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위선경(僞仙境) (2)
50년간 단 1초도 낭비하지 않고, 삼대지력의 근원인 삼지행과 4대 종문 수사들의 기운을 흡수한 준혁.
소천경 중기에 이어 후기를 돌파한 그는, 어느새 수행의 한계로 더는 천혈과 원영 그리고 삼지행이 발전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수많은 고민을 거듭한 그는 결국 한 발을 더 내딛기로 했고, 기나긴 준비 끝에 하늘의 호응을 불러들였다.
작은 하늘이라 불리는 소천경부터는 수행자가 원할 때 언제든 영기 반응을 끌어내 수행 상승을 도모할 수 있었다.
다만 준비된 자가 아니라면 겁(劫)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오히려 붕괴하고 만다.
그러므로 준비에 준비를 거듭하더라도 소천경 이후의 경지는 한 발 한 발이 살얼음판이나 다름없었다.
앞으로 수만 년에 가까운 삶을 살 수 있을 그들이.
진선을 넘어선다면 영생할 수 있을 그들이 자칫 잘못하면 소멸에 이를 수가 있었으니, 화신기까지의 수행 상승과는 차원이 다른 무게가 있었다.
"오라!!"
그런 마음가짐이 가득 담긴 외침이 준혁의 입에서 터져 나오자, 마치 알겠다는 듯 상공에 뭉쳐있던 영기구름이 회오리치다 하강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정수리였다.
회오리치며 하강하던 영기구름이 극도로 세밀하게 압축하더니 정수리를 통해 몸을 파고들었다.
정수리를 통과한 기운은 곧장 단으로 치달았고, 그 안에 이를 악물고 대기하고 있던 원영으로 흡수되었다.
그리고는 원영의 정제를 거친 후, 심장으로 치솟아 올라갔고, 심장의 박동과 함께 온몸으로 퍼져 몸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하지만 이미 준혁의 몸은 삼지행과 천혈, 그리고 각종 혈맥의 힘 등으로 포화에 이른 상태.
몸에 쌓여야 할 영기가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더니 몸속에서 확장할 곳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쿵-쿵-쿵!
마침내, 포화에 포화를 거듭한 준혁의 몸이 오색 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더니 변화를 일으켰다.
화악-
동시에 정수리를 통해 흡수되던 기운이 점차 늘어나더니, 시간을 거듭할수록 그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그러자 원영은 환희에 찬 것처럼 두 손을 활짝 벌려 영기를 무한정 흡수하기 시작했고, 그 옆에선 천혈도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점차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 했던가?
고도로 압축된 영기구름을 무한정 흡수하며 수행의 벽을 돌파하던 준혁은 흡수하던 기운 속 이상을 발견했다.
‘삼대지력이 포함되어있다!’
순수한 영기만이 모여들어야 하는데, 그 안엔 불순물처럼 삼대지력이 섞여 있었다.
‘아! 비경에 있던 그것들이 전부 끌려온 것이구나!’
준혁은 곧바로 그 이유를 유추해 낼 수 있었다.
허나 유추로 끝낼 문제가 아니었다.
수행 상승을 유도하는 일에 불순물이 끼어들면 위험할 수 있는 일. 아니 명백하게 위험한 일.
만약 준혁이 거인족이었다고 해도 수행 상승 도중엔 삼대지력이라는 불순물이 도움이 되진 않았다.
하물며 인족의 몸으로 천혈족의 근원과 혈맥의 힘을 대량 가지고 있던 준혁에겐?
걱정은 금세 현실이 되어 최악의 반응을 일으켰다.
"으윽!"
영기구름에 섞여 불순물처럼 몰래 들어온 삼대지력은 수행 상승이라는 목적에 부합되지 않게, 몸속 삼지행과 만나며 변화를 일으켰다.
그 순간 균형이 깨지며 준혁의 몸이 폭발하기 직전의 공처럼 울퉁불퉁 괴기하게 뒤틀렸다.
‘이런!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구나! 잡지 못하면 붕괴한다!’
수행 상승 실패의 걱정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될 수 있었다.
수행 상승이 중간에서 깨져버린다면 겁의 무게가 짓누르기 시작할 테고, 최악의 경우엔 소멸에 이를 수 있는 일.
