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요마족 (2)
‘36방?’
준혁이 하계에서 얻은 건 4방을 점하는 수준의 진법. 진짜 대라멸진에 비한다면 태양 앞의 반딧불 같은 위력의 진이었다.
그런 수준의 진법으로도 몇 번이나 상위수사를 농락했으니, 진짜 대라멸진엔 당연히 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라멸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기도 전.
“계집들처럼 모여서 무얼 속닥이는 것이지?”
“저, 저 마족놈이 주둥이를.”
요마족 측 진선급 강자 중 한 명이 비아냥대는 사이, 대표로 보이는 인물이 앞으로 나서며 시선을 집중시켰다.
“어찌 알고 대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법이다. 하지만 진혈을, 그것도 내 후계를 건드린 일을 모른 척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법. 나는 대가를 받아야 하겠다.”
“어쩌란 말이냐! 여기서 건곤일척을 나눠보잔 말이냐?!”
“그것도 재미있겠지. 허나 내가 모셔 온 손님들이 바쁜 분이라서 말이지. 이렇게 하는 게 어떠냐? 그쪽도 진선급 강자가 세 명으로 보이는데 공교롭게도 이쪽도 마찬가지다. 다른 것들은 배제하고 강자 원칙으로 모든 걸 결정하기로 하는 게?”
“삼 대 삼으로 승부를 겨루자는 것이냐?”
“그래. 다른 방해 없이 오직 우리끼리만.”
라후지 입장에선 마족의 제안이 매우 반가웠다. 어떤 식으로든 전투가 시작된다면 자신의 기반인 대화성이 반파될 수밖에 없는 일.
그렇게 된다면 상대를 물리친다 해도 득보다 실이 많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건 마족 측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진선 한 명을 상대하는 사이 포위 말살을 하려던 계획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고, 진선급 수사가 셋이란 말은 대천경이나 그 아래 수사들 역시 더 많이 포진되어있을 가능성도 있다는 말이기에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온 해결책이 강자들끼리의 승부였다.
하지만 해결책이 마음에 들지 않은 지, 마족 삼인방 중 하나인 요트람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쉽지 않을 겁니다. 차라리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는 게 나을 수 있습니다. 대화성 성주라면 모를까, 저기 마선과 나머지 한 명이 어느 정도 수행을 보일지 장담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이곳이 우리의 땅이 아님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거라면 걱정 마시지요. 저에게 마선을 상대하는 데 유리한 영보가 있으니. 저기 저 마선을 상대할 자가 빠르게 그를 상대로 승리하면 됩니다. 그 후에 힘을 합친다면 나머지는 쉽지 않겠습니까?
-오호…. 설마, 심천 군주가 가진 그것 말입니까? 이거 재밌겠습니다.
시작부터 단체전으로 나간다면 수성을 하는 쪽이 유리할 수밖에 없는 일.
압도적 전력 차로 밀어버릴 계획이 무산된 이상. 상대의 가장 강한 전력을 무력화시키고 그다음 수순을 밟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무리를 이끄는 야소수의 장담에 요트람이 만족한 듯 고갤 끄덕였다.
그러다 재밌다는 듯 잔인하게 웃음 지었다.
-결국 전부 죽일 작정이시군요.
-당연한 것 아닙니까? 우리 요마족을 건드리면 어찌 되는지 만천하에 알려야지요. 그리고 계획대로 그림자를 사용할 테니 승부를 걱정하지 마셔도 됩니다. 멍청한 인족 놈들은 함정인 줄도 모르고 반길 테니.
***
“그럼 두 분 도와주시는 거로 알겠습니다.”
대라멸진에 대한 얘길 계속할 순 없었기에, 세 사람은 전투가 끝난 후 대화를 이어가기로 했다.
그리고는 의논 끝에 상대방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각자 맡을 자를 정한 후 조금씩 거리를 두었다.
어쨌든 대화성 성주가 모든 일의 책임이 있었기에, 상대측의 대표로 보이는 수사를 맡기로 했고, 중괴는 유난히 위험한 기운을 풍기는 수사를, 그리고 준혁은 나머지 수사에게 배정되었다.
준비가 끝나자 라후지가 상대측으로 고함을 질렀다.
“두말하기 없어야 할 테다! 패배한다면 승복하고 물러나라!”
