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화. 분홍새의 권능 (1)
중괴가 다루는 중력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완벽히 제압하기 까다로운 힘이었다.
대기를 조종하는 것을 넘어, 주변 지형지물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고, 심지어 상대하는 수사에게까지 압박과 반전을 걸어 행동에 제약을 주기까지 했다.
중력의 압축이 강해지면 공간을 으그러트리기도 했고, 비장의 술법을 날렸는데 갑자기 공격 진행 방향이 어긋나 버리기도 했다.
반대로, 피했다고 생각한 공격이 갑작스레 궤도를 바꿔 달려들기까지.
요트람과 야소수는 소문대로 중력괴가 예전과 달리 힘을 잃어버린 후라는 것을 다행이라 여겼다.
그리고 마침내.
“이제 끝입니다!”
힘을 잃은 듯 방비가 풀린 중괴 뒤로 나타난 요트람이 한쪽 팔을 들어 올리며 중괴의 등을 향해 내리쳤다.
그러자 그의 손짓에 따라, 허공에 수 미터에 이르는 검은 칼날이 생겨나 대기를 일그러뜨리며 송곳처럼 떨어져 내렸다.
쇄애액-
“제기랄. 복수도 못 했는데.”
중괴는 다가오는 칼날을 느꼈지만, 더는 대기가 의지에 반응하지 않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꾸역꾸역 이어오던 전투의지가 소멸해 버린 순간이었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동급 수사 셋을 상대로 악다구니를 펼친 것에 하늘이 감동이라도 한 것일까?
“엇?”
떨어져 내리는 검은 칼날과 중괴 사이의 대기가 흔들리더니 그곳에서 붉은 장검이 공간을 뚫고 나타났다.
쑤욱- 챙-
장검이 모습을 드러낸 직후, 분광소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검은 칼날을 향해 붉은 장검을 휘둘렀다.
스악-
그러자 최후통첩처럼 떨어져 내리던 공격이 대기 중에 흩어졌다.
“너, 너는!
갑작스러운 출현에 요트람이 놀라움과 당황을 표출하는 사이.
분광소는 공격을 해소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재차 장검을 휘둘렀다.
그 속도가 워낙 빨랐기에 의기양양 다 이긴 것처럼 무방비로 있던 요트람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완벽한 회피를 하지 못하고 내밀고 있던 한쪽 팔을 잃고 말았다.
툭-
“그저 맛보기로 능력을 가져가는 게 아니었구나.”
일련의 일들에 분광소의 정체를 간파한 중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한편으론 감탄한 듯 말을 내뱉었다.
반대로 팔이 잘린 후 재빨리 거리를 둔 요트람과 야소수는 경악에 가까운 말을 내뱉었다.
분광소는 현재 준혁의 인족 모습.
“도대체 네놈은 정체가 무엇이냐! 인족이냐 전마족이냐?! 설마 규선이라도 된단 말이냐!”
요라제를 순삭하고, 야소수의 화신체마저 말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처리해 버린 수사.
그들이 생각하기에 준혁은 절대 동급 수사가 아니었다.
아마, 준혁의 수행이 대천경이란 걸 알았다면 피를 토하며 심마에 빠져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분광소는 준혁의 의지를 이행하듯. 재빨리 거리를 두고 물러난 두 사람과 화신체를 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적마도를 하늘 높이 치켜들며 재차 공격에 돌입할 것 같은 암시를 내비쳤다.
“오만하다 생각하지 않습니까?! 셋을 상대로 이길 수 있다고 여기는 겁니까?”
그 모습에 야소수는 전면에 영역분신을 소환해 대비했고, 요트람은 손을 뻗으며 검은 칼날 수백 개와 검은 원형 판을 소환해 공격에 대비했다.
오직 요트람의 화신체만이 준혁이 공격을 시작한 순간 바로 움직이려는 듯 기운을 응축하기 시작했다.
그때, 또 한 번 이변이 벌어졌다.
준혁과 대치하고 있던 세 마족의 등 뒤의 공간이 갈라지더니, 전마족의 모습을 한 준혁이 모습을 드러냈고.
모습을 보임과 동시에 붉은 광망이 어려있는 손가락을 사선으로 그으며 입을 열었다.
“갈라져라!”
스가아악-
그 순간, 준혁의 손가락이 가리킨 전면이 사선으로 갈라지며 모든 걸 통째로 잘라버렸다.
지금껏 천혈의 존재가 들통날까 봐 다수 앞에서 절대 보이지 않던 능력.
중괴가 처한 상황을 빠르게 판단한 준혁은, 세 명의 진선급 수사를 상대하는 건 불가능이라 생각했고, 최소한 전투가 시작되기 전 하나는 처리해야 한다고 여겼다.
아무리 암흑마기로 질적인 우월함을 가져간다 해도, 양적 차이가 너무 심한 상황.
이미 직전 전투에서 영역분신과 천혈을 사용해 영기가 고갈되어가는 상황이었기에, 무조건 기습의 묘미를 살려 적들을 혼란으로 치닫게 한 후, 한 명은 반드시 무력화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피해!”
