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대천경(大天境) (2)
소화여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눈빛을 보내자, 준혁은 곧장 정제되기 시작한 힘을 그녀의 단으로 밀어 넣었다.
“갑니다! 버티셔야 합니다!”
우웅-
“어흑!”
정제되며 내부에 쌓이기 시작한 기운은 그 속도가 감히 재단하기도 힘들 정도로 엄청났기에, 잠시라도 주저한다면 양을 세밀하게 조절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랬기에 준혁은 정제와 거의 동시에 기운을 미세하게 분사해, 그녀가 충격을 받지 않게 조절하며 주입했다.
만약 준혁이 천기를 정제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소화여의 몸에 집어넣었다면, 그녀의 몸은 곧장 터져나가고 말았을 터였다.
‘된다. 역시 이 방법대로 하면 완벽하게 치료할 수 있어!’
기를 주입 당한 소화여는 실시간으로 몸이 회복하기 시작했고, 곤죽 같던 얼굴도 조금씩 변화가 찾아왔다.
이윽고 얼마 되지 않아 신체가 완벽한 정상으로 돌아왔다.
‘삼지행으로 그녀의 영근은 바로잡았으니, 이대로 버티기만 한다면.’
왕의 정수의 힘 때문인지 생각보다 수월하게 치료가 진행되자 준혁은 절로 콧노래가 나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방심하지 않고, 온 정신을 집중해 단을 강제로 변형시키는 데 몰입했다.
쿠오오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영기가 주입된 실제 시간은 겨우 며칠에 불과했지만, 의식을 극도로 날카롭게 만들어 미세하게 조종하고 있던 준혁은 수십, 수백 일이 지난 것만 같은 기분에 점점 심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때, 변화가 찾아왔다.
화악-
준혁을 바라보는 자세로 좌정한 채 있던 소화여의 몸이, 흰 옥같이 변하며 냉기를 뿜어냈다.
그리고는 수 초도 지나지 않아, 냉기가 순식간에 사라지며 활활 타오르는 열기로 변했다.
‘이건?’
잠시 후 열기마저 무언가에 밀려나듯 사라지자 소화여의 단이 쩌정- 소리를 내며 깨져나가 버렸다.
그러다 마침내, 흔적도 보이지 않고 사라졌던 월광지력과 태양지력이 불현듯 나타나더니 그녀의 단(丹)이 자리한 곳으로 맹렬히 밀려들어 갔고, 서로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듯 세력을 키웠다.
하지만 그렇게 세력을 키우던 두 힘이 줄다리기를 시작하려는 찰나.
샤르르르-
원래는 태양지력을 만들어냈던 영근이 돌연 별의 기운을 흘리며 두 기운을 자신과 같은 성광지력으로 치환시켜 버렸다.
그리고는 마치 오래전 잃어버린 형제를 만난 듯 급격하게 서로를 끌어당기더니, 기존의 기운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압축하고 또 압축했다.
그러다 마침내 하나의 새로운 단으로 바뀌었다.
‘성공했다!’
그 순간 손바닥을 통해 모든 걸 조종하고 관찰하고 있던 준혁은 쾌재를 불렀다.
처음에 태양지력을 성광지력으로 치환하는 장치만 해놓았던 것이, 진정한 성광지력을 뿜어내는 영근으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준혁이 쾌재를 부른 순간.
쿠오오오오-
그가 정제하던 기운이 빨려 들어가듯 소화여에게 이동했고, 그건 마치 아기가 젖 달라고 울부짖는 것처럼 보였다.
***
소화여의 단이 완성되며, 그녀가 영기를 적극적으로 흡수하기 시작하자 준혁은 황급히 정제하던 영기의 양을 대폭 늘렸다.
동시에 머리 위로 폭포처럼 떨어지던 기운의 양도 급증했다.
‘흐음, 이제 나만 버텨내면 되는 것이겠구나.’
준혁은 소화여에게 강제로 주입하던 흐름에 대해선 신경을 끄고, 이번엔 자신의 내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계산대로라면 소화여가 가져간 기운 때문에 대천경에 이르기엔 부족할 수도 있는 일.
지금부터는 생사를 걸어야 할 만큼 중요한 순간을 맞이해야 했다.
까딱 잘못해 수행을 올리기에 영기가 부족하다면 그건 그것대로 낭패.