“당연합니다. 우리 요마족은 명예를 목숨같이 여기는바. 승부의 결과는 겸허히 받아들일 겁니다.”
“명예 같은 소리 하네 마족놈 따위가.”
준혁 일행이 거리를 살짝씩 벌리자, 라후지의 명을 받은 수사들은 전부 성내로 몸을 감췄다.
반대편의 마족측도 세 명의 수사를 제외하곤 전부 선박에 올라 보호막 아래 숨어들었다.
그때 준혁의 귓가로 중괴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괜찮겠느냐?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걱정되시면 어르신께서 빨리 처리하시고 도와주시지요.
-쉰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자신 있나 보구나. 만약 이번에도 승리한다면 네놈의 수행이 어찌 됐든 동급수사로 여겨주마. 당연히 그래야 하기도 하고.
중괴는 준혁이 전혀 겁내지 않아 하는 것 같자, 불안감을 떨쳤는지 전방을 향해 기세를 쏟아냈다.
파앙-
그것을 신호로 라후지도 기세를 돋구었고,
-화여 소저, 혹시 모르니 제 영수들을 부탁드립니다.
-염려 마셔요. 제가 책임지고 돌보겠습니다.
준혁은 만에 하나 불상사를 대비해 소화여에게 전음을 날린 후, 기세를 퍼트렸다.
만약 누가 이 전음을 엿들었다면, 어린아이들을 보모에게 맡기듯 소천경 수사들을 부탁하는 모습에 어처구니없어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소천경에 올랐다고는 하나 전투 지식이 화신기 수준도 되질 못했기에 준혁은 그들이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직후, 라후지를 포함한 세 명의 수사들이 상공으로 치솟았고, 대화성 상공에 자리 잡은 라후지와 달리 준혁과 중괴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퍼져 움직였다.
“이곳은 적당하지 않으니 따라오거라!”
중괴의 목소리가 대기 중에 퍼지고.
콰앙-
잠시 후, 두 명의 수사가 시야에서 사라지며 거리를 두자, 그걸 본 마족 수사들은 사악한 웃음을 짓다가, 흩어지며 각자 맡기로 한 수사의 뒤를 쫓아 빛줄기를 남기며 사라졌다.
***
푸른 창공을 빛 꼬리를 남기며 날아가던 준혁은 적당히 멀어졌다고 여겨지자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자 따라오던 마족 수사 하나가 조금 거리를 둔 곳에 내려서며 입가를 비죽였다.
따라온 마족은 반들반들한 보랏빛 피부가 매우 불길하고 음흉해 보였는데, 치렁치렁 곱슬머리가 눈매를 어설프게 가려 더욱더 어둡게 보였다.
“도통 수행이 읽히지 않는데, 무슨 수를 쓴 겁니까?”
상대는 바로 전투에 돌입할 생각이 없는지 대화를 걸어왔다. 준혁은 상대를 가늠하며 의지를 퍼트렸다.
“수사의 공부가 부족해서 아니겠습니까?”
“하, 예의가 없으시군요.”
“서로 죽고 죽이려는 사이에 예가 필요하겠습니까?”
준혁의 말에 상대는 피식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래도 통성명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요마곡의 곡주, 요라제라고 합니다.”
“최가 준혁이라 합니다.”
“흐음…. 역시나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군요. 혹 어디 출신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산수입니다만?”
산수라는 말에 요라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벙찐 표정을 했다. 수행이 낮을 때나 산수로서 발전할 수 있는 것이지, 일정 경지를 넘어서면 모두 소속된 곳이 필요했다.
공법이나 수련에 대한 정보도 문제였지만, 수행을 올리기 위한 재료와 보조적인 도움도 필수였기 때문.
그러다 무슨 생각인지, 표정을 고쳐먹은 요라제가 비열하게 입가를 끌어올렸다.
“말하기 싫으면 그렇다고 하시면 될 일을. 더 이상 대화를 원하시지 않는 것 같으니. 그럼! 시작해 보겠습니다!”
“오시지요.”
대화가 멈춘 순간. 요라제의 몸 위로 진한 마기가 피어올랐다. 그걸 신호로 준혁이 한 손을 뻗으며 선제공격을 시작했다.
***
진선급 강자 석두를 처리했을 때와 달리, 준혁은 대천경 수행을 완벽히 다졌다.
