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압살(壓殺) (1)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소화여가 얼굴을 붉히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의 중요성에 대해 연거푸 강조하던 중괴는 다음으로 이런 일들이 어떻게 가능한지 물었다.
하지만 준혁은 삼지행의 비밀을 알려줄 생각이 없었기에 시치미를 뗐다.
“저도 정확한 연유를 모르겠습니다. 성광지력이 치료에 도움이 될까 사용해봤는데, 그것으로 인해 이런 효과에 이르게 된 것 같습니다.”
“성광지력은 갑자기 어디서 나고 말이냐?”
중괴의 의문에 준혁은 네모난 법기를 꺼내 건넸다.
오래전 산들바람의 언니인 바람꽃을 구하기 위해 마족의 거주지에 숨어 들어갔을 때 구한 것이었다. 전마족의 공격대원이 사용하던 성광지력을 담을 수 있는 법기였다.
중괴는 법기를 보고 깜짝 놀라더니 이리저리 살폈다.
“이건! 마족들이 사용하는 물건 아니더냐?”
“잘 알고 계신 물건입니까?”
“알다마다, 이 귀한 물건은 어디서 난 것이냐?”
“예전 천휴림의 제자 대막리에게 끌려 흑마지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하계의 마족이 아닌 선계의 마족에게서 얻어냈다고 꾸며내자, 중괴는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살아 돌아온 것이 용하다. 하지만 겨우 이것으로 화여 저 아이의 상태를 설명하긴 힘들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거인족의 비경에서 얻은 기운이 법기의 성광지력과 반응해 이상 현상을 불러온 것이 아닌가 의심할 뿐입니다.”
“기운?”
중괴가 빨리 보여주라는 듯 눈을 치켜뜨자, 준혁은 손바닥을 내밀어 은푸른 기운을 흘려보냈다.
“이건?!”
그것이 무엇인지 대번에 알아본 듯 중괴가 관심을 보이려는 찰나,
푸스스-
준혁의 손에서 미약하게 흘러나오던 삼지행이 허공중에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이건 그때 거신체가 사용하던 힘이 아니더냐?”
“어르신의 생각이 맞습니다. 그곳에서 수련을 계속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 몸속에 쌓인 기운입니다.”
“더 보여 보거라. 왜 중단한 것이야?”
“조금 이질적인 기운이라…. 아직 완벽히 다루기엔 미숙합니다.”
준혁이 난처하단 듯 어깨를 으쓱하자, 중괴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준혁을 한동안 응시했다.
하지만 준혁이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 이상 중괴가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
강제로 준혁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의심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흐음. 그래, 그건 그렇다 치자. 그럼 한 가지 더. 네놈의 수행이 어찌 되느냐? 아무리 수행을 감춘다 해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게 있거늘, 네놈은 마치 범인처럼 보인다.”
중괴의 추궁에 준혁은 쓰게 웃음 지으며 수행을 개방했다.
화아악-
대천경 수행이 드러나자 중괴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설마 했거늘…. 어찌 이럴 수가. 겨우 백오십 년 만에 소천경 수사가 대천경에 이르렀다 말하면 누구도 믿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놀람은 끝나지 않았다.
준혁이 소화여의 안정을 유도하기 위해 펼쳐두었던 무영기를 거둬들이자, 그녀의 수행도 함께 존재감을 나타냈다.
죽어가던 소화여가 완쾌한 것에만 집중하고 있던 중괴는 그녀가 위선경에 오른 걸 깨닫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
말없이 충격에 빠진 듯한 중괴에게 준혁이 말문을 열었다.
“제가 비경에 들어간 후 150년이나 흘렀단 말입니까?”
“그, 그래. 대략 그 정도 되었을 것이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구나.’
수백 수천 년의 수련 기간이 보기 드문 것은 아니었지만, 준혁은 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시간의 흐름에 예민했다.
여서령을 만나는 문제뿐 아니라, 최소한 하계로 통로를 열어 옛 인연들과의 약속을 이행해야 했고, 흑마지로 돌아가 아마르곤도 구해야 했다.
잠시 후, 충격에서 빠져나온 듯 중괴는 몇 가지 질문을 이어가다가, 준혁과 소화여에게 옥간 여러 개를 건넸다.
“수행이 오르며 자연히 깨닫게 될 테지만, 미리 알아두어서 나쁠 건 없을 터. 각 수행마다 인지하고 있어야 할 것들을 적었다. 그것들만 습득하고 나면 대화 성주의 초대에 응해도 될 것이다.”
