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요마족 (5)
지면 곳곳이 천겁이라도 지나간 듯, 여기저기 파헤쳐지고 뒤집힌 땅.
그곳엔 두 명의 사내가 서로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고, 손의 움직임에 따라 대기가 요동치며 충격파를 터트리고 있었다.
요트람과 중괴.
현 요마궁의 궁주이자 살선이라 불리는 요트람과 한때는 마선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였던 중괴의 대결.
두 사람의 격돌은 지상의 모습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과연 이곳이 불과 얼마 전과 동일한 곳일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지형 자체가 판이하게 변해버렸다.
“소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제법입니다. 아니, 파뢰를 사용했는데도 이 정도라니, 소문을 인정할 만합니다.”
뻗은 손을 회수하며 땅에 씨앗 뿌리듯 재차 손짓하는 요트람.
그의 말에 인상이 구겨질 대로 구겨진 중괴가 아직 팔팔하다는 듯 사방으로 영기파동을 퍼트리며 발을 들어 올리다 세차게 내리찍었다.
콰앙!
중괴의 행동에 주변 수십 미터의 대지가 터져나가더니 파괴의 부산물들이 허공으로 떠오르다가 전광석화처럼 쏘아져 나갔다.
“소문?! 예전에 만났다면 네놈 따윈 일초지적도 되지 않았을 것이야!”
하지만 날아가던 부산물들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미증유의 힘에 분쇄되듯 먼지처럼 변해 흩어져 버렸다.
먼저 보이지 않게 공격을 날려 보낸 요트람의 기운과 충돌한 것이었다.
“그렇습니까? 하긴, 저도 그 얘긴 들었습니다. 무모하게 선마궁주에게 덤벼들다 호되게 당했다는 얘기 말입니다.”
“.... 네놈은 싸움을 주둥이로 하느냐?”
“그러겠습니까? 다만 이제 끝낼 때가 된듯해서 말입니다?”
“흥! 기고만장하구나! 파뢰를 사용해도 겨우 이 정도인 것을! 네놈이 끝내고 싶다고 끝낼 수 있는 것이라 여겼더냐!”
중괴는 상대방의 호언장담에 코웃음으로 대답했다. 그리고는 즉각 영역이 닿는 모든 곳에 중력을 반전시켰다.
쿠오오옹-
순간,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늘로 치솟았고,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은 반대로 지상으로 빨려 내려갔다.
요트람은 혀를 차고는 양손을 연달아 휘둘렀다.
그러자 응축되고 있는 대기 사이로 검은 칼날 수천 개가 생성되며 중괴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오해가 있으신 거 같군요. 제가 끝내는 게 아닙니다.”
“뭣?!”
챠작- 파스륵-
또 한 번 중괴의 의지가 일으킨 반전의 힘이 요트람의 수천 개의 칼날로 인해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흩어져 버리는 사이.
상대의 말에 이상함을 느낀 중괴는 황급히 땅을 박차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파앗!
하지만 그의 행동은 늦은 감이 있었다.
“제가 한 손 거들지요!”
어느새 중괴의 머리 위, 잔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의기양양한 태도로 나타난 야소수가 양손을 내리치며 허공을 가격했다.
콰자작-
그 순간 대기가 박살 나며 허공중에 균열이 일어나는 착각과 함께 암녹색 광망이 번졌다. 빠르게 자리를 피하던 중괴의 머리 위가 터져나갔다.
“이 비겁한!”
중괴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야소수로 인해 위급한 상황에 빠지자, 요트람의 영역분신들과 싸우고 있던 분신들을 전부 재소환해 충격파를 막았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웠고, 너무 근접한 공격이라 쏟아지는 힘을 전부 무효화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쿠아앙- 쾅!!!
암녹색 광망과 어우러지며 지면으로 폭격하듯 떨어져 내렸고,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땅속 깊숙이 처박히고 말았다.
“요트람 궁주! 시간이 없으니 빨리 처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중괴의 모습에도 전혀 기쁘지 않은 얼굴의 야소수가 손을 재차 휘두르자, 그의 손짓에 따라 암녹색 덩어리들이 무차별적으로 중괴가 만들어낸 구덩이 안으로 쏟아졌다.
직후, 요트람까지 가세하며 힘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
“곧 해결하고 가려 했는데, 어찌 이곳까지 오신 겁니까? 성주를 처리하신 겁니까?”
만약 성주를 먼저 처리했다면 파뢰를 이용해 우위를 점하는 자신보다 요라제를 도우러 가는 게 맞았기에, 요트람이 의문을 제기했다.
“아니요. 성주는 상처를 입긴 했으나 아직입니다. 오히려 요라제가 그 수행을 알 수 없는 자로 인해 귀천하고 말았습니다.”
