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거인의 흔적 (1)
구름이 손톱만 하게 보이는 하늘 높은 곳.
지직- 파앗-
공간이 찢어지며 100여 미터가 넘는 전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 보호막으로 둘러싸인 전함은 모습을 드러내기가 무섭게 사방으로 영기파동을 퍼트렸다.
하지만 영기파동은 전함의 일정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무언가에 막힌 듯 진동만을 일으켰다.
"휴우, 된 건가?"
전함 위. 중괴의 한숨 소리에 준혁은 빠르게 주변을 확인했다.
공간 이동 해온 곳은 아무것도 없는 별천지 같은 상공이었는데, 수행이 높은 준혁마저도 뼈에 한기가 들 정도였다.
주변을 확인하던 그는 전함의 보호막 안에 있음에도 태식의 몸 위로 서리가 끼는 것을 보고는 재빨리 다가가 그의 몸을 잡았다.
그 순간 하얀 서리가 끼던 태식의 체온이 정상으로 돌아갔다.
빠르게 위급상황을 처리한 준혁이 중괴를 돌아봤다.
"어르신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무엇이 말이냐? 이걸로 탈출한 것을 말하는 것이냐? 아니면 내가 왜 쫓기고 있었는지를 뜻하는 것이냐?"
중괴가 발로 전함을 툭툭 건드리며 말하자, 준혁은 기감으로 소화여를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고규마에게 은원을 받아내기 위해 가지 않으셨습니까? 헌데 왜 도망을?"
날개와 전함의 새로운 능력에 놀라긴 했지만, 우선은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먼저.
"그렇지, 내가 그놈을 찾아간 건 보은 명단에 적힌 빚을 받아내려는 것이었지."
준혁을 비롯한 소화여와 태식이 귀를 세우자, 중괴가 설명을 시작했다.
"처음 그놈을 찾아가 비경에 대한 정보를 요구하자 순순히 그것들을 건네주더구나. 그래서 난 이상함을 느꼈다. 고규마 그놈이 절대 그럴 놈이 아니거든? 이름부터가 답답함이 느껴지는데, 평소와 다르게 너무 시원시원하게 정보를 내놓는다? 숨기는 게 있다고 생각했지."
중괴는 생각을 바로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었다.
수상함을 느낀 중괴는 고규마에게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 그를 강제하려 했다. 당연히 그와 부딪치게 되었고, 결과는 압승이었다.
하지만 고규마는 대천경 끝자락에 닿아있던 인물.
그를 강제했다고는 하나, 그가 원하지 않는 한 순순히 사실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결국 중괴는 그의 머릿속을 강제로 들여다보았고, 그러던 중 이상을 알아챈 자휴궁의 궁주가 나타나자 발을 뺀 것이었다.
‘대천경 수사의 의식을 강제로 읽는다고? 마치 정신부를 사용하는 것처럼?’
소천경에 오르고 나면 의지가 세상에 조금씩이나마 간섭하기 시작하기에, 특수한 비술이 아니면 그것이 불가능했다.
그 방법을 알기만 한다면 매우 유용할 거란 생각을 하며 준혁이 말했다.
"자휴궁의 궁주가 그렇게 강자입니까?"
중괴의 수행은 최소 진선경이고, 어쩌면 규선경(窺仙境)에 오른 초강자일지도 모른다고 준혁은 생각했다.
그런 그가 도망갈 정도라면?
하지만 준혁의 의문이 이어지기 전, 중괴가 씨익 웃으며 헤죽거렸다.
"물론 그놈도 제법 떵떵거릴 만한 놈이긴 하지. 하지만 내겐 역부족이다."
"그럼 왜?"
"왜 도망쳤냐 이 말이냐? 나는 도망친 것이 아니라 피한 것이다. 그놈이야 문제없지만, 그놈을 건드리면 일이 복잡해지거든. 그놈 사부가, 쩝. 아무튼 잘 쓰긴 했지만, 함부로 사용할 건 아니구나."
준혁의 물음에 답하던 중괴는 입맛이 쓴지 몇 번이나 혀를 차다가 날개를 뱉어내고는 준혁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는 전함을 움직여 천천히 하강시켰다.
잠시 후, 날개에 이상이 없나 확인하고 지금껏 알지 못했던 기능에 관해 물으려는 찰나, 중괴는 피곤하다는 듯 어깨를 주물럭거리더니 전함의 조종을 맡기고는 객실로 들어가 버렸다.
작은 옥간 하나를 남겨놓고.
"우선 그곳에 적힌 장소로 이동하거라. 남쪽으로만 이동했으니 동북쪽으로 가면 될 것이다."
