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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281화 (281/408)
  • 281화. 위선경(僞仙境) (1)

    거인에게서 뻗어 나온 은푸른 기운에 황홀감에 빠진 지 얼마나 지났을까?

    한없이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며 삼대지력의 근원을 마음껏 향유하던 준혁은 시뻘건 기운을 마주치고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

    시뻘건 기운은 금세 인형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내면을 가득 채우던 은푸른 기운들을 계속해서 소멸시키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당장 비키거라!’

    황홀감이 깨지자, 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내면의 시뻘건 기운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가자, 시뻘건 기운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아! 천혈이 내 정신을 일깨운 것이구나!’

    시뻘건 기운이 연속으로 은푸른 기운을 소멸시키며 곳곳에 충격을 주자, 은푸른 기운에 잠식되고 있던 원영이 깨어났다.

    그와 동시에 정신이 맑게 돌아오며 자신의 상태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잠깐이지만 의식이 통제되고 있었다니!’

    삼대지력으로 인한 황홀감이라고 여겼지만 실제로는 자아가 점점 축소되며 혼백이 지워지고 있던 현상이었다.

    아마 다른 이들이었다면 자신이 어떻게 당하는지도 눈치채지 못하고 결국 자아를 잃었겠지만, 준혁은 명혼단으로 누구보다 강한 혼백을 가지고 있었고 그 덕에 천혈이 정신을 일깨워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진정 큰일 날 뻔했구나, 헌데 왜? 설마 이것도 시험의 일종인가?’

    외부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거인의 힘에 노출된 순간 의식을 잃었다.

    만약 이곳이 원래의 예측대로 시험장이 맞다면 이것 역시 시험의 일종이란 말이었다.

    삼대지력을 몸에 담을 수 있는지, 아니면 그것의 침식을 이겨내고 조종할 수 있는지를 말이다.

    그때, 의식이 깨어나며 외부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뭐? 기다림? 삼지행? 하나가 된다고? 좀 더 익기를 기다렸다가 영광을 재현하자고?’

    의식을 되찾은 준혁은 모두가 죽고 난 후 공동에 나타난 사내를 느낄 수 있었고, 그가 하는 말들을 엿듣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

    ‘중괴 어르신, 당신의 예상은 틀렸습니다.’

    비석에 적힌 거문을 읽고 무언가 확신에 차 있었던 중괴.

    그의 예상과 다르게 모든 건 함정이었다.

    이곳 비경은 거인족이 선계 곳곳에 마련해놓은 함정 중 하나였고, 함정의 목적은 삼지행이라 불리는 삼대지력의 정수를 견딜 신체를 찾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보물을 노리고 들어오는 자는 비경 속 유적의 제물이 되고 말이지.’

    삼지행을 익히는 데 적합한 신체가 나타나면 유적에 모여있던 정수가 반응하고, 최후에는 막대한 삼지행을 가진 거인족의 신체로 거듭나는 것이었다.

    그 후엔 잔혼이 그 신체와 하나되 거인족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

    그게 비경 속 유적의 목적이었다.

    잠들어있던 시간이 지루했던 건지, 거인족의 잔혼으로 의심되는 사내의 주절거림에 준혁은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탑 외부 세 기운의 대지,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탑과 반응해 삼지행을 만들어내는 것이겠지.’

    삼각 방사형으로 나뉘어 있던 비경의 경관을 떠올리니 새삼 소름이 돋았다.

    사내가 사라진 후, 준혁은 자신의 처지를 객관적으로 돌아보았다.

    처음엔 사내가 사라지자마자 적마도로 탈출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천혈만큼이나 귀한 삼지행이 쉬지 않고 유입되고 있는 상황이 나쁘지만은 않아 두고 보기로 했다.

    거인족이 이곳을 신체 제조실로 만들어 어마무시한 기운을 강제로 주입하도록 해놨으니, 그것들을 주는 대로 넙죽 받아먹을 작정이었다.

    다만 쉬지 않고 몸속으로 들어오는 삼지행 때문에 준혁은 고민이 생겨났다.

    ‘문제는 천혈인가.’

    삼지행을 통제해 제어하려 노력하는 원영과 다르게, 천혈은 몸속 곳곳을 누비며 삼지행을 소멸시키는 중이었다.

    그 과정에서 준혁의 영력이 심각하게 소비되었다.

    ‘이걸 어찌해야 하는가.’

