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거인의 흔적 (2)
-이곳이군요.
-그래, 문을 열 테니 잠시만 기다리거라.
준혁은 기감으로만 느껴지는 중괴에게 전음을 보내고 눈앞의 장관을 두 눈에 담았다.
협곡 아래 파인 절벽으로 수백 미터를 이동하자 나타난 거대한 석문.
원래는 결계로 보호되고 있었는지, 석문 주위엔 알아보기 힘든 문양이 잔뜩 새겨져 있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석문을 둘러싼 팔찌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전체적인 형태는 준혁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공천령이 문신으로 변한 모습과 거의 같았다.
‘설마 진정 공천귀가 머물렀던 장소란 말인가?’
직감은 그럴 리 없다고 신호를 보냈는데, 눈앞에 보이는 현실은 분명 공천귀와 연관이 있어 보였다.
도착하기 전 중괴에게 듣기로 공천귀는 어디에도 자신의 거처를 둔 적이 없는 친구이기에, 만약 그의 흔적이 진짜라면 보물을 숨겨둔 장소일지도 모른다고 말했었다.
‘흠.’
중괴가 문을 열기 위해 고규마에게 강탈해온 물건을 발동시키는 동안, 준혁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자신의 손목을 쓰다듬으며 석문에 새겨진 문양 하나하나를 세심히 살폈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화악-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석문에서 엄청난 영기파동이 퍼지자 중괴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가자. 열렸다.
말을 남긴 중괴는 석문을 향해 날아갔고, 마치 환영을 통과하듯 아무런 방해 없이 벽을 뚫고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준혁은 삼청조 한 마리를 만들어내 협곡 안쪽으로 날려 보낸 후, 중괴의 뒤를 따랐다.
‘최소한의 준비는 해야겠지.’
중괴의 태도로 보자면, 자신이 위험에 처했을 때 모른척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게 의도대로 흘러가지는 않는 법.
혹시나 중괴마저 어쩌지 못하는 불가항력의 상황이 왔을 때, 스스로 살 방도를 마련해야 했기에 행한 행동이었다.
***
‘이건?’
중괴를 따라 비경 안으로 들어선 준혁은 감탄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마터면 기척을 감추기 위해 모습을 감춘 것마저 의미 없게, 육성을 낼 뻔했다.
비경 안, 이동되어온 곳은 평범한 땅이 아닌 하늘 위.
‘정말 신기하구나.’
하지만 준혁이 놀란 건 바닥이 아닌 허공으로 이동돼서가 아니었다.
멀리, 시야 아래로 거대한 탑처럼 생긴 구조물이 보였고, 탑을 중심으로 완전히 얼어붙은 하얀 대지와 용암이 고여있는 듯한 불타는 대지, 그리고 단단한 대리석처럼 하얀 대지가 정확히 삼각구도로 방사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이하게도 세 기운은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있었는데, 냉기와 화기, 그리고 은연중 무영기와 비슷한 백기(白氣)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마치,
‘삼대지력이 균형을 이룬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자신이 흡수한 삼대지력의 조화를 표현한 것 같은 비경의 모습이었다.
준혁과 다른 의미로 중괴 역시 무언가 깨달은 듯 생각에 잠긴 듯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길 한참 후.
보이지 않던 중괴의 모습이 준혁에게만 투영돼 나타났다.
-나를 따라오거라.
그리고는 아래로 천천히 하강하는가 싶더니, 점점 속도를 내 비경 안에 자리한 탑 가까이 다가갔다.
준혁 역시 중괴를 따라 움직였고,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탑의 입구로 보이는 작은 석문을 마주하게 되었다.
중괴는 무엇이 그리 신경 쓰이는지 삼각 방사형으로 나눠진 세 가지 기운에 연신 인상을 쓰다가 손을 석문 위에 가져갔다.
그러자 석문이 중괴를 빨아들이듯 집어삼켜 버렸다.
쑤욱-
-석문에 영력을 주입해 보거라.
잠시 후, 안에서부터 중괴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준혁 역시 같은 모습으로 탑 내부로 사라졌다.
***
-흐음…. 아무래도 공천귀의 거처는 아닌 것 같구나.
준혁이 탑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중괴는 모습을 드러낸 채 내부 벽면에 새겨진 글을 읽는 중이었다.
‘아! 내 모습도.’
