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압살(壓殺) (2)
“둥지를 튼다라? 혹 제가 성주님의 사람이 되길 원하시는 겁니까?”
준혁의 말에 라후지가 크게 손사래 치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큰일 날 소릴 하십니다. 동급 수사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겠습니까? 다만 최 선사께서 이제 막 선도에 올라 안정된 거처가 필요하실 테니 말씀드린 겁니다.”
성주 자리가 대단하긴 했지만, 거대한 대륙을 두고 봤을 땐 미치는 영향력이 그렇게 크다고 할 순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큰 세력을 형성한 종문 혹은 문파들과 비교해 상업지의 성격이 강했다.
당연히 무력적으로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호란대륙 사대 종문의 문주가 진선급이라고 하나 그들을 막후에서 보살피는 존재들을 생각하면, 성주라는 자리는 결국 거대 종문들을 뒷받침하는 하부 세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대다수 대천경에 불과한 성주들 입장에선 적당한 거래를 통해 그들의 팔다리가 되어줄, 딱 그 정도였다.
‘아직 세력에 속하지 않은 나를 포섭해 더 나아가기 위함인가?’
성주에 만족하지 않고, 거대 종문으로 발돋움하고 싶어 하는 라후지의 욕심이 보였다.
준혁은 잠시 숙고하는 듯 행동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안은 감사하나,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일이라고 하시면 남운대륙에 방문하는 일 그것 말이십니까?”
‘이자가….’
태식이 주절주절 준혁에 대해 떠들 사람은 아니었다.
‘아마 그가 눈치채지도 못하는 사이 의식을 들여다본 것이겠지.’
화신기에 불과한 태식이라면 진선경에 오른 라후지가 입김만 불어도 알고 있는 모든 걸 낱낱이 밝힐 수밖에 없었다.
“태식 수사에게 들으셨나 봅니다.”
“선사에 대해 궁금증이 일어 물어보니, 알려주더군요.”
웃는 낯으로 푸근한 인상을 유지하는 라후지. 준혁은 그의 눈을 꿰뚫듯 바라보다 말했다.
“맞습니다. 우선 남운대륙에 들려 오랜 인연을 정리하고, 거처를 정하는 건 그다음에 생각해야 할 듯합니다. 다만.”
“다만?”
“성주께서 이리 저를 환대해 주시는데 밥만 축내고 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럴 일이 있을까 싶지만, 훗날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한 손 거들어 드리고 싶습니다.”
“오! 정말이십니까?”
한 손 거든다는 말에 라후지가 반색하며 격한 반응을 보였다. 마치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제가 성주께 빈말을 하겠습니까?”
“하하, 호탕하십니다. 제가 이렇게 또 친우를 사귀게 된듯하니.”
짝짝-
두 번의 박수 소리로 좌중의 시선을 모은 라후지가 말을 이었다.
“준비한 것들을 가져오거라.”
명령이 떨어지자, 상자를 품에 안은 여인들이 차례대로 준혁 앞에 다가왔다.
‘전부 화신기 수사들이군.’
멀리서 볼 땐 의식하지 못했지만, 가까이 오니 하늘거리는 비단옷 안이 은은하게 비쳐 눈길을 빼앗았다.
게다가 움직이는 보폭이 특수한 진을 형성해 진동을 발산했는데, 수련이 약한 자들은 그 진동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동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피식-
너무 뻔한 라후지의 의도가 보여 속으로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하계에선 화신기라 하면 절대자라 불릴 수 있거늘…. 한낱 잠자리 시비로 다루다니.’
준혁은 그들의 처지가 안타까우면서도, 지구와 다른 선계의 권력 구조를 체감할 수 있었다.
지구에선 수행이 차이 난다고 해도 한 명의 사람으로서 대우해주었지만, 이곳은 완벽하게 수직적인 구조였다.
세력의 장이 명한다면 그것이 비인간적이라 해도 거부할 권리 따윈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긴. 지구라고 다를까. 겉으로 보이기만 그럴 뿐, 그곳도 하위 수사들을 함부로 다루긴 마찬가지였지.’
하지만 준혁이 착각하는 게 있었다.
자신 앞에 서 있는 여인들이 손님맞이 잠자리를 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것은 맞았다.