준혁은 중괴의 배려에 감사함을 표하고는 즉시 옥간 속 내용을 파악했다.
‘역시 내가 특이한 현상을 겪는 것이구나.’
그 안엔 대천경 수사가 다루는 영역의 본질과 영역분신, 그리고 의지로 세상에 간섭하며 몸속에 오행을 쌓는 방법 등이 자세히 적혀있었다.
내용 대부분은 이미 스스로 깨닫고 있었고, 오행신기 같은 경우 이미 완성형을 가지도 있었기에 크게 도움이 되진 않았다.
다만 중괴가 전한 정보로 인해 자신의 상태가 남들과 얼마나 다른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또한 의지가 세상에 스스로 공명하면서 나타나던 현상이 진선에 오른 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임을 깨닫고, 자신이 어설프지만 진선경의 능력 일부를 사용할 수 있게 됐음을 깨달았다.
잠시 후, 생각할 게 있다며 중괴가 자리를 뜨자, 준혁 역시 소화여와 거리를 두고는 주변을 완벽하게 막아버렸다.
그리고는 영수들을 차례대로 불러내 그들이 익혀야 할 것들을 하나씩 알려주었다.
“우선 받아들인 기운에 적합한 사신결을 알려주마. 최우선으로 수행을 공고히 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보자마자 또 수련 얘기야?”
“알겠어요.”
“명 따르겠습니다.”
투덜대는 산들바람과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한 청호. 그리고 준혁의 말이라면 용암 속에라도 뛰어들 것처럼 두 눈을 빛내는 용천, 천무.
준혁은 그들이 흡수한 사신의 속성에 걸맞은 사신결을 전해주고, 사신 분신을 소환해 그들의 수행 안정을 돕도록 했다.
한편으론 그들이 가진 혈맥의 힘을 강화해주기 위해 천혈의 기운을 끌어올려 각각 영수들의 몸을 어루만지며 신체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나흘 후.
준혁은 영수 돌봄을 마치고 대화성으로 출발하기 위해 준비했다.
“싫어, 싫어! 같이 있을래!”
“조만간 편히 쉴 수 있는 영수대를 찾아줄 테니 조금만 참아.”
몸속으로 들어가길 거부하는 산들바람의 요구에 준혁은 결국 영수대를 사용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던 영수대는 소천경에 이른 산들바람이 들어가자 법력이 깨지며 기능을 잃고 말았다.
“영수대도 싫다고! 같이 있으면 안 돼?”
새끼 고양이라도 되는 듯 산들바람이 애처로운 눈으로 올려다보자, 준혁은 마음이 흔들림을 느꼈다.
그녀의 부탁대로 함께 돌아다니는 게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준혁은 마음을 다잡고 단호하게 고갤 저었다.
“안 돼. 또다시 너희들을 잃을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할 순 없다. 수행이 완벽하게 안정될 때까진 외부 활동은 금지야.”
특히 선계에 올랐다며 빨빨거리며 돌아다닐 산들바람의 성격을 알았기에 준혁의 대답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
낮은 언덕과 울창한 숲이 번갈아 가며 보이는 호란대륙 상공.
슈아앙-
대화성으로 가는 길목 위, 준혁을 비롯한 일행이 비행법기에 편히 앉아있었다.
중괴는 비행 법기 한쪽에서 법기를 조정하는 영역분신이 신기한지 몇 번이나 힐끔거리며 기감으로 분신을 살폈다.
“궁금하시면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굳이 몰래 살피지 않으셔도 됩니다.”
“…커험. 무, 무슨 소리냐? 몰래 살피다니. 그냥 네놈 분신의 모습이 특이해서 보았을 뿐이다.”
현재 비행 법기를 조종하는 분신은 주작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주작의 힘을 바탕으로 한 사신결을 스스로 운용했기에 은은한 화기를 내뿜는 중이었다.
그 모습에 중괴는 준혁이 월광지력뿐만 아니라 태양지력까지 다룰 수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것이었고 말이다.
‘역시 이 녀석을 선택한 건 탁월한 결정이었어.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삼대지력을 두루 사용할 수 있는 것 같으니…. 거기다 성광지력을 사용하게 된 저 아이까지 이 녀석을 따르고 있으니. 식아까지 계산에 넣는다면 성공할 확률은 분명 있다.’
중괴는 준혁이 자신에게 모든 걸 보여주었다고 여기지 않았기에 내심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동안 함께한 날이 적지 않았고, 서로 신뢰 관계를 만들기 충분했다고 여겼기에 서운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적절하게 조심하는듯한 모습에 만족하기도 했다.