중괴의 모습을 확인하던 준혁은 자신이 모습을 감춘 술법도 자동으로 해제되었음을 인지했다.
그리고는 내부를 둘러보는데, 내부는 아무 장식도 특별함도 느껴지지 않는, 사각으로 이루어진 석실이었다.
다만 엄청난 크기를 지닌 점이 조금 특이했다.
"이리 와보거라."
벽면 한쪽의 글을 읽던 중괴는 모습을 감추는 건 의미 없다고 여긴 것인지 육성으로 준혁을 불렀다.
"공천귀의 거처가 아닙니까?"
"쯧, 거문(巨文)을 배우지 않은 것이냐?"
뜻밖의 질문에 준혁이 의문을 표하자, 중괴가 신기한 동물을 본다는 눈으로 응시하다 고개를 벽으로 돌렸다.
"네놈은 정말 특이하구나, 수행과 지식이 전혀 어울리지 않아. 마치 누가 강제로 수행을 올려놓은 것만 같이 말이야. 아무튼 시간이 난다면 거문은 꼭 배우도록 하거라. 술법을 사용하는 인족이라면 특히나 더."
"명심하겠습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거문은 오래전 거인족이 인족에게 처음 영근을 심을 때 만든 문자다. 문자 하나하나가 주술로 이루어져 있어, 그것들이 해석되면서 수많은 술법이 퍼진 것이지."
"아…."
"쉽게 말하자면 영근을 심으면서 그걸 이용할 방법을 남긴 것이지."
거인족과 천혈족에 대해 들었음에도 알지 못했던 비사에 준혁은 귀를 쫑긋 세웠다.
‘하긴 독고제는 거인족들을 그저 하찮게 여기기만 했었지. 그러니 그들이 남긴 것들에 관심을 가질 리도 없지.’
"뭐 이건 후일 네놈이 스스로 터득하도록 하고, 여기에 쓰인 것을 보면 우리의 예상이 틀린 듯하다."
"??"
준혁이 다음 설명을 기다리는 듯 보이자, 중괴가 피식 웃고는 손가락으로 벽면의 상부를 가리켰다.
"거신(巨神)의 심장을 기억하라."
"설마."
"그래. 이곳은 공천귀의 거처가 아닌, 고대 거인족의 유적이다."
‘거인족의 유적이라니? 그렇다면 공천귀의 거처보다 더 가치 있는 것 아닌가?’
준혁은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벽면에 새겨진 글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중괴의 말마따나 거인족은 인족 수사의 시초 혹은 근원이라 부를 만했다. 그렇다는 건 이곳에서 무얼 얻든 그것이 평범한 것은 아닐 거란 뜻과도 같았다.
잠시 후 중괴가 이해한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그래. 생각지도 못한 행운을 잡은 것 같기도 하네. 거인족이라니. 게다가 네놈에겐 특별하겠어."
"특별이라니? 무슨 뜻입니까?"
벽면 가득한 거문을 머릿속에 강제로 쑤셔 박고 있던 준혁은 중괴의 말에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중괴가 사악하게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정말 그것도 모르는 것이더냐?"
"가르침을 주십시오."
"허, 참나. 네놈이 사용하는 월광지력. 그 근원이 어딘지도 모른단 말이냐?"
"설마, 거인족의 힘이란 말입니까?"
준혁의 말에 중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치 정말 신기한 생명체를 봤다는 듯이.
"인족에게 영근을 심고 술법을 전해 준 거인족이 그들에게 유일하게 전해 주지 못한 것. 그게 바로 삼대지력을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런 삼대지력을 몸에 담기 위해 탄생한 것이 공법이고 말이다."
"......"
"물론 공법이란 게 처음 의도와 다르게 각각 개체에 맞는 방식으로 변해갔지만, 그 시초는 내가 말한 것이 맞다."
"아!"
그제야 준혁은 얼마 전 삼대지력이 하나 되는 이상 현상을 겪을 때, 천혈과 혈맥의 힘이 융합과정에서 모조리 배척되었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정혈과 암흑마기만이 삼대지력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애썼던 게, 가장 적합한 방법이기 때문이 아닌,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융합과정에 겁을 먹고 도망친 것이었어!’
천혈족의 근원이나 다름없는 천혈이 삼대지력이 하나 되는 것에 본능적으로 거부 반응을 나타낸 것이었다.
