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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283화 (283/408)

283화. 위선경(僞仙境) (3)

스가아앙-

준혁의 신호에 맞춰 천혈이 조막만 한 손을 살짝 움직이자, 전면의 공간이 통째로 갈라졌다.

그 속도가 감히 눈으로 확인할 수도, 기감으로 느낄 수도 없을 만큼 빨랐기에 거인은 반응하지 못했다.

결국, 단 한 번의 손짓에 거인의 환영이 사선으로 갈라지며 터져나갔다.

콰쾅!

“천혈이라니! 잡스런 능력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그것들의 뒤를 이은 놈이었구나!”

거인이 터져나감에도 거인족 사내는 오직 천혈만을 노려보았다.

‘역시, 상성상 유리하구나.’

준혁은 상대방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손가락의 방향을 바꿔 사내를 가리켰다. 다만 상성이 유리하다고는 하나 힘의 크기는 상대방이 우월했기에 전력을 다했다.

“갈라져라.”

쓰악-

그 순간 천혈이 준혁을 따라 손을 움직였고, 또다시 전면의 공간이 통째로 분리되어 나아갔다.

“감히!!”

준혁의 입에서 ‘언령’이 떨어짐과 거의 동시에 사내도 움직였다. 유적이 부르르 떨며, 벽면에서 삼지행이 급속도로 응축했다.

그리고 천혈로 인해 공간이 찢어지기 시작한 순간, 은푸른 기운이 사내의 앞에 보호막을 만들어냈고, 동시에 터져나갔다.

‘역시, 의지력만큼은 나를 압도할 만큼 빠르다.’

준혁은 상대방과의 수행 차이만큼이나 그가 다루는 힘이 자신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걸 예상하였다.

그런데도 바로 도망가지 않은 이유는 아직 흡수하지 못한 4대 종문의 기운이 남아 있었고, 유적 자체에 담겨있는 거인족의 힘도 탐났기 때문이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이왕 수행이 상승한 거, 남은 힘마저 흡수해 또 한 번 도약의 기회를 마련하고자 함이었다.

한 번 도전해보고 안 되면 그때 도망치면 그만이었기에 도주에 대한 부담 없이 침착하게 상대방을 마주할 수 있었다.

계산하기로 거인족의 잔혼과 직접 부딪친다면 꽤 험난한 상황이 예상되었지만, 어차피 상대는 물리력은 보잘것없는 잔혼.

그가 유적의 힘으로 거인족의 환영과 여러 능력을 조종할 때, 같은 근본을 가진 삼지행을 움직여 조종을 훼방 놓을 작정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수행의 싸움이 아닌 의지력과 정신력의 싸움으로 이어질 테고, 겨우 잔혼 따위를 상대하는 것에 있어 자신감은 충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예상보다 잔혼의 의지력은 더 강대했고, 속도 역시 남달랐다.

천혈을 부림과 동시에 충만하게 모인 삼지행을 이용해 상대방이 유적과의 공명을 끌어내지 못하게 하려던 건 시도조차 하질 못했다.

‘그렇다면 기회를 봐서.’

준혁은 두 번째 공격이 실패하자마자, 적마도를 발동할 준비를 마친 채, 또 한 번 천혈을 움직일 준비를 했다.

파앙-

그사이 물리법칙을 벗어난 듯 사내는 천혈이 일으킨 폭발력을 향해 손을 뻗어 압축했다.

그리고는 살기 어린 눈으로 준혁과 천혈을 노려보다 양손으로 허공에 기괴한 문양을 만들어냈다.

“천혈족 따위가 어떻게 삼지행을 받아들였는지 모르지만, 후회하게 될 것이다. 감히 욕심내선 안 될 힘을 받아들인 것을!”

잔상을 남길 정도로 빠르게 손이 움직여 만들어진 문양은 한 호흡도 지나지 않아서 고대 문자로 바뀌었다.

그리고는 조금 전 압축한 폭발력의 힘을 빌미로 엄청난 영기파동을 퍼트렸다.

팡- 콰르르르-

‘이건!’

영기파동은 평소 접하던 것과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빨랐고, 순식간에 유적 전체를 뒤덮었다.

그 순간, 유적 내부에서 은은하게 흐르던 기운이 폭풍처럼 급류를 타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기를 다룬다고?’

급류를 탄 기는 유형화되며 쇠사슬처럼 변해 사방을 촘촘하게 막아버렸다.

동시에 허공에서 무에서 유가 창조되듯 은푸른 쇠사슬 수백 개가 생성돼 준혁에게 쏟아졌다.