***
이동에 특화된 다른 법기와는 달리, 조금은 느긋한 속도로 이동 중인 전함.
중괴가 모습을 감춘 지도 일주일, 전함의 선두에 앉은 준혁은 날개를 꺼내 상태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삼선에 이른 그도 사용하고 난 후유증을 겪는 것인가?’
중괴가 객실로 사라진 뒤, 준혁은 날개를 발동시켜보고는 전함과 이어진 반응의 끈을 찾아냈었다.
미약하게 남아있지만, 어떤 원리로 용천무의 날개와 전함이 상호작용을 일으켰는지, 어떻게 공간을 뚫고 엄청난 거리를 이동해 왔는지를 말이다.
그 뒤로 쉬지 않고 날개와 전함의 새로운 기능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고,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
‘둘은 처음부터 각자의 법기로 제작된 게 아니다. 애초에 이런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야.’
처음부터 엄청난 위용과 사용 제한에 비해, 압도적인 방어기능을 제외하면 대단하다고 여기진 않았던 전함.
물론 방어기능 자체만으로도 대단했지만, 그게 그리 크게 와닿지 않았었다.
하지만 중괴가 발동시킨 능력을 보고서야 전함의 진짜 기능을 깨닫게 되었다.
‘처음부터 공간의 압력을 이겨내는 데만 초점이 맞춰진 비행법기였던 것이야.’
당연한 말이지만 공간 속으로 숨어든다는 건 공간압력을 버텨내야 한다는 것.
물건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압력이 강해지는 걸 생각했을 때, 전함의 방어기능을 제대로 끌어낸다면, 가히 세상에서 전함을 부술 수 있는 것이 드물다고 표현해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날개는 그런 전함을 공간 속으로 이동시키는 법기였고 말이다.
아마 중괴가 굳이 그것들을 이용해 도망친 걸 보면, 추적마저 불가능한 전천후 이동 수단이 분명했다.
"아!!"
그때 준혁의 뇌리를 강타하는 생각이 있었다.
용각족의 탑에 방문했을 때, 용천무는 멸족할지 모르는 자신의 종족을 걱정해 미래를 대비해 놓은 상태였다.
"그렇다면 혹시! 이건 족인들과 도망가기 위한 수단이었단 말인가?"
"제법 머리가 잘 돌아가는구나!"
준혁이 전함의 진짜 용도에 대해서 깨닫고 있을 때, 어느 정도 회복을 마쳤는지 중괴가 개운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어르신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것도 눈치챈 것이냐? 그래, 내가 용각족의 보물을 너무 쉬이 보긴 했어. 시간을 끌며 싸우다 보면 충분히 연화시킬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아무리 노력해도 동화율이 1할을 넘길 수가 없더구나. 그러다 보니 강제로 발동해야 했고 그 여파가 적지 않았다."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지 중괴는 별것 아니란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준혁의 옆으로 다가와 철퍼덕 앉았다.
"네놈 생각대로 이 전함은 다른 것들과 다르다. 나도 우연히 듣기만 했지 실제로 존재할 줄 몰랐었어. 그러다 네놈이 사용하는 걸 보고 옛 기억이 떠오른 것이지."
이어진 중괴의 설명은 준혁이 예상하던 것들이 대부분 맞아떨어짐을 말해 주었다.
중괴 역시 전해 들은 얘기로는, 용각족의 최후 전함으로 불리는 이것은 다른 공격형 전함과 다르게 오직 공간 탈출용으로 제작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탈출용이다 보니 당연히 어떤 비술로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심지어 절대적인 강도로 부서지지도 않는다고 했다.
"누구도 부술 수 없단 말입니까?"
"그러겠느냐? 비슷한 수행의 수사로는 불가능하단 뜻이겠지. 허나 진선경에만 이른다 해도, 감히 누가 이것을 파괴할 생각을 가지겠느냐?"
준혁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중괴의 설명은 이어졌다.
전함과 날개를 연동시키는 방법부터, 그것을 운용하는 법, 그리고 강화하는 방법까지.
"하지만 명심하거라. 나도 한 번 이동에 이 정도 타격을 받았으니, 네놈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최소한 규선경에는 오른 뒤에야 쓸 수 있을 테니."
‘규선경? 그럼 지금 수행이?’
규선경을 지나면 수행의 끝이라는 신선경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중괴가 새삼 거대해 보였다.
하지만 준혁도 눈치채지 못하고 중괴도 실수한 것 한 가지.