공간이 사선으로 갈라지는 사이.
야소수는 본능적으로 허공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가 자신 있어 하는 것이 속도였기에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하지만, 천혈의 힘은 발동과 동시에 준혁의 의지가 허락하는 범위를 잘라버리는 권능.
야소수가 인지하고 움직였을 땐 이미 공간이 잘리고 있는 도중이었다.
그랬기에 그의 빠른 판단에도 불구하고 허공으로 치솟았을 땐 이미 다리가 잘려 나가 있었다.
“으윽, 이런 힘이라니.”
반대로 요트람은 오랜 전투로 힘을 많이 낭비해서인지 애초에 반응도 하지 못했다.
움찔하며 뒤에서 갑자기 날아든 기운을 파악한 순간, 갈라지는 공간 안에 포함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요트람은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
그가 움직이지 못하는 사이, 당장이라도 튀어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던 화신체가 반응했기 때문이었다.
촤악-
화신체는 몸을 살짝 움직이며 요트람을 막아섬과 동시에 일정 공간의 충격을 자신이 떠안았고, 그 결과 몸통이 갈라지고 말았다.
“!!”
설명은 길었지만, 이 모든 과정은 찰나에 불과해, 기력이 다한 중괴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도 하질 못할 정도였다.
직후, 야소수가 다리가 잘린 채 상공으로 치솟고, 요트람이 당황으로 미동도 하지 못한 사이.
준혁은 등 뒤에 펼쳐져 있던 날개를 펄럭 움직여, 손가락을 앞으로 뻗고 있던 그 모습 그대로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파앗-
그리고는 사라짐과 거의 동시에 가슴이 갈라진 요트람의 화신체 앞에 모습을 드러낸 준혁이 손을 뻗었고, 손에서 뻗어 나온 태양지력이 화신체의 살점을 통째로 녹여버렸다.
푸욱-
화신체는 태양지력의 열기에 살점이 타들어 가자, 곧장 양손을 휘둘러 준혁의 머리를 터트려 버리려고 했다.
부앙-
하지만. 공격이 유효타를 얻기도 전.
화신체에 대해 파악하고 있던 준혁은 즉시 마정 수정체를 손에 쥐었고,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녹여버렸다.
화르륵-
결국, 양 주먹에 훼멸의 기운을 잔뜩 얹어 준혁의 머리통을 날려버리기 위해 움직이던 화신체는 영력이 흩어지더니 멈추어 섰다.
“커억, 괴, 괴물…. 우웩.”
동시에 요트람은 몸이 무너지듯 비틀거리며 검은 피를 한 바가지 쏟아냈다.
***
‘생각보다 나쁘다.’
기습에 성공한 준혁은 가슴이 통째로 녹아버린 채 바닥에 쓰러진 화신체를 보며 현 상황을 계산했다.
한 번의 기습으로 진선급 화신체를 무력화시키고, 그의 본체인 요트람까지 충격에 빠져 영력이 위태롭게 요동치는 걸 보면 분명 효과적인 판단이었던 건 맞았다.
거기다 상공으로 치솟아 도망간 야소수마저 잃어버린 다리를 회복시키려 엄청난 영기를 움직이고 있는 걸 보면, 일타쌍피를 넘어 일거삼득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건 상대방의 처지.
준혁 역시 사태를 관망하기엔 몸 상태가 최악으로 치닫는 중이었다.
천혈의 공간 가르기는 상대에 따라 위력을 조절해야 했기에, 세 명의 진선급 강자를 상대로 엄청난 힘을 소비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약하면 상대가 공간의 찢어짐을 이겨낼 수 있었기에, 가벼운 손짓에 불과했지만, 전력을 쏟아부은 것과 다름없었다.
그랬기에 급속도로 소비된 기운으로 준혁은 영력 고갈에 거의 근접해있었고, 만에 하나 그것이 상대방에게 간파당한다면 상황은 순식간에 반전될 수밖에 없었다.
‘우선 저자가 다리를 회복하는 사이에 이자를 무력화시켜야 한다. 최소한 영역을 사용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해.’
두 명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도 벅찬 상황이지만, 두 명이 만들어낼 영역분신이 우선적인 문제.
준혁도 영역분신을 여덟까지 늘리며 대응할 순 있었지만, 아마도 그렇게 이행한다면 그렇게 행동함과 동시에 스스로 무너져 버릴지도 몰랐다.
‘먼저 행동을 억제시키고!’
준혁은 생각을 굳힘과 동시에 양손에 월광지력과 태양지력을 각각 뭉치며 바로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준혁의 한 수가 너무 강렬했기 때문이었을까?
파앗-
멀찌감치 떨어진 상공에서 몸을 회복하던 야소수는 한참 동안 준혁을 노려보다가 구름을 가르며 사라져버렸다.
“야 선사!!”