“예? 귀천이요? 이 짧은 시간에 말입니까?”
야소수는 반격도 하지 못하는 중괴를 향해 쉬지 않고 폭격을 부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그가 준혁과의 승부에 집중하지 않고, 요트람을 찾은 건 이유가 있었다.
화신체가 준혁을 붙자고, 나머지 수하들이 대화성 성주를 견제하는 사이. 파뢰를 이용해 우위를 점하고 있을 요트람을 도와 진선급 강자 한 명을 빠르게 처리하려던 것.
그것엔 두 가지 이득이 있었는데, 한 가지는 당연하게도 요라제를 잃은 손해를 만회하기 위한 것이었고, 나머지는 요트람을 본격적으로 전투에 끼어들게 함으로써 상황을 압도하려는 것이었다.
준혁의 외형 변화와 진마정의 출현, 그리고 대화성 폭격에 대한 얘길 마무리할 때쯤, 요트람에게서 원하는 반응이 나왔다.
“정말 부궁주와 비욘사라가 그리 말했단 말입니까?”
“물론입니다. 그러니 빨리 저 마선을 처리하고 그쪽에 합류하시라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설마 저에게 원하는 것이….”
요트람이 살짝 눈을 흘기자, 야소수는 당당하게 원하는 바를 말했다.
자신이 굳이 화신체로 평수만 유지해놓은 채 이곳을 찾은 이유를.
“수사의 화신체를 꺼내시지요. 아직 재충전이 완벽하지 않아 사용을 꺼리심은 알고 있습니다만.”
“그걸 아시는 분이.”
“만약 그자에게서 정말 진마정이 나온다면 정확히 반으로 나누어 갖도록 하지요. 그거면 위험을 감수할 만하지 않습니까?”
화신체의 약점 중 하나. 그건 본체가 일정 주기로 충전을 해줘야 한다는 것.
물론 그 주기가 수십 년이 넘었기에 눈에 띌 만한 약점은 아니었으나, 현재 요트람의 화신체는 충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잘못하면 영영 부서질 수도 있었다.
그랬기에 중괴를 상대함에 파뢰만을 이용했던 것이었다. 파뢰만으로 충분하다는 판단도 한몫하긴 했지만.
그리고 야소수의 노림수는 바로 그것이었다.
마선을 처리함으로써 상대방의 전력을 하나 제거하고, 요트람을 설득함으로써 이쪽 전력은 셋이 되어 복귀하는 것.
거기에 더해 불안전한 요트람의 화신체가 임무를 끝내고 산화하길 바라면서.
“흐음…. 하지만….”
“빠른 결정을 하시지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시간을 오래 끈다면 전투 중 성주가 완벽하게 회복할지도 모릅니다.”
만에 하나 성주가 회복 후 대천경 수사들을 압도해 버린다면?
그때부턴 화신체가 두 명의 진선급 강자를 상대해야 하는 일. 그건 절대 사양하고 싶은 야소수였다.
“커억!”
그때, 설득을 이어가며 중괴를 향해 공격을 퍼붓던 야소수가 큰 충격에 빠진 듯 몸을 휘청거렸다. 동시에 새까만 피를 한 바가지 뱉어냈다.
“우웩!”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 무슨?”
피를 쏟아낸 야소수는 요트람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고개를 들어 대화성 방향을 쳐다보았다.
“마, 말도 안 돼. 이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왜 그러십니까? 불안하게? 무슨 일입니까?”
어느덧 요트람도 중괴를 향해 퍼붓던 공격을 멈추고 야소수의 입만 쳐다보았다.
야소수는 공황이라도 온 듯 진정하지 못하다가, 눈을 감고 무언가를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한참 후 눈을 뜨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화신체가 파괴되었습니다.”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감히 누가?”
“그. 흑마지에서 나온 그놈. 그놈입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요? 이 짧은 시간에 어찌 동급 수사를 처리한단 말입니까? 그것도 요라제 선사에 이어 곧바로.”
화신체는 영역의 힘까지 가져다 쓸 수 있는 진정한 분신.
요마족은 다른 종족들, 세력들보다 화신체에 들이는 공이 절대적이었다.
그들의 성장과도 관련된 이유 때문이었는데, 그렇기에 화신체가 얼마나 강한지 더 잘 파악하고 있었다.
화신체가 파괴되기 직전 기억을 읽은 야소수는 잠시 후 손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그리고는 감탄인지 두려움일지 모르는 말을 내뱉었다.
“그자…. 영역분신이 다섯입니다….”
“그게 무슨? 그게 가당키나 한 말입니까?”
