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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285화 (285/408)
  • 285화. 구원 (1)

    남운대륙 중심에 위치한 남운성.

    그곳에서 서남쪽으로 이동하다 보면 회화(灰花) 군락지가 나타났다.

    잿빛 색을 띤 회화는 초연단의 중요 재료 중 하나로 꽤 귀한 물건이었다.

    회화군락지가 자리한 곳엔 오래도록 그 지역을 지키는 가문이 존재했는데, 사람들에게 회보주가(灰保住家)라 불리는 곳이었다.

    원래부터 유서 깊은 가문으로 알려졌던 주가는 최근 들어서 그 이름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그 이유인즉 주가의 가주인 주백강의 셋째 딸 때문이었다.

    그녀가 바로 오백 년도 되지 않아 소천경에 오른, 하늘이 내린 수사라 불리는 주여령이었다.

    주여령은 엄청난 성장 속도만큼이나 미모로 유명했다.

    남운성에서 한자리한다는 자들 중 그녀를 욕심내지 않은 자가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중 몇 명은 그녀의 집안에 수백 번 매파를 보냈다가 그녀가 소천경에 이른 후에야 포기했다는 소문이 파다할 정도였으니 두 번 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였다.

    그렇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회보주가의 별채 뒤 공터.

    그곳에 검은 머리칼을 늘어트린 아름다운 여인이 하늘을 노려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 기분은 뭘까? 분명 누가 훔쳐보고 있는 것 같은데.”

    주여령은 상공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영역으로 주변을 감싸도 시선은 사라지지 않았고, 기감을 퍼트려도 무엇도 잡히질 않았다.

    “분명 있는데, 잡히지도 보이지도 않는다니.”

    주여령은 여전히 하늘에 시선을 주고 있다가 급기야 소릴 질렀다.

    “누구냐!! 감히 누가 주가를 엿보고 있는 것이야!”

    파앙-

    외침과 동시에 어마무시한 기세가 주변을 휩쓸었고, 기세에 놀란 가문의 무사들이 분분히 뛰쳐나오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아가씨! 무슨 일입니까?!”

    “설마 동태! 그자가 또 온 겁니까요?!”

    짧은 시간 공터로 수십의 수사들이 모여들자, 주여령은 멋쩍은 듯 손을 흔들었다.

    “아니야. 내가 예민해서 뭘 착각했나 봐.”

    그녀가 소릴 지른 그 순간, 하늘에서 느껴지던 시선이 게 눈 감추듯 사라져 버렸다.

    ‘아주 오래전에도 비슷한 걸 경험한 것 같은데….’

    그때도 아주 잠깐이지만 수련 중이던 자신을 하늘에서 누군가 내려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땐 겨우 화신기 때라 자세하게 느끼지 못했었고, 이번엔 좀 더 강하게 느꼈던 것이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나를 욕보이려 하는 그놈들과 하나라면…. 절대 살려두지 않겠어. 절대로.”

    ***

    “한 성깔 하는구나!”

    주여령이 소리 지르던 그 시각, 상대방이 분명하게 적지주의 시선을 인지하며 화내는 모습에 준혁은 놀라고 말았다.

    일반인도 몰래 훔쳐본다면 기분 나쁠 일이었는데, 하물며 수련 중이던 수사라면 그건 결례를 넘어서 칼을 들이밀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

    그녀의 안전을 확인했으니 재빨리 적지주의 능력을 거둬들였다.

    그리고는 계륵이 돼버린 비경을 한 번 더 시선에 담고는 허공을 향해 읊조렸다.

    “열려라.”

    비경 내에서 원하는 바는 전부 이뤘으니, 떠날 때가 왔다.

    잠시 후, 준혁의 언령에 공간이 비틀리며 왜곡되었다.

    “우선 가까운 대화성으로 가서, 다른 이들을 확인하고…. 그리고 남운대륙으로 이동하면 되겠지.”

    정확히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나,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중괴를 비롯한 소화여와 태식이 아직까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는 모르나, 우선은 그들을 찾아야 했다.

    다른 걸 떠나서 소화여의 상태를 확인하고 그녀를 치료해야 하는 이유가 컸다.

    “소우자에게 약속했는데, 그걸 저버릴 수는 없지.”

    잠시 후 준혁은 가볍게 허공을 밟으며 비틀린 공간으로 몸을 날렸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

    대화성으로 향하는 상공.

    먹구름과 흰 구름이 교차하며 뭉쳐있는 하늘을 조각배 하나가 빠르게 가르고 있었다.