그 모습에 요트람의 안색이 급격하게 일그러지더니, 화신체를 수습할 생각도 못 한 채, 준혁의 기세에 저항하기는커녕 재빠르게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둘이 선택한 것은 도망이었다.
슈앙-
다만 야소수와 달리 요트람의 선택은 최선이 아닌 최악이었다.
준혁은 야소수가 움직인 순간, 그를 따라잡을 자신이 없었기에 요트람에게 집중했고. 그가 움직이자마자 동시에 몸을 움직였다.
슈악-
그리고는 찰나지간에 따라붙으며 압박을 가했다.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아직 할 얘기가 남은 듯한데?”
“이익! 사, 살려 주시오! 나를 살려주신다면 요마궁의 보물을 전부 드리리다!”
도망치자마자 준혁에게 바로 따라잡히자 요트람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이미 겁을 먹은 것인지, 그는 준혁의 상태를 파악할 생각도 못 하고, 자신이 무조건 패배할 거라는 확신과 함께 목숨을 구걸했다.
‘다행인가?’
만약 기습이 끝난 직후 야소수와 요트람이 합공을 했다면 준혁 역시 난처한 상황에 빠졌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한 놈은 먼저 도망가고 나머지는 완벽하게 전투의지를 잃어버린 상황.
기습이 생각보다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자 절로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정말입니까? 마침 필요한 게 있었는데 잘됐습니다.”
“원하는 건 뭐든지 줄 테니 저를 놓아주십시오!”
대화성 방향으로 신속하게 움직이는 요트람의 곁으로 바짝 따라붙은 준혁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주변 기온이 급하강하며 요트람의 몸에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이익! 서, 선사! 다,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겁니다!!”
요트람은 준혁이 필요하다고 했던 게 무엇인지 깨달은 듯, 몸에 서리가 끼자 즉각 이동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양손을 지휘하듯 휘저어, 수백 개가 넘는 검은 칼날을 만들어냈다.
그리고는 각오를 다진 듯 악독한 얼굴로 손을 휘둘렀다. 마치 마지막 지휘를 하는 사람처럼.
하지만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검은 칼날이 준혁에게 닿기도 전.
쓰윽-
아무것도 없던 요트람의 머리 위로 붉은 장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한쪽은 지독한 한기가, 반대쪽에선 몸을 녹여버릴 것 같은 열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
챠르륵-
금빛 실에 누에고치처럼 갇힌 요트람을 뒤로한 채, 준혁은 힘겹게 서 있는 중괴 곁으로 다가갔다.
“애송…. 아니 이제 그렇게 부를 수가 없겠네. 한 가지만 물어보자.”
“말씀하십시오.”
중괴는 준혁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요트람과 비슷한 감정을 내비치고 있었다.
마치 괴물이라도 본 것처럼.
“정말, 정말 대천경에 이른 것이냐? 나를 속인 것 아니고? 애초에 말이 되지 않았다. 분신을 넷이나 운용할 때부터 믿지 말았어야 했는데.”
진실을 말해달라는 듯 미묘하게 흔들리는 중괴의 눈빛.
준혁은 천천히, 그리고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거짓을 말해 무얼 하겠습니까? 지난번 천기를 불러 모았을 때, 대천경에 이른 것이 맞습니다.”
“정말이란 말이냐? 정말 대천경 수사가 동급도 아닌 상급 수사들을 이리도 압도할 수 있다고?”
“압도라니요? 아닙니다. 예상치 못한 순간 기습을 가한 것이고, 상성이 좋았을 뿐입니다. 만약 아까 그자가 도망치지 않고 곧바로 대응했다면, 저는 어르신만 구한 뒤 적마의 능력으로 어떻게든 도망칠 작정이었으니까요.”
준혁에게서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일까?
중괴는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더는 입을 열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야소수가 말한 천혈의 힘부터 시작해, 넷이 아닌 다섯 분신을 사용했다는 말.
거기다 마선들의 능력을 일부 차용하는 것이 아닌, 완벽하게 소환해 사용하는 것까지.
혹시 친우인 적지주도 그런 식으로 불러낼 수 있냐고 당장 캐묻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나저나 야소수 그놈은 어찌할 것이냐? 그자가 합류한다면 대화성은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도망간다면….”
이미 대화성주 라후지가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엿들은 상황, 그런 상황에서 준혁과 중괴 모두 빠진 대화성은 겁화에 휘말릴 게 분명했다.
반대로 그자가 도망간다면, 준혁에 대한 소문이 일파만파 퍼져나갈 게 분명하니 그건 더욱더 큰일.
진마정을 구하고자 마족들이 몰려드는 건 차치하고 천혈이란 이름은 수많은 세력을 자극할 게 분명했다.
중괴가 걱정이 가득하여 말을 꺼내자, 준혁이 손바닥 위로 분홍새 한 마리를 소환했다.
“서, 설마!”
놀라는 중괴를 보며 준혁이 씨익 웃었다.
“예, 생각하신 게 맞습니다. 삼청조의 능력을 사용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