생각을 이어가던 준혁은 문득 소름 돋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 어떻게 내가 이것들을 몸에 담을 수 있단 말인가?’
독고제의 말에 따르면 준혁이 혈맥의 힘과 천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천혈족의 적통한 후인이기 때문.
그렇단 말은 거인족의 힘은 오히려 배척해야 함이 옳았다.
하지만 현실은 거인족의 근원이라는 삼대지력을 한 몸에 담고 있고, 거기다 그것을 하나로 엮는 기현상까지 만들어 내버린 것.
‘설마? 식아 때문인가?’
마선들을 흡수하기 위해 만든 식아가 이상 현상을 초래한 것인가?
준혁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머리가 아파져 옴을 느꼈다.
그때, 준혁이 혼자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 중괴가 말을 걸었다.
"왜 그러느냐? 조사하고 싶으냐?"
"그게 무슨…."
‘아! 이곳이 공천귀의 거처가 아니니 이곳에 머물 이유가 없구나.’
준혁의 예상대로 중괴는 들어섰던 입구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거인족의 유적이라니 궁금하긴 하다만, 공천귀의 거처가 아닌 이상 굳이 마찰을 빚을 필요 없겠지."
몸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중괴는 4대 종문과 얽히기 싫다는 뜻을 은연중 내비쳤다.
자신의 눈을 찾는 게 아닌 이상, 굳이 움직일 이유가 없는 듯했다.
그리고 그건 준혁 역시 마찬가지.
거인족이 이곳에 남긴 게 무엇인지, 자신의 몸 안에 담긴 삼대지력이 왜 이상 현상을 보였는지, 어쩌면 이곳에서 알 수도 있었지만 당장은 급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준혁의 태도가 겉으로 드러나자, 당장이라도 입구로 나가려던 중괴가 오히려 멈칫했다.
"정말 이대로 나가도 되겠느냐?"
"물론입니다. 어르신 말씀대로 굳이 마찰을 일으킬 필욘 없겠지요. 거인족이 남긴 것이 무엇인지는 저 역시 궁금하긴 하나, 위험을 무릅쓸 정돈 아닌 것 같습니다. 애초에 저희가 이곳에 온 이유는 무리해서라도 어르신의 눈을 찾기 위해서 아니었습니까? 그러니 그냥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흐음…. 좋다. 네놈이 그리 말한다면야…."
중괴는 준혁의 반응을 보고 다른 제안을 하려 했는지, 조금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고갤 끄덕였다.
쿠르릉-
그 순간, 두 사람의 의견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유적 전체가 괴이한 파동과 함께 진동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입구인 석문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젠장할."
그리고 그 이율 어렴풋이 짐작한 듯 중괴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어르신?"
"아무래도 일이 터진 모양이구나."
"일이라뇨?"
"뭐겠느냐? 먼저 들어간 놈들이 손대선 안 될 걸 건드렸거나, 결계를 강제로 부수려다 사달이 난 것이겠지."
‘아! 그때처럼.’
중괴의 말에 준혁은 불타는 사막에서 면교만이 발굴하려던 유적을 적마도로 휘저은 일이 떠올랐다.
여러 결계로 보호되던 유적을 적마도로 휘젓고 다니자, 각종 보호장치가 격발됐고, 나중엔 감당하기 힘든 괴생명체까지 나타나 겨우 도망쳤던 일.
아마 4대 종문의 수사들도 유적을 적법한 방법으로 하나씩 파헤쳐가는 게 아닌, 강제로 문을 열려다 일이 터진 게 틀림없었다.
"그나저나 이걸 어쩌나."
중괴는 사라져 버린 입구를 바라보다 입맛이 쓴지 연신 입술을 쩝쩝거렸다.
유적 자체가 특수한 반응으로 문을 닫아버린 이상, 문이 스스로 나타나길 기다리거나 문제를 해결해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밖에 없는 상황.
"곤란하게 되셨군요."
준혁이 안타깝다는 듯 말을 꺼내자, 중괴가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나에게만 해당하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너 역시 갇, 젠장."
중괴 앞. 준혁은 어느새 핏빛처럼 붉은 검을 꺼내 들고 있었다.
"저에겐 적마도가 있지 않습니까?"
"썩을 놈."
썩어가는 중괴를 보며 준혁이 적마도를 내밀었다.
"혹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도와드릴 의향이 있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