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화. 라후지의 욕심 (3)
두런두런 얘길 나누던 준혁이 갑자기 모습을 감추자, 라후지는 혼비백산하며 두 눈에 영력을 집중했다.
대인망혼진을 빠져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모습을 감춘다는 행위 자체가 불안감을 가져왔기에 반사적으로 행한 일이었다.
동시에 손짓으로 보호구를 가리키자, 마차가 내려선 직후 몸을 피했던 택요가 몸을 움직이며 외쳤다.
“두 번째 결계를 연다! 성주께서 후일 그대들의 노고를 치하해 주실 테니 모두 전력을 다하라!”
택요의 외침에 깃발에 영력을 주입하던 수사들이 전부 하늘로 날아오르더니 허공중에 깃발을 집어 던졌다.
직후 제각각 수결을 맺으며 영력을 주입하자, 검은 깃발들이 의지를 지닌 것처럼 휘리릭 떨어져 내려 보호구를 감싼 기둥에 나뭇가지처럼 꽂혀 들었다.
그 순간 검회색으로 변했던 보호구가 점점 빨갛게 변해갔고, 안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있던 중괴의 얼굴이 시시각각 고통에 일그러졌다.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다! 대인망혼진만 준비한 줄 알았더냐! 혈뢰만역진(血賴滿逆陳)도 이겨내 보거라!”
보호구 안을 뚫어지라 살피던 라후지는 시야 어디에도 준혁이 걸려들지 않자, 찝찝한 표정으로 자신을 다독이듯 소리쳤다.
혈뢰만역진.
피를 가진 생명체들 한정, 저항력을 한없이 떨어트리는 저주 진법 중 하나.
진에 노출된 자의 몸속 피를 역류시켜 신체를 망가트렸고, 동시에 엄청난 고통을 선사했다.
“으으윽, 라후지 네 이놈!”
다만 어떤 구속력도 없었기에 지금처럼 적을 완벽히 제압한 후에나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라후지는 중괴의 이 갈리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한번 보호구 안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숨어봐야 소용없다! 어서 모습을 드러내라!”
그때, 등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라후지의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여기 있습니다.”
“이익!”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돋은 라후지가 황급히 몸을 회전하며 오른손에 훼멸의 기운을 담아 무작정 휘둘렀다.
상대에게 적중시키겠다는 의도가 아닌, 몸을 빼내기 위해 틈을 만들겠다는 의도가 다분했다.
하지만 그의 오른손이 등 뒤의 준혁을 향해 움직이기 전, 찰나의 순간.
“정지하라.”
준혁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졌고,
우뚝-
라후지는 돌아서던 자세 그대로 마비라도 된 듯 잠시지간 멈춰 섰다.
직후, 버퍼링이 걸렸던 것처럼 멈춰 섰던 라후지가 다시 번개처럼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준혁은 이미 등 뒤가 아닌 옆으로 이동한 후였고,
푸욱-
감히 저항할 수 없을 것 같은 한기가 라후지의 옆구리를 파고들고 있었다.
“으윽, 이게 무슨.”
라후지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안색이 탈색되듯 하얗게 변해, 재빨리 땅을 박차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공격당한 옆구리부터 서리가 올라오며 몸통 절반이 얼어가고 있었지만, 그걸 신경 쓸 틈도 없었다.
그때 준혁의 입에서 또 한 번 명령이 떨어졌다.
“라후지, 멈춰라.”
그러자 준혁의 연속적인 공격을 피하고자 미칠 듯이 상공으로 솟아오르던 라후지가 갑작스레 비행을 멈추고 우뚝 멈춰 섰다.
특이한 건 비행을 하는 자세 그대로, 마치 갑자기 급속 냉동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직후,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 지나자 라후지의 몸이 다시 이동하는 방향으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 준혁은 적마도를 이용해 라후지의 등 뒤로 이동해 있었고, 붉은 장검을 휘두른 후였다.
스아악-
잠시 후, 몸의 통제권을 되찾고 상공으로 치솟은 라후지가 준혁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기감을 퍼트린 순간.
쩌억-
그의 어깨부터 시작해 얼어붙어 가던 옆구리까지가 조각난 얼음이 미끄러지듯이 괴이한 마찰음과 함께 어긋나 틀어졌다.
“으아아악!!”
라후지는 뒤늦게 찾아온 고통에 괴성과 함께 재빨리 한 손으로 수결을 짚은 후 자신의 잘려 나간 어깨 부위를 두드렸다.