대천경에 이르지 못하면서 천기를 불러온 죄로 반서를 맞게 될 터이니 목숨이 걸린 게 맞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신체가 완벽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천기를 맞이하는 것이기에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해야 하는 것도 있었다.
‘게다가 여전히 내 기운을 가져가는 걸 보면 이것까지 계산에 넣어야 한다.’
소화여가 지속적으로 흡수해 가는 것까지 생각해야 했으니 그야말로 첩첩산중 설상가상이었다.
하지만 소화여가 기운을 흡수해가는 걸 제외하곤 전부 준혁이 예상했던 일.
그는 때에 이르렀다고 여기자, 사신 분신을 재소환해 자신을 둘러싸게 배치했다.
그리고는 그들로 하여금 용각족 혈맥의 힘을 발휘하게 만들었다.
‘시작하라!’
용각족 혈맥의 힘은 수행이 쌓이는 속도를 수 배에서 수십 배까지 끌어 올리는 능력.
그 말을 다른 방향에서 해석하자면 혈맥의 힘이 작용하는 순간부터 영기 소모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기 소모가 빨라진다는 말은.
‘내게 주입되고 있는 영기의 낭비가 줄어든다는 뜻이지.’
하늘 가득 모인 영기구름. 그리고 그 중심에서 소용돌이치며 준혁의 정수리로 쏟아지는 영기 폭포.
겉으로 보기엔 천기 현상으로 모인 영기가 전부 준혁에게 주입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준혁이 소비하지 못한 영기는 다시 자연으로 흩어졌다가, 그중 일부는 영기구름으로 돌아가고 나머지는 완전히 소멸하는 형식이었다.
준혁이 노린 건 바로 그 과정에서 생기는 낭비를 없애는 것.
그렇게만 한다면 소화여를 치료한다 해도 영기가 부족해서 대천경에 이르지 못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계산이었다.
혈맥의 주인인 준혁은 수행이 쌓이는 효과에 대해선 이득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영기 소모는 혈맥의 도움을 받는 다른 이들과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에서 착안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 계산이 적중한 듯.
준혁의 몸속에 들어오던 영기의 정제 속도가 수십 배로 빨라지면서 엄청난 물량의 천지 영기가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계산에 계산을 거듭했고,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두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게 흘러갔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설마 시작할 때 그 뇌전의 영향인가?’
며칠간 쉬지 않고 수십 배의 속도로 영기를 소모하던 준혁은 당황하고 말았다.
당황의 이유는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영기 때문.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르러 영기 주입이 끝나는 순간 바로 단(丹)을 재정립하는 일을 시작하려 했는데, 무슨 일인지 영기는 무한한 것처럼 계속 쏟아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영기 주입이 멈추지 않는다면, 그렇지 않아도 신체적으로 준비가 부족했던 준혁의 몸은 포화한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붕괴할지도 모를 일.
영기가 부족해 반서를 맞는 것보다 더 위험한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다. 우선은.’
결국 준혁이 선택한 건, 소화여와 몸속의 구슬 형태로 잠들어있는 영수들이었다.
준혁은 무식하게 쌓이고 있는 잉여 영기를 그들에게 주입하기 시작했다.
***
오행신기로 말미암아 하늘이 속고 말았다는 걸 준혁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아니 그건 준혁뿐만 아니라 선계를 통틀어서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현재 상황을 간략하게 말하자면, 위선경에서 대천경으로 올라야 할 준혁에게 대천경에서 진선으로 상승할 만한 양의 영기가 몰려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준혁은 계산 착오로 피똥을 싸야 하는 상황이었고, 외부에서 그걸 지켜보는 자들은 그 규모에 벌벌 떨 뿐이었다.
“성주, 대단하지 않습니까? 오래전 성주께서 선도에 오르실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수백 킬로가 넘게 이어져 있는 방대한 영기구름의 양.
대화성의 삼인자로 알려진 택요의 감탄에 대화성 성주 라후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게다가 천기 현상뿐 아니라 저자가 소모하는 영기의 양을 보거라.”
“아! 그러고 보니!”
“일반적인 대천경 수사보다 서너 배는 빠르다. 의지가 하늘에 닿아있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는 법. 새로운 강자의 출현이구나.”