“믿기지 않으나 마지막 공격에…. 거기다가 그 붉은 광선….”
“붉은 광선?”
“그건 분명. 전설의 천혈족의 권능…. 선마궁주가 가진 힘과 비슷해 보였습니다.”
천혈족이라는 말에 요트람이 화들짝 놀랐다.
마족들이 치를 떠는 그 이름.
오래전 구지대륙에 나타난 천혈족의 후예를 대대적으로 공격한 후, 삼대 마족 중 전마족은 거의 세력을 잃고 유명무실해질 정도였으니까.
전투 민족이라는 명성답게 단일 종족으로 요마족과 진마족을 압도하던 그들이 소수 부족으로 전락해 버린 게 천혈족의 후예 한 명 때문이었다.
천혈족의 권능은 모두가 탐내지만, 한편으론 모두가 두려워하는 힘 중 하나였다.
“갑자기 천혈족이라니…. 멸족한 것 아니었습니까?”
“확실한 건 아닙니다. 저도 화신체의 기억을 읽은 것뿐이니. 이런!”
푸앙-
심각하게 대화를 이어가던 순간.
무방비로 두 사람의 공격에 노출되어 만신창이가 된 줄 알았던 중괴가 구덩이에서 탈출하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크하하! 내가 그놈을 만난 게 우연이 아니었구나!! 하늘이 점지한 것이었어!”
중괴는 미친 사람처럼 광소를 터트리며 두 사람을 피해 멀리 착지했다.
얼마나 심하게 당했는지, 착지와 동시에 곧바로 소환된 영역분신들의 존재감이 희미해져 있었다.
멋지게 길렀던 수염들도 걸레처럼 뒤엉켜, 노숙자보다 못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야소수는 즉각 요트람에게 눈짓을 보냈다.
야소수의 화신체가 당했다는 건, 이제 진선급 강자의 수가 2대3이 되었다는 말.
요트람이 화신체를 꺼낸다 해도 다시 원점인 3대3이었다.
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명의 실력을 감히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니, 3대3의 구도는 필패의 구성.
“빨리 저자를 처리해야 합니다. 아니면 오늘 우린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 할 겁니다.”
야소수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 요트람도 동의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슈욱-
그 순간, 요트람의 옆으로 그와 똑같이 생긴 화신체가 나타났다.
“속전속결입니다. 수를 아끼지 마십시오.”
“제 패를 다 꺼냈는데 그리 말씀하십니까? 야 선사께서나 최선을 다하십시오. 심천의 명성이 헛되지 않게.”
콰앙-
잠시 후, 중괴의 주변 대기가 압축되며 강렬한 기세를 퍼트리자, 야소수와 요트람, 그리고 요트람의 화신체는 전력을 끌어올리며 뇌전처럼 쏘아져 나갔다.
하지만 야소수가 상상도 못 한 한 가지.
준혁이 사신정으로 모든 기의 운용을 차단하고 있었기에, 야소수가 화신체의 죽음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모든 뒤처리가 끝난 그가 하늘을 가르는 중이었다는 것이었다.
다만 준혁도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게 있었으니, 자신은 야소수가 자리를 떠난 직후 순식간에 화신체를 처리했기에 두 사람의 이동 거리가 차이 나지 않을 거라 여겼지만, 야소수는 마족 특유의 이동진식을 이용해 엄청난 거리를 도약했다는 것이었다.
***
슈우아아앙- 쾅! 쾅!
연달아 터져나가는 음속폭음.
준혁은 그 어느 때보다 전력을 다하며 허공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만약 예상대로 정말 야소수가 요트람에게 간 것이라면, 중괴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게 분명했으니까.
“조금만 버티시면 됩니다, 어르신. 받은 게 있는데 이렇게 보내드릴 순 없지요.”
준혁은 날아가며 동시에 의지를 일정 거리 이상 퍼트려 기감을 확장했다.
그렇게 얼마나 이동했을까?
준혁의 기감에 흐릿해져 가는 중괴의 기운과 그를 압박하고 있는 세 명의 진선급 강자의 기운이 느껴졌다.
‘셋이라고??’
한 명은 당연히 요트람일 테고, 다른 이는 예상대로 홀연히 모습을 감춘 야소수.
그렇다면 나머지는?
준혁은 조금 전 처리한 화신체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단 말인가? 당연히 그 역시 화신체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을.’
요라제가 화신체를 사용하지 않아, 모든 요마족 수사들이 비술을 익힌 건 아니라고 지레짐작했었는데, 잘못된 판단이었음을 깨달았다.
“가라!”
그 순간, 준혁의 앞으로 분광소가 나타나더니 적마도와 함께 사라졌다.
동시에 준혁의 모습도 허공으로 스며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