준혁은 영기구름 속 삼대지력이 삼지행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극도의 집중력으로 관찰하며 원영을 움직였다.
‘가라! 가서 저것들을 제어해!’
원영으로 직접 기운을 억제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물론 그럼으로써 수행의 완벽함에 흠이 될 순 있겠으나, 그런 걱정은 당장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원영이 새롭게 융합하는 삼지행을 억제하려는 찰나,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준혁은 얼떨떨해야만 했다.
영기를 미친 듯이 먹어 치우며 성장하던 천혈이 삼지행의 반응에 혼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
‘후우우…. 끝난 건가?’
얼마나 긴 시간을 집중했는지 가늠도 할 수 없었다.
찰나라면 찰나라고 말할 수 있겠고, 영원 같았다면 영원 같았다고 말할 수 있을 느낌.
천혈이 삼지행의 융합에 반응해 움직인 사이, 준혁의 원영은 혼자서 모든 영기를 받아들이며 결국 위선경을 돌파하고 말았다.
그리고 위선경을 돌파한 순간, 계속해서 밀려 들어오는 영기구름 속 삼대지력은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렸다.
‘어? 이게 무슨?’
위선경에 이른 순간, 마치 예약이라도 해놓은 것처럼 영역이 발동되며 영역 분신들이 나타났고, 분신들이 사방에서 준혁을 둘러싸더니 수행 상승과 안정을 돕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방을 둘러싼 영역분신은 각각 백호, 청룡, 현무 그리고 주작의 외형을 하고 있었는데 위선경에 이름과 동시에 극도로 강대해진 혈맥의 힘이 반응한 것처럼 보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다니.’
그 현상에 준혁은 너무 놀라고 말았다.
순간적인 동요로 마음의 균형이 깨질뻔하기까지 했다.
기본적으로 위선경에 오르면 사용할 수 있는 영역 분신은 겨우 한 명.
그 후 대천경에 오른 후 두 배가 되고, 다시 수행이 오를 때 두 배가 되었다.
비경에 입장한 후 중괴의 전투를 감상하고 그의 영역 분신이 4명인 것을 보고, 그의 경지를 예상한 것도 그런 공식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위선경에 오르자마자 네 명의 영역분신을 만들어냈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게다가 위선경에 오른 뒤에도 영역분신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수사들이 있었으니, 그야말로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만약 다른 이에게 전한다면 허풍쟁이라는 별명을 달고 살아야 할 정도였다.
‘그나저나 왜?’
영역분신을 제외하고서도 준혁이 가져야 할 의문이 하나 더 있었다.
그건 바로 수행이 오름과 동시에 각종 능력이 스스로 해금되며 발동된 것.
물론 누구에게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사용할 수 있는 건 맞지만, 그것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준혁의 경우는 매우 특이한 것이었다.
"아!!"
그때 준혁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독고제가 천혈을 넘겨주며 심어주었던 잔혼의 힘.
그가 도움이 될 거라며 넘겨주었었지만, 그 당시 수행도 낮고 의심의 여지가 있어 내면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그것.
그것이 천혈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동시에 수행이 극도로 올라가자 스스로 해금되며 각종 능력을 저절로 깨달아 사용하게 된 것이었다.
‘일찍 열어보지 않아 다행이었구나!’
동시에 뇌리로 강렬하게 박히는 생각이 있었다.
독고제가 자신에게 부탁했던 천혈족의 영광.
그것에 대한 갈망이 마치 준혁의 감정인 것처럼 뇌리에 박히려고 했다.
‘사라져라!’
하지만 그 당시 연형기에 불과한 수행이었다면 모를까, 지금의 준혁에겐 크게 위험이 될 수준은 아니었다.
‘역시 의식을 통해 무언가를 남겨주는 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뜻을 강제하려 하는구나. 그래봐야 무엇이 남는다고 쯧.’
마지막 남은 잔혼까지 사라진 독고제는 말 그대로 무(無)였다. 천혈족의 영광이 재현되든 아니든 아무것도 느낄 수 없고 확인할 수도 없는 일.
준혁은 씁쓸함에 속으로 혀를 찬 후, 다시 내면과 자신의 수행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영기구름의 기운을 전부 소화한 후 수행을 안정시켜야 할 때였다.
