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대천경(大天境) (4)
‘이런 불균형이라니.’
영수들과 해후를 마친 준혁은 그들의 상태를 다시 한번 파악하고는 쓰게 혀를 차고 말았다.
준혁이 쏟아부은 천지영기로 인해 전원이 소천경의 수행을 가지게 되었지만, 실상은 외적인 상태와 내적인 상태의 불균형으로 몸이 붕괴할지도 모를 위험한 상황이었다.
준혁이 거인족의 비경에서 수행을 멈춘 이유, 그때 피하고자 했던 상황에 영수들이 직면해 있는 것이었다.
‘조절한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위험한 상태가 될 줄이야.’
그나마 오래전에 먹인 명혼단으로 인해 불안정한 상태도 겨우 유지되고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깜깜한 벽에 갇힌 듯 아무것도 느껴지지도 않았어! 우린 얼마나 갇혀있던 거야? 여긴 선계야? 나머지는? 목족 그자는 어디 갔어? 어? 이 여자는 누구야?”
구슬로 변해 몸속에 갇혀있던 것이 실제 시간만큼 체감되지는 않은 듯했지만, 꽤 긴 시간이라 여겼는지 산들바람은 조금 불안정한 심리상태였다.
그래서인지 불안감을 감추기 위해 입이 쉬질 않았다. 결국 소화여를 발견하고 나서야 질문이 멈췄다.
“그런 것은 차차 알게 되면 될 테고, 우선 이곳은 위험하니 다시 들어가 있거라.”
“싫어!!”
“......”
말 안 듣는 딸처럼 앵앵거리는 산들바람을 달래 다시 봉인에 가까운 상태로 만든 준혁은 그것을 몸속에 저장했다.
‘어쩔 수 없지. 우선은 안전이 최우선이니.’
끔찍한 경험을 다신 하고 싶지 않다는 듯 반항하는 산들바람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주인님, 이번엔 오래 걸리는 거 아니죠?”
이어서 청호도 구슬로 변하자, 남은 도마뱀 두 마리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이제야 뵙게 되었네요. 저흰…. 어찌해야 하는 것입니까?”
수행만 높았지, 아이와 다름없이 도화지처럼 깨끗한 용각족의 후예.
그 둘은 청룡이 넘겨준 기운 때문에 세상을 자각하고 판단할 만큼의 지식은 가진 상태였으나, 아직 어떤 결정도 스스로 내리지 못하는 아기처럼 행동했다.
“너흰 용각족의 수장이었던 용천무의 의지를 이으라는 의미에서 용천과 천무라 이름을 부여하겠다. 마음에 드느냐?”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지금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나머지 얘기는 다음에 나누도록 하자꾸나.”
아버지의 명을 따르듯, 두 도마뱀도 구슬로 변해 체내로 들어가자,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소화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럼 저희도 움직이는 게 좋겠습니다. 우선 중괴 어르신을 만난 후 남은 여정에 대한 얘길 나누는 게 좋겠습니다.”
“아!”
준혁의 입에서 중괴라는 말이 나오자, 소화여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중괴가 어떤 노력을 했을지 예상이 갔던 준혁은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 그럼 일어나시지요.”
***
“이곳으로 옵니다!”
화제의 중심인 새로운 진선이 머무는 자리.
그곳에 넓게 퍼져있던 푸른 보호막이 사라지며 두 명이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택요는 그들이 자신이 있는 방향으로 날아오자, 대화성주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하다가, 그들이 중괴 앞에 멈춰서자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중력괴 선사와 아는 자였나 봅니다.”
택요의 말에 라후지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다.”
“예상하신 겁니까?”
“중괴가 지금껏 치료를 핑계로 이곳에 머물지 않았느냐. 그자를 치료하기 위해 합류한 거라면 당연히 중괴와 인연이 있는 자겠지.”
“아!”
“우선 안면부터 트자꾸나.”
택요는 성주의 말에 자신이 깊게 생각해보지 못한 것을 반성하다가, 성주가 먼저 움직이자 급하게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중괴 곁에 이르자, 반듯하게 생긴 올곧은 대나무처럼 느껴지는 사내를 볼 수 있었다.
그 옆엔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는데, 사내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신비감이 느껴지는 수사였다.
중괴는 택요와 대화성주가 가까이 왔음에도 신경도 쓰지 않고, 한참 동안 여인을 살폈다.