    조각배의 선두엔 주작의 외형을 한 여인이 서 있었고, 그 뒤엔 준혁이 조용하게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있었다.

    준혁은 비행법기의 조종을 영역분신에게 맡긴 후, 차분히 내면을 관조하는 중이었다.

    비경에선 수행을 올리고 신체의 조화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다 보니, 정작 중요한 경지에 대해서는 파악이 덜 된 상태.

    이동을 시작하자, 여유가 생겨 소천경에서 위선경으로 발전하며 변한 것들을 하나씩 되짚어가고 있었다.

    ‘역시, 독고제의 기억을 뒤져봐도 위선경에 영역분신을 넷이나 사용하는 경우는 없다. 내가 특별한 경우야.’

    특별이 아니라 특이에 가까웠다.

    ‘게다가 네 명의 영역분신이 동시에 최고 경지를 유지할 수 있다니, 독고제의 기억이 너무 오래된 것이라 현 수도계의 상황과 맞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나만 특수 상황인지 분간이 가질 않는구나.’

    옛 정보인 독고제의 기억과 비교하면 자신의 상태는 너무 이상했다.

    기본적으로 위선경엔 하나의 영역분신을 유지할 수 있었고, 영역분신의 수행은 본신과 동일했다.

    즉 준혁이 위선경이니 영역분신도 위선경인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 후가 문제였다.

    영역분신이 늘어나면 계산이 달라졌다.

    대천경에 이르러 두 명의 분신을 사용하면 각 분신의 경지는 대천경에서 살짝 모자랐다. 기본적으로 본신의 9할 정도의 수준.

    그걸 넘어서 진선경에 이르러 네 명의 분신을 부리면 그땐 분신의 수행이 본신의 8할 아래로 떨어진다 했다.

    즉, 수행이 올라갈수록 분신들이 다룰 수 있는 총 영기의 양은 증가하는 것이지만, 각각의 분신은 숫자가 늘어날수록 최대 출력이 조금씩은 떨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준혁은 그렇지 않았다.

    위선경에 네 명의 분신을 소환할 수 있는 것도 특이한데, 네 명의 분신은 동시에 준혁과 동일한 위선경 후기의 최대 출력까지 가능했다.

    물론 네 명의 분신을 최대 출력으로 유지하면 영기 소모가 말도 안 되게 극심해져서 영기 회복 속도를 아득히 상회했다.

    그렇기에 실전에서 써먹기에 적합하진 않았지만, 문제는 ‘왜?’였다.

    ‘도대체 왜?’

    게다가 최대 출력 문제는 어쩌면 별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진짜로 준혁이 원인을 알고 싶은 건 분신들이 사용하는 공법.

    원래 영역분신은 영역의 힘으로 영역 내에서만 활동하는 분신을 복사하는 것이었기에 본체가 사용하는 공법을 사용하는 게 당연했다.

    아니, 정확히는 분신 자체가 본체의 공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표현하는 게 옳았다.

    그러나 준혁의 분신은 각각 사신결이라 불리는, 준혁이 만든 혈맥의 힘에 특화된 공법을 사용했고, 심지어 그들을 이루고 있는 근원 역시 준혁의 몸속에 담긴 각자의 혈맥의 힘이었다.

    ‘하아…. 누군가 속 시원하게 알려주면 좋을 텐데.’

    이럴 때 중괴라도 있었다면 투덜대며 지식을 전해줬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의문.

    ‘대천경에 이르면 어찌 될까?’

    원래 공식대로라면 2배로 늘어나는 게 정석이지만, 준혁은 이미 4배가 된 상태.

    변화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지만, 혹시나 두 배로 늘어난다면? 하는 기대감에 절로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4배가 된다면 나머지 네 명의 분신은 어떤 모습일 것이고, 어떤 공법을 사용할 것인지. 혹시나 적호족이나 호왕족같이 하계에서 얻은 또 다른 혈맥의 힘이 발현돼 종족 특성을 가진 분신이 만들어질 것인지?

    ‘아, 더 이상의 고민은 무의미하구나.’

    지금의 고민은 깨달음의 문제가 아닌, 정보 부재의 문제.

    한참 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준혁은 고민을 이어가는 게 오히려 수련에 방해가 될 것 같단 생각에 도달했다.

    그래서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상념을 날려버렸다.

    ‘하긴, 지금 고민해 봐야 무얼 하겠는가? 결국 수행이 오르고 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인데.’

    분신에 대한 고민을 털어버린 준혁은 다음으로 손을 뻗었다.

