 마선들이 누군가에게 당한 후 봉인돼있는 모습에 이질감을 느꼈었다.

마치 누군가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던 듯 마련된 제단과 공동.

‘기회가 된다면 그를 만나보면 좋겠구나.’

“잠시만 기다려 보거라.”

심천군주를 떠올린 것인지 몸서리를 치던 중괴가 옥간 하나를 이마에 가져다 댄 뒤 준혁에게 건넸다.

준혁은 곧장 그것을 받아들여 안의 내용을 확인했다.

옥간 안엔 한 여인의 형상이 흐릿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흐릿한 모습만으로도 기품과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설마 이자가?”

“그래. 그녀가 심천군주 주령이다.”

“여인이었단 말입니까?”

“당연한 소릴 하는구나. 그녀가 파뢰를 사용하면 주위가 흐릿해지며 안개처럼 변한다. 그때가 되면 마치 성운지력에 감싸인 것처럼 마선들이 힘을 잃는다고 하니. 너도 혹여나 그녀를 만나게 되면 조심하거라. 또 마선이 아니라는 헛소리 말고.”

심천군주의 모습을 기억 속에 각인한 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함부로 했지만, 자신을 걱정하는 중괴의 마음을 여실히 느끼면서.

그때, 외부에서 기척이 들려오더니 산들바람과 청호, 그리고 용천과 천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뒤이어 소화여와 태식까지 큰일이 벌어졌었다는 걸 전혀 몰랐던 표정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다들 라후지의 배려로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고 준혁에게 그를 칭찬하기까지 했다.

“우리 얼마나 재밌었는 줄 알아? 범인들이 만드는 요리도 배웠다구!”

“저 역시 라 성주님의 배려로 비술이 기록된 서고를 마음껏 이용할 수 있었어요. 큰 도움이 되었답니다.”

“저에겐 자리 잡기까지 도움을 준다 하였습니다. 제 사제가 합류하면 이곳에서 문파를 세울 생각입니다. 이 모든 게 두 분 덕입니다. 감사합니다!”

특히 태식은 이미 대화성 사람이라도 된 듯 라 성주를 떠받들었다.

준혁은 자신이 겪은 일들을 수다스럽게 늘어놓는 이들에게 가볍게 동조해준 뒤, 라후지가 벌인 일은 간략하게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말을 잃고 당황해하는 이들에게 각자 수련을 하라며 다시 해산시켰다.

***

영수들이 건물에 배치된 각자의 수련 공간으로 이동하자, 중괴 역시 회복을 위해 모습을 감췄다.

준혁도 회복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였기에 바로 보호진을 설치하며 보진단이 든 자기병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보진단 한 알을 막 입에 집어넣으려던 순간.

-최 선사님, 잠시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건물 밖에서 택요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준혁은 그들의 방문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몇 번의 거절 의사에도 계속된 요청에 결국 건물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허락해 주었다.

잠시 후, 택요를 위시해 소천경 이상 수사들이 나타나 정중하게 자세를 낮추며 자리했다.

“뵐 수 있게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상대방의 예의 바른 모습에 준혁은 귀찮다는 기색을 지운 후 신색을 바로 했다.

“무슨 일인가?”

“좀 전에 말씀드린 일로 찾아뵙습니다.”

“좀 전이라면…. 혹 성주 자리를 말하는 겐가?”

“그렇습니다. 최 선사님께서 넓은 아량으로 성주 자리를 승낙해 주셨으면 합니다.”

단호하게 거절한 일에 대해 또다시 요청이 들어오자, 아까의 부탁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함만은 아님을 깨달은 준혁은 숙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잠시 후 준혁이 의문을 드러내자, 택요는 대륙의 정세에 관해 설명하며 그가 성주 자리에 앉아야 할 이유에 대해 몇 가지를 꼽아 말했다.

“그러니까, 성주 자리를 오래 비우면 다른 종문에서 손을 뻗어온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저희를 하부세력으로 두길 원하니 이번 기회를 놓칠 리 없습니다.”

“허면 그대가 하면 될 일 아닌가? 내 듣기로 주운대륙과 호란대륙의 성주들은 전부 대천경 수사라 하던데, 그대가 성주 자리에 앉으면 될 일을 왜 나에게 부탁하는 거지?”

준혁이 한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의문을 표하자 택요가 민망한 듯 헛기침을 두어 번 하다가 대답했다.

“크흠, 제가 아직 수행이 부족해서….”

택요는 대천경 수사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했지만, 위선경이라 하기엔 차고 넘쳤다.

기회만 된다면 언제든 완벽한 대천경 수사가 될 정도의 수행. 그러니 성주 자리에 부족하다고 말할 정돈 아니었다.

“내가 보기엔 충분해 보이는데 뭐가 부족하다는 거지?”

“그것이 대화성이 조금 특수한 환경에 처해있다 보니….”

택요의 설명을 요약하자면,

호란대륙의 나머지 성들은 모두 가까운 종문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데, 오직 대화성만이 완벽하게 독립된 세력이란 것이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라후지의 수행이 삼선에 이르렀기 때문이었고, 만에 하나 대천경 이하 수사가 성주가 된다면 가장 가까운 자휴궁에서 바로 손을 뻗어올 거라 했다.

거기다 중괴가 날려버린 영석 광맥을 제외하고도, 드물게 초극영석까지 나오는 광산 몇 곳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자휴궁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 손을 뻗칠 가능성까지 있었다.

‘자휴궁이라….’

중괴가 사고를 치고 도주한 까닭에 잠시간 만나볼 수 있었던 자휴궁주를 떠올린 준혁은 모든 설명을 듣고 난 후에도 거절 의사를 밝혔다.

“그래도 안 되는 일은 안 되는 일. 차라리 이렇게 하는 게 어떤가? 내가 성주에 적합한 이를 소개해 주겠네.”

“정말이십니까?”

“물론 그가 수락할지는 두고 봐야 할 테지만.”

“저희 대화성의 독립성을 지켜주실 분이면 누구든지 대환영입니다. 부탁드립니다. 선사!”

“걱정하지 말게 강단 있고, 나름 이름도 있는 인물이니.”

***

택요를 비롯한 대화성 인물들이 떠나가자 준혁은 태식을 불렀다.

그리고는 그에게 옥간 하나를 건네주고 택요에게 받은 성주 지위를 나타내는 옥패를 건넸다.

“묘립성으로 가서 그에게 전해주게.”

“예!”

한동안 계속 수련에만 매진해서인지 태식은 준혁의 심부름에 신이나 건물을 떠나갔다.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사실 준혁에게도 성주 자리라는 게 가볍게 거절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마선문을 청명에게 맡긴 후, 그로 인해 얻은 부가 효과를 체험한 적이 있었기에, 성주 자리는 크나큰 유혹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하지만 고민할 필요도 없이 거절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여서령을 만난 후에라도 어딘가에 바로 정착할 수는 없지.’

아마르곤의 생사를 확인하고 그를 구해야 함은 물론이고, 흑석대륙으로 돌아가 지구와의 통로도 만들어야 했다.

그 일들을 하는 데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 몰랐기에, 한자리에 계속 머물러야 하는 성주 자리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주어진 상황들에 대해 고민을 거듭하며 해야 할 일들을 수립하던 준혁은 며칠이 지난 후 묘립성에서 한달음에 달려와 준 이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자는 준혁을 보자마자 몸을 바닥에 가깝게 만들며 감격에 겨워 소리쳤다.

“주인이여! 이 은혜 평생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묘립성의 성주 소우자가 눈물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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