수행을 올리는 일 외엔 세상일에 무관심한 라후지는 누군가를 칭찬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 그가 칭찬을 거듭하자, 택요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저분께서 선도에 이르시면 제가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
“초청에 응해주실지는 모르지만, 좋은 관계를 만들어서 나쁜 것 없지 않겠습니까? 정중히 모셔오겠습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구나. 다만 꽤 날카로운 상태일 테니 내가 직접 움직이겠다.”
진선에 오른 순간, 수사가 받아들이는 정보는 질적으로 양적으로 차원이 달라졌다.
그걸로 인해 날카롭고 예민해지는 게 부지기수였으니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 라후지 본인이 움직이는 게 맞는 판단이었다.
***
둘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
택요와 라후지의 말을 엿들은 중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한껏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진선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150년 전에 겨우 소천경이었단 말이다 이 멍청한 놈들아.’
150년 만에 소천경에서 진선에 이를 가능성은 없었다.
거의 없는 게 아니라 세상의 순리 상 절대 불가능한 일.
아무리 많은 단약을 먹고 영기를 흡수해도 정신이라는 것은, 또 혼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이 흐르지 않고는 절대 일정 이상 단련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것이냐.’
하지만 하늘에 모인 천기 현상을 보면 대화성 성주의 말이 수긍이 가는 상황.
중괴는 똥 씹은 표정으로 자신이 놓친 것이 무엇인지 맹렬히 머릴 굴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이 넘는 시간이 흐르자, 온 세상을 뒤덮을 것처럼 모여들던 영기구름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천기 현상이 사라짐과 동시에 맑은 구름을 뚫고 칠색의 무지개가 나타나 한곳에 떨어졌다.
마치 무지개다리를 건너 어딘가에 오르라고 신호를 주는 것처럼 말이다.
“허어, 칠조선교(七照仙橋)라니….”
누군가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오자, 그것에 반응하듯 강렬한 영기파동이 주변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수사들은 안색이 급변하더니 분분히 뒤로 물러나며 파동이 미치는 범위에서 벗어나려 움직였다.
오직 중괴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선인에 오른 자에게만 찾아온다는 칠조선교와 진정한 영역이라니…. 정말 저 애송이가 진선에 이르렀단 말인가?”
칠조선교는 일종의 하늘이 내리는 제안.
이성이 있는 수사라면 절대 그러지 않겠지만, 일곱 빛깔 무지개다리를 건너면 세상과 하나 되며 영원한 자유를 찾는다고 했다.
즉, 모든 영력이 사라지고 무로 돌아간다고 전해져왔다.
그리고 중괴의 입에서 나온 ‘진정한 영역’.
그것은 인위적으로 영역을 만들지 않아도 상시적으로 일정 공간을 지배하에 둘 수 있는 선인들만의 공능이었다.
중괴가 굳이 영역 선포를 하지 않고도 일정 공간에서 영역의 힘을 사용하며 영역분신을 소환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때 사방으로 퍼져가는 파동을 피해 움직이던 수사들 중 수행이 낮은 자들이 비행 능력을 상실하고 픽픽 떨어지기 시작했다.
“으헉!”
퍽- 퍽-
동시에 화기의 근원지였던 곳에서 엄청난 파동과 함께 거대한 환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아악-
환영은 족히 백여 미터는 거뜬히 넘어 보이는 크기였는데, 핏빛 눈동자에 시리도록 진한 살기를 띠고 있었다.
눈만 마주쳐도 몸이 반으로 갈라져 버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기운을 가진 환영은 준혁의 모습과 똑 닮아 있었다.
환영은 살기 어린 눈으로 주변을 가볍게 훑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순간, 자리를 피했던 소천경 수사들도 비행 능력을 상실하며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이런!”
뿐만 아니라 대천경에 이른 성주들도 비틀거리며 잠시나마 몸에 균형을 잃었다.
유일하게 대화성 성주와 중괴만이 동요가 없었는데, 그들도 속으론 진땀을 흘려야 했다.
“이, 이게 무슨. 수행을 다지지도 못했는데 벌써 이런 기운을!”
그리고 누군가의 입에서 신음인지 감탄인지 모를 소리가 나온 순간.
백여 미터가 넘던 환영이 입을 뻐끔거렸다.
스가가각-
그 순간, 대기가 비틀렸다.
말 그대로 공간 자체가 어긋난 듯 균열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