그러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진선에 오른 것으로 추정되는 사내와 대화를 이어갔다.
“살아있었구나.”
“어르신의 염려 덕분입니다.”
“그 안에서 꿀이라도 얻은 것이냐?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구만.”
“아닙니다. 어르신께서 저를 보호하기 위해 앞을 가로막던 게 여전히 생생히 떠오릅니다.”
“별걸.”
중괴는 준혁의 말에 쑥스러운지 고개를 모로 저었다.
그러다 가까이 다가온 대화성주와 눈이 마주치자 입술을 비죽였다.
“무슨 볼일이실까?”
대화성주는 중괴의 이죽거림은 신경도 쓰지 않고, 준혁 바로 앞까지 다가가더니 한 손을 어깨에 올리고 몸을 살짝 숙였다.
이는 예를 표하는 행동이었기에 중괴와 택요를 비롯해 주변에서 날아오던 수사들까지 전부 놀라고 말았다.
진선이라 함은 최강자 반열에 올랐음을 의미하는 것. 그랬기에 대화성주의 태도는 보기 드문 것이었다.
아무리 동급수사를 맞이하는 것이라 해도 과한 감이 있는 행동이었다.
“선도에 오르신 걸 축하드리오. 선사. 혹 존함을 알 수 있겠습니까?”
‘선사?’
준혁은 상대방의 말에서 무언가 오해가 있다는 걸 단번에 파악했다.
흔히 원영에 이르거나 화신기에 도달했을 때 선도에 발을 들였다고 표현을 자주 했었다.
가끔은 올랐다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으니, 그건 표현의 차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선사라는 단어는 정확히 삼선에 이른 선인을 지칭하는 말.
‘모여든 천지 영기가 심상치 않더니, 다들 내가 진선에 오른 줄 아는 것인가?’
정확히는 겁과 칠조선교, 그리고 진정한 영역이 만들어지는 걸 보았기 때문이지만, 준혁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자신을 진선으로 오해한다면 굳이 손해 볼 것이 없기에, 가타부타 진실을 말하지 않고 가볍게 흘려 넘겼다.
“최가 준혁이라 합니다.”
“최가라…. 제가 견문이 짧아 실례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혹 어느 대륙에서 오셨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이곳 호란에선 최가를 본 적이 없군요.”
“작은 곳이라 말해도 모르실 겁니다. 여기 중괴 어르신과 여행 중이었는데, 잠시 헤어졌다가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준혁은 자신이 비승 수사란 걸 말하고 싶지 않았기에 중괴를 핑계로 대화를 넘겼다.
그러자 신분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준혁의 마음을 읽은 것인지, 대화성주는 작게 웃으며 다시 한번 예를 보였다.
“그러시군요. 그나저나 이제 막 선도에 올라 정양이 필요하실 텐데. 저희 대화성으로 가시는 건 어떠십니까? 선사와 인연을 만들 기회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런 공개적인 초대를 거부하는 건 예가 아님을 알기에 준혁은 중괴에게 시선을 돌렸다.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닌, 해결을 원하는 것이었다.
-쩝, 쳐다보면 뭐 어쩔 것이냐. 성주이자 진선에 오른 자다. 초대를 거부하는 건 무시하는 것과 같은 처사다. 게다가 저자는…. 아니다. 끙. 받아들이거라.
말은 함부로 내뱉었지만, 중괴는 항상 선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 중괴의 입에서 나올법한 말에 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영광을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다만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니 며칠만 말미를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럼 기다릴 테니 조만간 다시 뵙도록 하지요. 택요야 가자꾸나.”
준혁이 수락하자 대화성주는 만족한 웃음을 띠고는 서둘러 하늘을 갈랐다.
사실 하루 이틀이면 이곳의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던 것을 몇 달이 흘렀으니 마음이 급한 상태였다.
잠시 후. 대화성주가 떠나자 기다렸다는 듯 동주성 성주와 임주성 성주, 그리고 주변 세력들의 대표로 보이는 자들이 줄을 이었다.
“선도에 오르신 걸 축하드리옵니다. 저는 동주성을 꾸리고 있는….”
“선사. 선도에 오르신 걸 축하드리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준혁은 마치 진짜 진선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유로운 태도로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덕담을 건넸다.