쇄애액-

그 속도가 가히 번개보다 빨랐기에 피하고 말고 할 틈도 없었다.

푹 푸욱 푹푹-

눈 깜짝할 사이 수백 개의 쇠사슬이 준혁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약은 수를 쓰는구나!”

하지만 쇠사슬에 꿰뚫린 준혁을 보고 사내가 불만스럽다는 듯 인상을 썼다.

퍼엉-

잠시 후, 쇠사슬에 꿰뚫린 준혁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게 변하며 터져나갔고, 꽃잎으로 흩어졌다.

그리고는 반대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대단합니다. 기를 실체화하는 건 보았지만, 유형화된 기를 법기처럼 다루다니?”

상대는 기를 유형화시키는 걸 넘어서, 하나의 물체처럼 만들어 사용했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냐면, 의지력이 강해진다면 세상 자체를 조종할 수 있단 뜻이었다.

“멍청한 소리를 하는군, 하긴 네놈 수행엔 상상도 못 할 부림인가?”

사내는 그깟 거 아무것도 아니란 듯 비웃음을 비쳤다.

그 순간 준혁은 사내의 비웃음 너머로 과거의 기억과 함께 의문이 해소됨을 느꼈다.

생각지도 못했던 깨달음의 순간이 갑작스레 찾아오고 말았다.

‘아!! 그래! 그런 것이구나!’

준혁이 처음 중괴를 만났을 때.

그때 거인의 발처럼 생긴 환영 같은 걸 불러낸 중괴가 상대방을 압살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술법의 일종이라 생각했던 그 위력이 사실은 그저 영기를 실체화해 휘두른 것뿐이었다는 걸.

‘의지력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것, 삼선에 이른다는 게 그런 것이었구나!’

무형의 기를 유형의 실체를 가진 무언가로 구현해 내는 능력.

생각만으로 만물을 조종해 원하는 바를 세상에 표출하는 힘.

준혁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경지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도 세상에 의지를 관철해 영역을 만들고 그 공간을 지배하지만,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영역에 펼쳐지는 의지는 엄연히 영기를 기반으로 행해지는 행위였다.

하지만 지금 상대방이 보인 것은 의지가 선행되고 그것이 기를 조물해 실체화하는 능력이었다.

그 차이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것처럼 선행 후행에 관한 것만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영기라는, 혹은 기(氣)라는 세상에 만연한 그것들의 간섭을 배제한 체, 오직 수사의 의지만으로 세상에 간섭할 수 있냐 없냐 하는 문제였다.

쩌적-

그 순간, 내부에서 무언가 깨어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근원지는 원영이 자리하고 있던 단(丹) 이었는데, 지금까지 수행이 오르며 크기와 밀도만 상승하던 단에 금이 가더니 변화를 일으켰다.

스르륵-

그리고 금이 간 단(丹)으로 다섯 빛깔을 가진 기운이 휘몰아치며 모여들었다.

‘오행 신기!’

그것은 하계에서 얻었던 다섯 가지 힘이 하나 된 오행신기. 아직 다룰 수 없다고 여겨 독고제의 힘과 함께 내면 깊은 곳에 강제로 묶어둔 힘이었다.

오행신기는 준혁이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이제 활동할 때가 되었다는 듯 혼자서 반응했고, 단(丹) 속으로 밀려들어 갔다.

‘아아! 의지와 지배, 오행의 실체가 세상과 하나 됨을 알리는 신호였구나!’

단속으로 밀려들어 간 오행신기는 원영까지 변화시키며 강대해졌고, 잠시 후엔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원영의 일부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그러자 원영이 준혁의 신체를 가득 채우는 것처럼 존재감을 드러내더니 어느새 오색빛깔로 빛나는 단 속에 고고한 모습으로 자리했다.

‘끝인가?’

모든 변화가 끝나자, 원영은 변화를 체감하려는 듯 눈을 감고 의지력을 퍼트렸다.

하나의 자아와 같은 원영이 완벽하게 하나의 생명체가 되어 분리되는 것 같은 느낌까지 만들어냈다.

그때 또 다른 변화가 시작되었다.

새로운 단 속에 자리하던 원영은 삼지행을 압축해 그 근원만을 뽑아 하나의 검처럼 만들었고, 그 후엔 식검을 소환했다.

그리고는 달콤한 기운을 퍼트려 천혈을 불러들여 가까이 오게 했다.

잠시 후, 천혈이 영문 모를 표정으로 나타나자.

푸욱-

삼지행으로 만든 검이 천혈의 몸을 관통했고 그 뒤를 식검이 이었다.