    천혈을 말리자니 삼지행의 힘과 반비례해 천혈 고유의 근본이 희미해져 가는 듯했고,

    그렇다고 그냥 두고 보자니 소멸해버리는 삼지행이 아까웠다.

    ‘흐음….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한데….’

    준혁이 독고제에게 천혈을 넘겨받았을 때, 천혈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키운다면 위험하다고 경고를 들었었다.

    그랬기에 지금까지 최소한의 먹이만 주며 성장을 억제했었다. 물론 천혈의 존재가 외부로 드러나는 걸 꺼려 아예 배제한 경향도 있었고.

    하지만 천혈을 억제할 삼지행이란 힘이 생긴 이상, 제한을 풀어도 괜찮겠단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적당한 먹이도 있고 말이야.’

    사내가 사라진 뒤, 유적으로 서서히 흡수되고 있는 4대 종문 수사들의 기운.

    수사가 죽고 나면 세상으로 흩어졌어야 할 기운들이 마치 생명력으로 똘똘 뭉친 듯 유적 곳곳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만약 그 힘을 흡수해 천혈을 키움과 동시에, 유적에서 흡수되는 삼지행을 완벽히 제어한다면?

    ‘한번 시도해보자. 그리고 잘못되면 튀면 되지.’

    결심을 굳히자, 준혁을 감싸고 있던 육각 타일 보호막에서 금빛 실이 소리 없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유일하게 걱정되는 건 모습을 감춘 거인족의 잔혼이 다시 나타나는 것이었지만, 왠지 사달이 나기 전까진 안전할 거라 생각되었다.

    그리고 나타난다 해도 딱히 걱정까진 없었다.

    어느새 소환된 적마도가 준혁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

    호란대륙 상공.

    천운대륙으로 넘어가는 관문이나 다름없는 명규성으로 향하는 길목.

    노인 한 명이 빛 꼬리를 남기며 엄청난 속도로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슈아앙-

    거인족의 비경에서 강제로 쫓겨난 중괴는 자신을 기습한 준혁의 행동에 분노를 터트리고 말았다.

    자신을 공격했다는 이유 때문이 아닌, 안전을 도모하지 않고 자신을 탈출시켰다는 이유였다.

    탈출은 약속돼 있던 것이니, 최소한 자신이 주변을 안정시키고, 거신체로부터 안전을 도모한 후에 행했어야 할 일이었으니까.

    "이런 빌어먹을!"

    비경에서 쫓겨난 중괴는 고규마에게서 얻은 방법으로 다시 입장하려 수십 번 도전하다가 실패했다.

    마치 생명체의 접근 자체를 막겠다는 듯, 처음과 달리 그 어떤 간섭도 불가능했다.

    그 후 중괴가 행한 것이 괴조에게 연락을 취하는 것이었다.

    마선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괴조라면 유적에 혼자 남은 인족 꼬맹이의 생존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놈은 또 왜 이래!"

    하지만, 무슨 일인지 괴조가 묵묵부답 말이 없었고, 중괴는 할 수 없이 그에게 가려고 움직이는 중이었다.

    하지만 비행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파앗-

    손안에 꽉 쥐고 있던 적마도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살아있었구나!!"

    중괴는 손에 쥐고 있던 적마도가 사라지자 음속을 뚫으며 날아가던 비행을 멈췄다.

    그리고는 빠르게 벗어났던 비경 쪽을 바라보다가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살아있음을 확인했으니 당장 괴조에게 갈 필욘 없겠구나. 그렇다면…. 흐음."

    자신의 수행으로도 힘겨울 것 같았던 거인의 공격을 준혁이 막아내고,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이라면 더는 생존 여부를 걱정하진 않아도 된다는 말.

    "숨겨둔 수가 있었다면 미리 말했어야지 에잉."

    중괴는 한참 동안 투덜거리더니 이윽고 고민에 빠져들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르나, 꼭 살아서 나와야 한다. 네놈이 해야 할 일이 있단 말이다! 죽는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테다!"

    그러길 한참, 인상을 찌푸리더니 나머지 일행이 머물고 있는 장소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

    고요한 유적 내부.

    준혁이 의식을 조종당하는 척, 무식하게 유적의 삼지행을 흡수하며, 동시에 4대 종문 수사들의 기운을 흡수하길 10년.

    삼지행과 천혈을 완벽히 분리해 힘을 키우기 시작하자 그 속도는 가히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다.