자신이 준혁에게 바라는 건 살얼음판을 걷는 것보다 어렵고 조심해야 하는 일.
어쩌면 그렇게 조심성이 많아 보이는 모습에 더욱 끌리는 것인지도 몰랐다.
“헌데 태식 수사는 어딨는 겁니까?”
“빨리도 물어보는구나, 그놈은 내 도움에도 불구하고 화여의 태양지력을 이겨내지 못했다.”
안타까운 듯 중괴가 말을 흘리자. 준혁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설마! 잘못된 겁니까?!”
준혁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중괴가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
“아이고 귀청 떨어지겠네. 잘못은 무슨, 대화성에서 혼자 편하게 수련에 임하고 있을 것이다. 화기를 이겨내지 못하니 멀리 떨어트려 놔야 할 것 아니냐.”
“…….”
농이었다는 걸 깨달은 준혁이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자, 중괴는 그런 반응이 재밌는지 헤죽헤죽 웃었다.
그때, 대화성이 자리한 방향에서 두 명의 수사가 맹렬한 기세를 풍기며 날아들었다.
“애송아, 인상 풀고 저기나 봐라. 새롭게 진선에 오르신 네놈을 모시고자 사람을 보낸 것 같으니.”
“…….”
두 사람은 일정 거리 이상 가까워지자 속도를 줄이더니, 허공에 멈춰서 어깨에 손을 올리며 몸을 숙였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몸을 수그린 자세 그대로 나머지 손을 자신들의 머리에 얹었다.
“성주님의 명으로 최준혁 선사님을 모시기 위해 왔습니다.”
‘아직 대화성에 다다른 것도 아닌데…. 내 등장을 기다리며 주변에서 대기 중이었나 보구나.’
소천경 수사로 보이는 두 명이 극상의 예를 표하자, 준혁은 속으로 불편함을 삼켰다.
-애송아, 연기 잘해야 할 것이다. 네놈이 진선에 오른 줄 알고 그놈이 신경 좀 쓰나 본데. 만약 거짓이 들통날 경우 그 분노가 제법 매서울 것이야.
중괴가 충고해주지 않아도 준혁 역시 고려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수가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호라, 자신만만하구나. 그렇다면 덕분에 호사 좀 누려보자꾸나.
“따를 테니 앞장서시지요.”
잠시 후, 준혁이 마중 나온 수사를 따라 움직이자, 중괴와 소화여가 그 뒤를 따랐다.
***
대화성에 도착하자 준혁을 기다린 것은 성대한 연회였다.
섭식을 하지 않는 수도자들을 위한 자리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다양한 음식과 주류가 잔뜩 차려져 있었다.
“이야, 천상의 맛이로구나!”
대화성주의 덕담이 시작하기도 전, 중괴는 각종 요리와 술을 들이붓기 시작했다.
‘아! 선식(仙食)과 선주(仙酒)로구나.’
기감으로 그것들을 파악한 준혁은 음식들이 각종 최상급 약초로 만든 것들이고, 술은 하나같이 극상의 향을 가진 선주라는 걸 깨달았다.
“준비한다고 해보았는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뭘 좋아하실지 몰라 그동안 비축해둔 것들을 풀었습니다.”
중괴가 음식에 몰두하는 사이,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표정으로 준혁에게 다가온 라후지는 각종 음식과 술에 들어간 재료를 하나씩 설명했다.
그리고는 몇 가지 최상급 재료로 만들어진 것들을 직접 권하며 준혁의 반응을 살폈다.
“어떠십니까?”
“저를 이리도 생각해 주시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며칠간 이어지던 연회가 끝나자, 연회장의 후문이 열리며 미색이 뛰어난 여인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하나같이 몸통만 한 상자를 품에 안고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예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우연히 선사의 일행이 이곳에 머물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해서 알아보니 아직 정해진 거처가 없으시다고요.”
준혁은 여인들과 각종 보물이 들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상자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태식 수사를 만나셨나 보군요.”
“그렇습니다.”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
“비슷한 수행의 제 수하들과 수련에 임하고 있지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선사께서도 딱히 정해진 거처가 없다면 이곳에 둥지를 트는 것이 어떠신지요?”
-애송아, 대답 잘하거라. 네놈이 거절할 걸 알고 하는 말일 테니 기분 나쁘지 않게 만족할만한 답을 내놔야 할 것이야.
라후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중괴의 전음이 준혁의 뇌리를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