그리고는 손을 흔들어 단약 하나를 지체 없이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거짓말이셨군요. 초연단은 없으시다더니.”
하지만 단약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기도 전,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몸서리치며 또 한 번 허공을 박찼다.
“어찌 이렇게 빠를 수가 있단 말이냐. 도대체 어떻게!”
현재 라후지는 자신의 몸이 순간순간 통제권을 벗어났다는 걸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것이 왕의 정수가 가진 절대명령.
종족 한정으로 왕의 위엄이 담긴 절대적인 명령체계가 발동하며 생겨난 현상이었다.
아주 먼 미래에, 준혁이 자격을 갖춘 후 용각족 한정으로 발현되었을 능력이 거인족의 근원과 반응하며 인족 한정으로 나타난 힘이었다.
다만 능력을 사용하는 준혁도 마냥 만족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수행이 높으니, 명령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군.’
원래라면 정상적으로 왕의 위엄이 발동된 순간부터 완벽한 통제에 들어갔어야 했지만, 라후지는 찰나에 불과한 순간에 강제적으로 내려진 통제를 깨부숴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본인이 의식하고 한 것이 아닌, 세상과 연결된 의지가 준혁의 의지를 넘어서고 있었기에 도출된 결과였다.
게다가 준혁의 몸 상태는 최악 중의 최악.
신체가 정신의 지배를 받듯이 정신도 결국 몸 상태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일.
준혁의 의지가 평소보다 약해져 있기에 라후지가 왕의 명령에 영향을 적게 받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도, 충분하다.’
그럼에도 마족의 대표로 나섰던 야소수에 비한다면, 라후지는 상대하기 쉬운 상대였다.
왕의 정수로 얻은 왕의 권한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지금 저에게 묻는 겁니까? 무슨 짓이라뇨? 무슨 짓은 수사께서 벌이시지 않았습니까?”
경악의 찬 라후지의 말에 준혁은 차갑게 비소를 흘린 후, 허공을 차며 빛살처럼 움직였다.
슈앙-
그러자 라후지 역시 눈 깜작할 사이에 수십 번의 방향을 전환하며 준혁을 피해 움직였다.
“도망치다 보면 결국 덜미가 잡히는 법이지요.”
준혁이 빛살처럼 움직인 자리, 허공엔 가소롭다는 목소리만이 혼자 떠다녔다.
***
공격에 맞서지 않고, 계속해서 피하기만 하던 라후지.
그는 바닥에 내려선 후, 단전을 관통한 채 멈춰선 준혁 분신의 양팔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원영은 등 뒤에서 무심한 눈으로 자신의 심장을 뚫어버린 준혁의 손에 잡혀 있었다.
라후지의 두 눈엔 절망과 함께 의문이 가득했다.
분명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상처를 입은 후였고, 거리를 뒀다고 여기면 근접한 상태였다.
마치 환영진에 갇힌 것처럼 자신의 행동이 왜곡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그는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방법을 사용한 것이냐? 이런 건 도무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진실을 알지 못한다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는 듯, 라후지의 두 눈엔 핏발이 가득했다.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진선에 오른 뒤 초강자 계열에 진입했음은 물론이고, 사고를 당하지 않는 한 영원불멸을 약속받은 상태였는데 이렇게 되었으니.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면, 당신에겐 알 자격도 없습니다.”
“이익!”
“하지만 원한다면 알려드리지요.”
어서 알려달라고 라후지가 두 눈을 부릅뜬 순간, 준혁의 머리 위로 흐릿한 왕관이 나타나며 위엄을 떨쳤다.
하지만 나타나기 무섭게 사라졌기에, 바로 눈앞에서 확인한 라후지를 제외하곤 아무도 왕관을 보지 못했다.
“서, 설마. 궈, 권좌를 얻은 것이라고?”
유일한 목격자인 라후지는 조금 전 단전이 관통당하고, 원영이 붙잡혔을 때보다 더 놀라고 있었다.
“그건 정말 말도 안 된다. 정말 말이 안 돼….”
두 눈엔 불신만이 가득했는데, 계속해서 ‘말도 안 된다’라는 말만 중얼거렸다.
그때, 라후지를 잡은 후 주변으로 뻗어나간 준혁의 영역분신으로 인해 대인망혼진에서 빠져나온 중괴가 전음을 보냈다.
-이번에도 마족 놈들처럼 처리할 것이냐?
중괴의 물음에 다른 방법이 없던 준혁이 긍정의 의사를 보냈다.