중괴의 동화율이 1할이 넘지 못한 것에 비해, 준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
중괴는 자신도 제대로 연화시키지 못한 천영보를 준혁 역시 당연히 연화시키지 못했을 거라고 판단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완영기 때부터 용천무의 날개를 사용해온 준혁은 이미 동화율이 8할 가까이 온 상태.
게다가 누구도 알려주지 못할 정보 하나가 있었으니, 그건 날개와 전함을 완벽하게 발동하기 위해선 용천무가 남긴 명혼단을 체화시킨 100명의 후예가 합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100개의 명혼단 대부분을 혼자서 체화시킨 준혁은 영력만 받쳐준다면 혼자서도 완벽하게 구동이 가능하단 뜻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설명을 이어가던 중괴는 이번엔 다른 주제를 꺼내 들었다.
이번엔 멀리 있던 소화여와 태식까지 부른 뒤였다.
"내가 고규마 그놈에게서 무얼 알아냈는지 아느냐? 흐흐, 이 발칙한 4대 종문 놈들."
세 명이 집중하자 중괴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는 길에 임주성이 전쟁 준비 중인 걸 보았었지?"
"그렇습니다."
"그게 다 4대 종문이 의도한 일이다. 비경을 두고 전쟁을 벌이는 척하면서 뒤로는 서로 동맹을 맺고 이미 비경을 탐험하고 있다 이 말이다."
"왜? 그런 짓을!"
태식의 궁금함에 중괴가 준혁을 슬쩍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미 이유를 알겠다는 듯 무심한 모습에 중괴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네놈은 벌써 알아차린 모양이구나."
"뻔하지 않겠습니까?"
"흐흐, 그래. 그 뻔한 짓에 다 속고 있었다니."
"어르신 알려주십시오."
준혁과 중괴 둘만이 고개를 끄덕이며 얘길 나누자 태식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면 발전이 없는 법이다. 허나 대단한 일도 아니고, 사실은 이렇게 된 것이다."
공천귀의 거처로 의심되는 비경을 발견한 4대 종문은 그것을 누가 차지하느냐로 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진정한 경쟁자는 자신들이 아닌 천운대륙이나 남운대륙에 위치한 거대한 세력들임을 깨닫게 된다.
다행히 비경 발굴이 본격화되기 전엔 아무도 움직일 것 같지 않자, 4대 종문은 협약을 맺게 된다.
그 협약이 바로 비경 발굴이 끝날 때까지 보여주기식 소규모 분쟁을 계속해서 일으키는 것이었다.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해, 대륙 곳곳에 위치한 성(城)까지 영향이 가게 했고, 그 영향으로 큰 세력뿐 아니라 작은 세력들도 쉽게 끼어들기 어렵게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그럼 이미 늦은 것 아닙니까요?"
태식의 발언에 중괴가 입가를 끌어올렸다.
"걱정 말거라, 그곳이 진짜 공천귀의 거처라면 하루 이틀로 조사를 마무리할 순 없는 일. 비경 탐색이 시작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았다니 서두르면 되느니라. 그래서 하는 말인데 말이다."
중괴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소화여와 태식을 바라보았다.
"너희 둘은 여기서 가까운 대화성(大和城)으로 가 몸을 숨기고 있거라. 전쟁이 발발할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고."
***
"어르신, 선배님,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요."
"대인, 몸 성히 다녀오세요."
중괴의 축객령을 강하게 거부하던 두 사람은 짐이라는 말 한마디에 가까운 성으로 날아갔다.
그들이 떠나고 난 뒤, 전함을 수거한 준혁은 중괴의 뒤를 따라 하늘을 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10여 일을 날아가자, 중괴가 멀리 보이는 산맥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이느냐? 저곳이 고규마가 말한 그곳이다. 내가 말한 것 명심하겠지?
-물론입니다. 어르신.
오기 전 중괴가 거듭 강조한 두 가지.
하나는 비경에 진짜 공천귀의 물건이 있을시, 자신의 눈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천영보의 무리한 사용으로 자신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니,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예측하기로 비경 내를 수색하는 수사들은 대부분 대천경 이하의 수사들일 테지만, 자휴궁을 제외한 나머지 세 종문의 문주들이 포함되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럴 가능성이 낮긴 했지만, 선마궁과 법문에서 움직였다면, 4대 종문마저 속이고 이미 비경 내를 탐색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말이다.
"저기 협곡으로 가면 된다. 따라오거라."
어느새 산맥 초입에 도달한 두 사람은 스르륵 허공중에 녹아들며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빛이 굴절되는 미세한 흔적만을 남긴 채 소리 없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