다만 일련의 상황들은 라후지의 명 때문이 아닌 스스로 원해서 자원한 것이었다.
그녀들은 진선경에 오른 선사가 밥 먹듯이 먹는 단약 한두 알만 얻어내도 수십 년의 수련 기간을 단축할 수가 있었기에 이런 일은 앞다투어 하려고 했다.
물론 아닌 자도 있었지만, 고위 수사의 마음에 들어 쉽게 수행을 올리려는 자가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특정 성별과 종족에 국한되지 않은 보편적인 사고방식 중 하나였다.
“그 아이들 모두 선사께 드리는 것이니 그만 보시고 상자부터 열어 보시지요.”
준혁이 말없이 생각에 빠져 있던 것을 은은히 비치는 여인들의 속살을 감상하고 있다고 여긴 라후지가 눈매를 길게 늘였다.
마치 준혁의 마음을 꿰뚫고 있다는 듯이.
그때 중괴의 전음도 들려왔다.
-아무튼 인족 놈들이란. 종족 번식을 못 해 안달이지.
-그런 거 아닙니다.
-명심해라. 받은 게 많은 만큼 토해내야 하는 것도 늘어난다는 것을.
라후지를 포함한 중괴까지 단단히 오해하는 듯한 모습에 준혁은 굳이 해명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상자를 향해 손을 움직였다.
선물을 준비한 이상 거부하는 것도 예가 아니었다.
“오! 이건!”
첫 번째 여인이 들고 있던 상자엔 백옥의 자기병이 빼곡히 들어있었다.
그중 하나를 집어 마개를 열자, 청량한 향기가 정신을 맑게 해주었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선사께 큰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수행을 다지기엔 그만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처음 보는 물건인데 무엇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보진단(保鎭丹)이라 합니다.”
‘이것이 보진단이구나.’
대천경 이상의 수행을 두게 되면 수행에 도움이 되는 단약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보진단은 대천경 이후에도 도움이 되는 건 물론이거니와 이름처럼 몸을 보호하고 수행을 진정시키는데 큰 효과가 있는 물건이었다.
그런 효능을 가졌음에도 라후지가 큰 도움이 되질 않을 거라 말한 것엔 이유가 있었다.
바로 선인이 되면 각종 단약의 약효가 크게 떨어져, 수행을 올리는 용도가 아닌 보조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크게 도움이 되겠구나!’
하지만 준혁은 대천경 수사. 수행이 올라 더는 화목단의 도움을 받을 수 없던 준혁에겐 그 어떤 보물보다도 가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소천경에 오른 영수들이 수행을 안정시키기만 한다면, 그들에게도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터였다.
“이런 것을 받아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준혁이 자기병을 원자리에 돌려놓은 후, 부담된다는 듯 거부 의사를 살짝 내비쳤다.
“어차피 저에겐 필요 없는 물건 아니겠습니까?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이를 만났는데 그깟 보진단쯤이야. 제가 다 무안합니다.”
결국 준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기병이 든 상자를 통째로 공간 팔찌에 담았다.
그 후 나머지 상자들도 연달아 확인했다.
***
두 번째 상자엔 영석이, 세 번째 상자엔 진귀한 약초가, 그리고 네 번째 상자엔 귀하다는 초극영석도 한 무더기 놓여있었다.
전왕문주가 초극영석 3개를 내놓으며 아깝다는 기색을 팍팍 내비친 걸 생각하면 대화성 성주의 씀씀이가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나에게 뭘 요구하려 이리 과분하게.’
겨우 통성명을 한 사이에 인맥을 다지기 위해서 사용한 거로 생각하기엔 선물의 가치나 양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그것도 부족하다 여겼는지, 성주는 더 필요한 게 없는지 준혁의 의사를 물었다.
“혹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서슴지 말고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새로운 벗을 위해 창고의 빗장을 열 준비가 되었습니다. 하하.”
정말 말만 꺼내면 어떤 것이라도 공수해 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도 안 될 일이었기에 준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살짝 웃음으로 답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러다 대화성으로 오기 전 일이 떠올라, 염치 불고하고 입을 열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해주시니, 민망하지만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오! 무엇입니까? 말씀해 보시지요.”