선계에 오른 뒤 쫓기거나 핍박받고, 혹은 협박에 움직여야 했던 걸 떠올리며 역시나 약육강식의 세상임을 다시 한번 깨닫고 있었다.
잠시 후, 동주성 성주를 필두로 한두 명씩 떠나가더니 결국 중괴와 소화여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중괴의 전음이 이어졌다.
-헌데 네놈이 정말 선도를 이룬 것이냐?
-진선경에 이르렀냐 그 말씀이십니까?
심유한 눈빛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중괴.
준혁은 그런 그를 향해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오해를 하게 된 건지는 모르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뭐?
“크하하하!”
중괴는 대화성주를 포함한 수많은 수사들이 속았다는 사실에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그것들은 전부 무엇이었단 말이냐?
하지만 중괴 역시 준혁에게 일어난 현상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기에, 진선으로 오해하게 된 현상에 관해 물었다.
‘아! 오행신기로 인해 그런 현상까지 벌어진 모양이구나! 어쩐지. 영기구름의 규모로만 오해하기엔 확신을 가진 게 이상하긴 했다.’
모든 설명을 듣고 난 준혁은 굳이 오행신기에 대한 얘긴 꺼내지 않고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듯 의문을 넘겨버렸다.
그러자 중괴가 더 캐묻고 싶다는 눈빛을 하다가, 포기한 듯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네놈 수행이 어찌 되는 것이냐? 전혀 읽히지 않는구나.
처음 뇌명숲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마선기 때문인지 중괴는 준혁의 수행을 유일하게 간파했었다.
하지만 대천경에 오르며 진정한 의미의 영역이 상시적으로 발동돼있자, 다른 이들처럼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화여 이 아이는 어떻게 치료한 것이고? 궁금한 게 한둘이 아니니 우선 자리를 이동하자.
주위에 아무도 없음에도 중괴가 전음만으로 대화한 이유를 알고 있던 준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중괴의 뒤를 따랐다.
***
혹시 모를 누군가의 시선을 피해 자리를 옮긴 세 사람은 주변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나서야 그동안 밀린 대화를 시작했다.
“뭐라!! 태양지력이 더는 생성되지 않는다고?!”
첫 대화는 소화여의 상태에 대한 것이었는데, 중괴는 그녀가 치료된 걸 넘어서 더 이상 태양지력을 발산하지 않는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아니, 충격을 넘어 마치 괴물을 보듯 준혁을 보고 있었다.
“게다가 성광지력을 다룰 수 있게 됐다고? 허어, 어쩐지 다시 보았을 때 이상한 거리낌이 느껴지더니…. 그게 성광지력 때문이었다니.”
중괴는 여전히 소화여를 따뜻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으나, 아까와 달리 가까이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는 준혁에게 중대한 비밀을 알려준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네놈은 이게 무슨 의미인 줄 아느냐?”
“의미 말씀입니까? 화여 소저가 더는 고통받을 필요가 없다는 말 말입니까? 아니면…. 아! 혹 소우자의 태도 변화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딸을 치료하기 위해 평생 수련한 공법까지 바꾼 소우자. 묘립성의 성주인 소우자가 딸을 완치해준 은혜로 준혁에게 힘을 실어준다면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건 분명했다.
게다가 이미 준혁은 성주와 그 휘하 수사들의 생사여탈권마저 가진 상태가 아니던가?
하지만 중괴는 준혁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얘길 꺼내 들었다.
“물론 그런 것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럼 무엇이 중요하단 말씀이십니까?”
“네 말대로 화여 저 아이가 성광지력을 무한히 만들어내고 그 힘을 키울 수만 있다면…. 앞으로 마신들에겐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
“아!”
준혁이 소화여의 가치를 재확인한 듯 보이자, 중괴가 다음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말인즉, 앞으로 네놈이 저 아이를 보호해야 하고 말이다.”
“그건 왜입니까?”
당분간 소화여를 책임지기로 했지만, 중괴의 말의 의미는 조금 달랐다.
“선마궁이나 법문에서 알게 되면 가만히 있겠느냐? 당장 전력을 끌고 와 저 아이를 죽이려 할 것이다.”
“아….”
“그러니 앞으로 저 아이의 능력이 알려지지 않게 조심해야 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네놈이 끝까지 책임지고 보호해야 한다 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