게다가 석두를 흡수하면서 수행 자체가 진일보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유를 가질 순 없었다.
마선을 상대함에 월광지력을 믿었던 것처럼, 마족을 상대하는 것에 대한 수단도 마련되어 있었지만, 어쨌든 상대방은 한 단계 상위수사.
‘최대한 빠르게 끝낸다.’
자신이 가진 장점을 극대화하면서 신속하게 승부를 보는 게 준혁이 준비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전투가 제대로 진행되기도 전.
어느새 주변 일대를 완벽하게 뒤덮은 요라제의 영역을 준혁이 상쇄하지 못하자, 그가 비웃음을 날렸다.
“겨우 이 정도입니까?”
“성급하신 편인가 봅니다.”
‘역시, 수행 차이에서 오는 의지력의 한계가 명백하구나.’
준혁은 예상했던 일이기에 침착하게 수결을 맺었다. 그 순간 그의 곁으로 영역분신 넷이 나타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산들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나.’
사방으로 흩어진 영역 분신은 일정 거리로 물러나더니 각각 사신결을 운용했고, 그것이 준혁의 영역에 영향을 주며 요라제의 영역을 밀어냈다.
“오호. 이런 식으로 영역을 운용하다니.”
그 모습에 요라제가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칭찬 아닌 칭찬을 내뱉었다.
영역이란 의지력의 표출. 순수한 의지가 아닌 잡스러운 보조로 만들어진 것은 쉽게 부서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비웃음이 오래가지 못했다.
영역 분신을 이용해 상대와 대등한 균형을 이룬 준혁의 몸에서 진득한 마기가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마기? 이게 무슨.”
진득한 마기는 순식간에 전영으로 변하며 거대한 몸체를 드러냈다.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전영은 이마에 솟아난 뿔을 뽑아 들더니 양손으로 터트렸고, 터져 나간 뿔의 기운을 코로 힘차게 흡수했다.
잠시 후, 변화를 거듭하던 전영이 먼지처럼 아스러지며 준혁에게 스며들어 가자, 어느새 준혁은 이마에 뿔이 자라난 완벽한 마족의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전마족?”
그 모습이 전마족의 특성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기에, 요라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설마 인족들 틈에 숨어 살던 마족이었단 말이냐?!”
일반적으로 마기를 체화시키고 익히다 보면 점점 마족화 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대부분의 수사는 마기를 배척하고 멀리했다.
게다가 준혁은 어설픈 마기 운용이 아닌, 그 누구보다 순수한 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마치 순수혈통. 진혈을 가진 마족처럼.
그래서인지 요라제는 준혁의 모습에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궁금증을 풀어줄 의무 따윈 준혁에게 없는 일.
준혁은 대답 대신 용천무의 날개를 꺼내 들며 공간을 비집고 사라졌다.
“대답하기 싫다면 하게 만들어주마!”
그 모습에 요라제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
그러자 입술에서 흘러나온 피가 허공으로 떠오르며 그와 똑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그렇게 하나에서 넷으로 늘어난 요라제의 분신은 모습을 갖추는가 싶더니, 요라제를 중심으로 둘러싸며 허공에 주먹을 날렸다.
콰르릉!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가격했을 뿐인데, 대기가 흔들리며 충격파가 터져 나갔다.
하지만 기대했던 반응이 없었는지, 요라제가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디로 숨은 거지?”
그때, 요라제의 전면에서 팔이 튀어나왔다.
팔은 정확히 요라제의 단전과 심장을 노리고 있었다.
“뻔하군!”
요라제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하기는커녕 진한 비웃음과 함께 나타난 팔을 막아섰다.
허나, 기습이 아닌 접촉이 준혁의 목적.
붙잡힌 팔에서 강렬한 한기가 퍼지더니 요라제와 맞닿는 모든 부위를 순식간에 얼려버렸다.
쩌저정-
동시에, 요라제의 등 뒤의 공간이 갈라지며 진짜 준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앞서 월광지력으로 공격을 시도한 건 적마의 힘을 빌린 분광소.
“빨리 끝내지요.”
모습을 드러낸 준혁이 손을 움직이자, 그의 손짓에 따라 진득한 암흑마기가 피어올라 요라제의 심장을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