***
번쩍-
준혁이 눈을 뜨자 유적 내부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감각이 한차례 상승해서인지, 이전까지와는 또 다른 위험과 기류가 눈에 보였다.
삼지행을 천혈의 존재만큼이나 쌓았기 때문인지, 유적 내부 기운의 흐름까지 눈에 읽힐 정도였다.
그리고 숨어있는 잔혼까지.
준혁은 잔혼이 숨어있는 벽면을 한참 동안 응시하다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벽보다는 바깥이 편하지 않겠습니까?"
스르륵-
준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적의 벽면에서 검은 머리칼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는 살짝 흐릿한 모습이었는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준혁을 살피다가 입가에 싱그러운 웃음을 띠고 입을 열었다.
"오호라, 나를 느꼈다고? 이곳과 하나 된 나를?"
사내는 신기한 듯 연신 감탄을 내뱉다가 손을 살짝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흐릿했던 몸체가 점점 선명해지며 완전한 형태를 갖추었다.
"이런 게 가능할 거라 상상도 못 했다. 영기가 척박한 비경 내에서 수행을 상승시키다니."
정확히는 비경의 공간적 한계 때문에 끌어올 수 있는 영기의 양이 한정적이란 것이 맞는 말이었다.
"수사께서 도움을 주셨지 않습니까?"
"도움? 내가 말이냐?"
사내가 몇 걸음 다가오며 고개를 갸웃하자, 준혁이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이곳의 삼지행을 제 몸에 주입해준 걸 말하는 겁니다."
"오호라, 그것까지 알고 있었다니. 게다가 의식까지 또렷이 남아있고 말이야. 넌 도대체 뭐지? 인족처럼 보이는데…. 인족 따위가 이 많은 힘을 흡수하고도 제 의식을 유지하고 있다니 말이야. 정말 신기하군."
다가오는 사내의 발걸음에 맞춰 준혁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하지만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수사의 의도가 순수하지 않았으니 그래도 괜찮겠지요?"
"뭐? 하하하. 오랜만에 만난, 아니 처음이라고 해야 할까? 처음으로 쓸 만한 몸뚱이를 발견했다 했더니, 재밌는 녀석이 걸려들었어. 그래. 굳이 인사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 어차피 우린 하나 될 텐데."
어느새 열 걸음 앞까지 다가온 사내는 맛있는 먹잇감을 앞에 둔 사자처럼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는 은은한 기세를 흘려 준혁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 기세가 중괴에게 뒤처지지 않을 정도라 준혁은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잔혼만 남은 게 아니었다면,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했을지도….’
기감을 이용해 노골적으로 사내를 훑은 준혁은 상대가 물리력이 남지 않은 잔혼임에 안심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에 수행 상승이 끝나자마자 도망치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피식 웃고는 그를 도발했다.
"하나가 된다 말씀하셨습니까? 혹 남은 힘마저 저에게 바치겠다 그 말입니까?"
"뭐라? 허."
준혁의 도발에 한껏 기세를 흘리던 사내가 잠시간 말을 잊고 말았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는 준혁을 미친놈 바라보듯 응시했다.
"조금 전 말은 취소다. 하긴 의식이 멀쩡할 리는 없지. 완전히 맛이 간 것 같으니 네놈 의식을 깔끔히 소거해주도록 하마."
싸늘하게, 하지만 살짝 분노에 찬 듯 사내는 입술을 비죽였다.
그리고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양손을 옆으로 활짝 펼쳤다.
파앙-
그러자 그의 등 뒤로 3m가 넘는 거인이 나타났다.
거인은 처음 봤을 때와 사뭇 달랐는데, 한쪽 팔은 얼음처럼 차가운 푸른빛을 띠고 있었고, 반대 팔은 용암처럼 시뻘겠다.
두 눈에서는 은푸른 빛이 나는 걸 보면 처음부터 삼지행을 제대로 사용할 생각인 듯 보였다.
"이거 무서워서야 원. 그럼 저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거인이 전투태세를 갖추기도 전.
어느새 준혁의 머리 위로 거인과 비교하기도 민망한 주먹만 한 핏빛 인형이 나타나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천혈!!!"
그리고 사내가 놀라움에 인형의 존재를 부르짖은 그 순간.
"갈라져라!"
준혁이 움직였다.
아니, 공간이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