    쑤욱-

    그러자 공간을 가르며 손 위로 붉은 장검, 적마도가 나타났다.

    직후, 허공에 영기가 뭉치더니 또 하나의 적마도가 만들어졌다.

    “쉬운 작업이 아니군.”

    오행신기를 받아들이며 진선에 올라야만 사용 가능한 의지의 실체화.

    실체화를 이루는 건 성공했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다.

    즉 중괴처럼 전투에 적극적으로 이용할 순 없었고, 안정된 상태에서 수련만 가능한 상태였다.

    그나마 처음엔 영기가 뭉친 정도의 허접한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아주 잠시일 뿐이지만 완벽한 외형을 만들어 낼 정도로 발전했다.

    “후우. 시간이 해결해 주려나.”

    잠시 후, 두 자루의 적마도는 준혁이 의지를 거둬들이자 소리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능력.

    진실은 영기를 의지로 실체화하는 것이었지만, 대천경 이하의 모든 수사들의 눈엔 창조 능력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다만 준혁은 우연히 얻은 오행신기로 흉내만 낼 정도였으니, 진정한 의지의 실체화는 멀고 먼 미래의 얘기였다.

    중괴가 보았다면 괴물이라고 호들갑을 떨었을 일이었지만, 준혁은 능수능란하게 사용하지 못하는 자신을 오늘도 채찍질할 뿐이었다.

    ***

    분신의 조종으로 조각배는 한 달이 채 지나기 전에 대화성에 도착했다.

    소화여를 찾아야 하는 준혁은 기감으로 성 전체를 확인하려다, 성주를 비롯한 강자들과 충돌이 일어날 걸 염려해 성으로 조용히 들어섰다.

    “줄을 서시오!”

    성문에선 출입하는 자들에 대해 신분 조사를 하고 있었는데, 준혁은 학고응에게 받은 남운상단의 신분패를 제시해 가볍게 지나쳤다.

    그 와중에 자신을 보고 침을 질질 흘리는 성문 문지기들에게 영석을 조금씩 쥐여주는 걸 잊지 않았다.

    상단의 신분패를 사용하면 편하긴 했지만, 상단 특유의 관습이 남아있어서 뒷돈을 쥐여주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영석으로 신분이 보장되는 것이 안전하긴 하지.’

    여전히 요마족을 비롯한 여러 세력이 자신을 찾고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기에, 남운상단의 신분패는 큰 도움이 되는 물건이었다.

    성문을 통과한 준혁은 빠르게 이동해 성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중괴가 마음먹는다면 그를 수색하는 건 힘들었고, 태식은 특징이 없어 특정하기가 곤란한 상황.

    하지만 소화여는 삼지행을 다루는 준혁에게 쉽게 찾을 수 있는 목표였다.

    잠시 후, 성의 중심에 도착한 준혁은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땅으로 토율서를 소환했다.

    동시에 토율서의 몸에 삼지행을 집어넣어 소화여 가까이 가면 반응하도록 유도했다.

    ‘역시 삼지행으로 마선을 부리면 존재감이 희미해지는구나.’

    땅속으로 사라진 토율서를 느끼며 준혁은 귀원패를 사용했을 때를 떠올렸다.

    서로 상극의 힘이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반응. 하지만 두 가지 힘이 공존하는 준혁으로서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아직 이곳에 머물고 있을까?’

    그러길 바라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컸기에 준혁은 성 내에서 일행을 찾지 못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고심했다.

    그때, 생각지도 못한 대화가 준혁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자네 그 얘기 들었나?”

    “뭔데 그러나?”

    준혁 앞을 스쳐 지나가는 두 명은 축기기 수행의 수도자였다.

    “동쪽의 불타는 대지 말일세.”

    “아! 수십 년 전부터 난리가 난 그곳 말인가?”

    “아는 수사분께 전해 들었는데 조만간 해결될 것 같다고 하더구먼.”

    “오! 어찌말인가?”

    두 명 중 턱수염을 멋들어지게 길은 수사가 질문하자, 처음 말을 꺼낸 자가 잠시 헛기침을 하다가 말했다.

    “크흠. 지금껏 그곳에서 발생하는 화기로 주변이 난리가 난 상황 아닌가? 고위 수사분들께서 해결하지 못하자, 결국 성주께서 직접 움직이시기로 하셨다 하네.”

    “오호, 웬만한 일로 꿈쩍도 안 하시는 분께서….”

    “실례가 안 된다면 그 얘기 좀 자세히 들을 수 있겠습니까?”

    준혁은 화기라는 말에 두 사람 앞을 가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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