슈르륵-

그러자 지금껏 하나의 개체로 준혁의 의지에서 벗어나 있던 천혈이 핏물로 녹듯이 흐물흐물해지더니 원영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아! 그동안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준혁은 독고제가 전해준 천혈족의 천혈은 완전히 독립된 객체라 여기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것을 강제로 흡수할 생각도 못 했고, 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의지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나니 자신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천혈은 독립될 수도, 하나 될 수도 있던 힘.

그저 준혁이 부족했기에 그동안 별개의 의지를 가진 존재로 남아있던 것이었다.

준혁은 천혈이 흡수될 때 독고제의 말을 새삼 떠올릴 수 있었다.

천혈이 과하게 성장하면 잡아먹힐 수도 있다는 말.

그 말을 지금껏 오해하고 있었음을 말이다.

‘나는 천혈을 조심히 성장시키라는 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어! 내 의지를 넘어서게 만들지 말란 뜻이었어! 언젠간 나와 하나 되어야 할 테니!’

잠시 후, 천혈은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원영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그 순간 원영의 눈빛이 핏빛으로 변하며 준혁의 눈빛도 시뻘건 색으로 충혈되었다.

하지만 핏빛으로 물든 원영의 눈은 순식간에 다섯 가지 빛을 내뿜다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후아….”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찰나와도 같아, 마주하고 있던 거인족 사내의 눈엔 그저 준혁의 눈이 새빨개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변화였을 뿐이었다.

“이제 알겠느냐? 네놈이 얼마나 무모한 짓을 벌이려 한 건지? 이건 시작일뿐! 보여주마! 진정한 거인족의 힘을!”

‘이것이 무아의 체험인가?’

준혁은 상대방에겐 찰나에 불과한 시간 동안 수만 번의 번뇌와 생각을 거듭한 것 같은 의식 세계에 돌입한 경험이 말로만 듣던 경지임을 깨달았다.

천혈을 흡수하며 내부적으로 엄청난 변화가 찾아왔지만, 심신이 극도로 차분하고 냉정함이 유지되고 있는 것도 무아를 체험하면서 스스로를 다각도로 바라보고 돌아보았기에 가능한 일이란 것도 말이다.

만약 평범한 깨달음으로 급격한 변화가 찾아왔다면, 전투에 돌입해 있던 상태에서 오히려 독으로 작용했을 것이 분명했다.

‘운이 좋은 것인가?’

누군가는 평생을 고되게 수련해도 닿을 수 없는 순간을 전투 중에 맞이하게 되다니?

준혁은 자신에게 찾아온 행운에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상념마저 날려버릴 수 있었다.

‘아니! 내 선택이 부른 결과일 뿐이다.’

애초에 수행을 올리자마자 비경에서 도망쳤다면 찾아오지 않았을 기회.

운이란 것도 결국은 자신의 선택이 만들어낸 결과였으므로 하늘이니 운명이니 따지는 것도 의미 없다 판단했다.

그사이 거인족 사내가 유적의 호응을 끌어내며 또 한 번 공간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촤르륵-

어느새 공동 전체가 은푸른 색으로 빛남과 동시에 무한히 확장했고, 그 중심엔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거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

“어디 이것도 피할 수 있나 보자!”

사내의 외침엔 자신이 가득했다.

그도 당연한 것이 준혁의 수행은 이제 위선경에 올랐을 뿐인데, 거인이 내뿜는 기운은 어림잡아도 진선경 이상의 무위.

거인의 세 번째 눈이 열리며 삼지행이 쏟아지자, 그 압력만으로도 준혁은 압살당할 것처럼 보였다.

“굳이 피할 필요 있겠습니까?”

하지만 준혁은 쏟아지는 압력에 가볍게 손을 들더니 손가락을 사선으로 움직였다.

오행신기를 받아들이면서 유적이 기운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거인을 유지하고 있는지 전부 파악되고 있었다.

무식하게 거인에 대항할 필요 없이 그 힘의 근원만 파괴하면 될 일.

쓰아악-

스걱-

압력이 준혁을 압사시키기 직전, 유적 내부에 숨겨져 있던 삼지행을 이루는 핵이 반으로 갈라졌다.

동시에 힘을 쏟아내던 거인이 거짓말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련의 일들로 사내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 무렵,

파앗-

준혁이 소리 없이 사내의 등 뒤로 이동한 채 천혈과 동화된 것처럼 핏빛이 뚝뚝 떨어지는 팔을 뻗어 잔혼의 목을 움켜잡았다.

“아직도 제가 멍청해 보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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