준혁이 정말 무언가를 원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지, 라후지가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혹, 소천경 이상 영수들이 머물 수 있는 영수대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적당한 대가를 치르겠습니다.”
“영수대 말입니까?”
라후지가 황당해하는 얼굴로 준혁을 응시했다. 잠시 후 준혁이 농담한 것이 아니란 걸 깨닫고는 난처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라 제가 당황을 한 것 같습니다. 헌데 최 선사께선 무슨 연유로 그런 물건이 필요하신 겁니까?”
“제 영수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안전하게 머물 곳이 필요해서 말입니다.”
난처해하던 라후지는 준혁의 대답에 그제야 이해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런 이유로!”
라후지가 당황한 이유는 일반적으로 화신기 이상의 수행을 가진 영수는 충분히 독립적인 자아가 강했기에 영수대 사용은 독이 되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준혁이 진선에 올랐다고 착각하고 있었기에 그런 그가 까마득하게 차이 나는 저급 영수들을 부릴 리 없었으니, 영수대가 필요하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준혁이 기대감을 가지고 바라보자, 라후지는 쓰게 웃으며 공허한 손짓만 했다.
“실망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소천경 수사를 버텨낼 영수대라면 공간 보물이어야 할 텐데, 그런 것은 쉬이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라후지는 준혁에게 잘 보일 기회를 잃은 것처럼 실망 가득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침울하게 변해가던 라후지가 갑작스레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정말이냐?”
“그렇습니다. 다음 교환회에 비슷한 물건이 나온다 알고 있습니다.”
전음이 오고 갔던 것인지, 성주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한쪽에 대기하고 있던 사내가 공손히 대답했다.
‘교환회?’
준혁은 교환회라는 말에 깊은 관심을 드러냈다.
경매와 다르게 교환회는 고위 수사들 사이에 자주 행해지는 것으로, 가치를 환산하기 힘든 물건을 필요한 물건으로 물물교환하는 모임이었다.
‘정기적인 교환회가 있나 보구나.’
하지만 교환회에 대한 정보가 언급되기도 전.
벌컥-
굳게 닫혀있던 연회장 정문이 급하게 열리며 수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문이 열리며 소천경 수사 하나가 빠르게 다가와 라후지 앞에 부복했다.
“성주님! 선마궁 선사께서 방문하셨습니다.”
훽-
선마궁이란 말에 중괴가 격하게 반응했고, 라후지는 의문 가득한 얼굴로 반문했다.
“선마궁의 누가? 왜 이곳을 찾아왔다 하더냐?”
“무리를 이끄시는 분은 석두라는 법명을 사용했고, 그분을 제외하고도 두 분이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을 찾은 연유가….”
성주의 말에 빠르게 답변하던 소천경 수사는 고개를 모로 들더니 준혁의 눈치를 살폈다.
“여기 계신 최 선사님을 뵈러 왔다고…. 정확히 이름을 언급한 건 아니나, 이런 자가 이곳에 있냐고 물으셨습니다.”
소천경 수사의 손에서 옥간 하나가 건네지자, 그걸 확인한 라후지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옥간을 준혁에게 건넸다.
“선사께서 혹 그들과 엮일 일이 있으십니까?”
선마궁이란 말이 나온 순간부터 라후지는 께름칙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잠시 후, 옥간을 확인한 준혁은 그곳에 그림처럼 그려진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어찌 된 일인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동안 마선경과 괴조를 피하고자 무영기를 두르고 있었지만, 수행이 오르는 동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비경이나 흑마지 때와 달리 완벽하게 드러난 공간이었기에 그 짧은 기간 자신의 행적이 완전히 드러나 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다만 그들이 이토록 짧은 시간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이 의아했는데, 마선경과 괴조의 능력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인근에 있다가 소식을 듣고 온 것인가?’
“최 선사?”
옥간을 확인한 준혁이 말없이 생각에 빠지자, 라후지가 대답을 재촉했다.
준혁은 그런 그를 향해 살짝 웃어 보인 후, 중괴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손님이 오신 듯한데, 뵈러 가는 게 예의 아니겠습니까? 성 밖에서 기다리는 걸 보면 나름 배려심이 넘치는 자들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