    소천경에 이른 수사가 한 단계 한 단계 점진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수백 년에서 수천 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한 법인데, 준혁은 그런 상식을 완전히 뭉개버리고 있었다.

    유적에 들어서기 전 보았듯이, 탑 외부에 존재하던 삼대지력의 힘은 감히 가늠할 수 없었고,

    유적 내부에 존재하는 수사들의 기운도 감히 계산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쩌면 당연한 건가?’

    이곳에 방문했던 4대 종문의 각 대표만 해도 전부 대천경 수사.

    4대 종문 수사의 기운이 유적으로 천천히 흡수되고 있다고는 하나, 유적 내부에 남아있는 기운은 최소한 대천경 수사 넷의 총량을 넘었다.

    그것을 소천경에 불과한 준혁이 고스란히 뽑아가고 있었으니 성장 속도는 말로 다 하지 못할 정도였다.

    거기다 기운을 흡수해 천혈에게 옮기는 과정에서 혈단법을 운용한 준혁의 원영 역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기운을 계속해서 먹어 치웠다.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혈단법으로 모은 기운은 원영을 거친 후 준혁의 본체에 전달됐고 그 후에 천혈에게 배분되었으니 말이다.

    그로 인한 원영의 성장은 필수 불가결한 사항이었다.

    ‘초기를 넘어선 건가?’

    어느덧 갓 소천경을 넘었던 수행은 한차례 벽이 깨지며 중기에 들어서고 있었다.

    준혁이 예상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삼지행을 받아들이며 거인족의 근원이 강력해지면 천혈의 성장이 가속화될 건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했던 일.

    하지만, 그로 인해 자극을 받은 사신들의 혈맥과 그 외 잡다한 혈맥까지 덩달아 요동을 치며 점점 진해진다는 것이었다.

    그건 마치, 거대한 와류에 휩쓸려 존재감을 잃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진화시키는 것 같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준혁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어느새 그의 머리 위엔 삼지창이 솟은 것같이 뾰족한 첨탑이 여럿 새겨진 왕관이 흐릿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만약 근처에 용각족이 있었다면, 왕관에서 뿜어지는 위엄에 스스로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 오체투지 했을 법한 그런 외형이었다.

    다만 아직은 매우 흐렸다.

    ***

    50년이란 시간은 얼마나 긴 시간일까?

    100여 살 가까이 사는 범인들에겐 반평생이라 할 만했지만, 수도자들에겐 눈 깜짝할 시간이기도 했다.

    눈 깜짝할 시간이 지나자 조용하던 비경 내부에 변화가 찾아왔다.

    콰과쾅!

    비경 곳곳에서 뇌전이 치며 영기가 휘몰아 한곳으로 운집했다.

    그렇게 모인 영기는 원래의 푸른빛을 벗어나 점점 진해졌고, 응축하고 응축할수록 먹색을 띠더니, 어느새 진한 흑회색으로 변해갔다.

    콰르릉!!

    흑회색으로 뭉친 영기는 점차 규모를 키워가더니 어느새 비경을 가득 메웠다.

    그렇게 비경을 메운 영기구름은 자신의 몸집에 만족을 못 한 건지, 성난 듯 외부로 확장하려 애썼다.

    하지만 비경이라는 공간적 한계 때문일까?

    대기 중 영기가 전부 뭉쳐 들며 비경을 가득 채우자, 다음으로 대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냉기와 열기 그리고 그 중간쯤의 기운이 가득한 대지는 영기구름과 반응하더니 각각 상이한 기운을 방출했다.

    그리고는 영기구름과 만나 변화를 일으켰다.

    콰쾅! 쾅!

    그제야 영기구름은 만족한다는 듯 파괴를 멈췄고, 세 가지 기운을 무한히 흡수하더니 오색 무지개를 방출했다.

    솨아아-

    오색 무지개는 영롱하다 못해 신비롭기까지 했는데, 상서로움이 가득해 감히 쳐다보기만 해도 가슴이 떨릴 지경이었다.

    그 순간,

    쿠오오옹-

    오색 무지개를 신호로 극도로 압축된 흑회색 영기구름이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회오리의 중심이 천천히 하강하더니 비경 중심에 위치한 탑으로 떨어져 내렸다.

    직후, 영기구름의 회오리가 탑 속으로 스며들다 무언가와 맞닿은 순간.

    번쩍-

    콰르르릉-

    비경 전체가 울부짖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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