-달리 방도가 있겠습니까?
-내가 도와주겠다. 잠깐 영역 공간에 힘을 실어줄 테니 그놈을 처리하거라
‘처리라….’
중괴에 말에 생각에 빠진 준혁.
-굳이 그럴 필요 있겠습니까? 무리하실 필요 없습니다.
-무리하더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왜입니까?
중괴의 말에 짐작 가는 바가 있었지만, 준혁은 그의 솔직한 의견이 듣고 싶어 반문했다.
-우릴 도모하기 위해 움직인 저놈들 중, 몇이나 진심으로 움직였겠느냐? 전부 그놈의 명 때문에 어쩔 수 없었겠지.
-그렇겠지요.
-그래서 그렇다. 분명 어떤 식으로든 금제가 가해진 이들도 있을 테고 혹은 다른 이유로 눈치를 보는 이들도 있을 테지, 라후지 그놈이 눈앞에서 죽어야 비로소 저항을 멈출 것이다.
라후지가 준혁에게 당한 순간 이미 전세는 판가름 난 상황이었다.
대부분은 전투 의사가 없음을 표하고 성으로 물러난 상태였고, 몇몇 고위 수사만이 택요와 함께 준혁을 경계하고 있었다.
중괴의 의견은 택요를 비롯한 수사들의 저항뿐 아니라 추후에 있을 대화성 수사들의 행동에 제약을 풀어주자는 것.
중괴에게서 짐작한 바와 비슷한 말이 나오자 준혁은 곧바로 수긍했다.
그 역시 사냥에 참여했던 수사 전원을 죽일 생각은 없었으니, 빠르게 라후지만 처리하고 성내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으니까.
-어르신의 말대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이자의 머릿속을 들여다봐야겠습니다.
-혹시 대라멸진 때문이냐?
-예.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아무리 준혁이 진선급 강자를 손쉽게 처리했다고는 하나, 상위 수사의 의식을 엿보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
준혁의 부탁에 중괴가 고개를 끄덕이며, 어서 오라는 듯 손을 들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
진선에 오른 수사의 귀천을 알리겠다는 듯, 라후지의 원영은 눈부신 빛과 함께 대기 중에 흩어졌다.
노란빛은 생전 원영의 힘을 간직한 듯, 대기 중에 흩어지면서도 일정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자 빛 먼지가 되어 완벽하게 산화해 버렸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비겁한 라후지는 이제 없다! 또 누가 그를 대신해 나설 것인가!”
빛 먼지가 완벽히 사라진 후, 준혁이 영력을 담아 고함을 지르자, 성내에서 수백의 수사들이 분분히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택요를 비롯한 고위 수사들과 함께 성문 앞으로 늘어서더니 준혁의 명을 듣겠다는 듯 긴장한 얼굴로 대기했다.
‘생각과는 다르구나, 도망가는 자들이 많을 줄 알았는데.’
일반적으로 사냥이 실패하면 도망가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대화성 수사들은 초반에 도주한 인물들 몇을 제외하곤 아무도 도망을 선택하지 않았다.
심지어 준혁을 잡는 데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였던 택요까지.
-네놈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가족들 때문일 테다.
마치 준혁의 의문을 꿰뚫어 봤다는 듯 중괴의 전음이 전해졌다.
-가족 말입니까?
-라후지가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긴 했지만, 성주로서는 괜찮은 놈이었다. 수하들을 잘 챙긴 것으로는 유명했지. 성내 수사로 안착하면 수사뿐 아니라 그의 가족, 혈족들까지 전부 챙긴다고 알려져 있었으니까.
혼자서는 도망칠 수 있지만, 가족과 혈족들까지 챙겨서 도망갈 자신은 없었기에, 선처가 내려지길 바라며 준혁의 행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것.
중괴의 전음에 준혁은 혀를 차며 걸음을 옮겨 성문 쪽으로 움직였다.
‘아무리 좋은 수장이라도, 보물 앞에선 도적과 다를 게 없으니…. 쯧’
잠시 후, 성문 앞에 이르자, 모두가 뻣뻣하게 긴장한 채 준혁에게 집중했다.
그중 가장 긴장한 자는 당연히 모두를 대표해 서 있는 택요.
준혁은 좌중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택요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곤 무덤덤하게, 하지만 묵직하게 말했다.
“그대들이 행한 일의 결과는 스스로 책임져야겠지? 자 말해보게. 내가 어찌 행동하면 좋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