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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272화 (272/408)

272화. 비경으로 (2)

텅 빈 석실.

화려하게 새겨진 진법에 불이 들어오자 주변이 환하게 밝혀졌다.

호란대륙에 위치한 임주성의 장거리 전송실.

그곳엔 오랜만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웬 떡인가? 당분간 전송실 사용을 중지해서 아쉬웠는데 말이야."

"예끼! 이 사람아 정신 차리게. 이런 상황에 장거리 전송진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평범한 사람들이겠나? 평소같이 뭐라도 뜯어낼 생각이면 당장 생각 고쳐먹게나!"

"참내, 뜯어먹긴 뭘 뜯어먹는다고 그러는가? 원래 장거리 전송진을 발동할 때 그걸 조종하는 수사가 고생한다는 의미로 수고료를 주는 거지."

떡대가 딱 벌어진 사내가 얼마 자라지도 않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당당하게 말하자, 정신 차리라고 소리쳤던 사내는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비켜나 버렸다.

"난 분명 경고했네."

잠시 후, 경고를 한 사내가 석실 문을 열고 나가버리자, 떡대남은 가소로운 듯 비웃으며 전송진의 문양 배열이 삐뚤어지지 않았나 재확인 작업을 시작했다.

"겁쟁이 같으니라고, 이런 식으로라도 재화를 모으지 않으면 언제 단약을 구하고 수행을 올린단 말인가? 앞으로 몇 년간은 부수입이 없을 텐데, 마지막 손님한테 두둑이 뜯어내야지."

물론 경고 사내의 말처럼 고위 수사나 각 종문의 높은 분이 전송진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땐 반드시 미리 연락이 왔고, 임주성의 고위 수사가 마중 나오는 게 관례였다.

즉, 이번에 오는 이는 평범한 일반 수사란 뜻이었다.

전송진을 총괄하는 수사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떡대남은 기분이 좋아 연신 웃음이 났다.

우우웅-

그때, 진이 진동하며 영기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동시에,

파앗-

하얀빛이 터져나가듯 주위를 밝혔고, 잠시 후 전송진 위에는 평범해 보이는 인물들이 나타났다.

‘노인 한 명과 젊은 놈 하나 그리고…. 엥 저건 여자야 남자야? 온몸을 천으로 칭칭 감고 있네.’

전송진에 나타난 인물들을 빠르게 훑은 떡대남은 제일 뒤편에 서 있는 사내의 옷차림에 눈이 번쩍 뜨였다.

‘세 놈은 추레한데 저놈은 딱 보아도 전왕문 수사로구나.’

돈을 잘 벌고 잘 쓰기로 소문난 전왕문 수사.

수행을 확인하니 화신기급으로, 같은 화신기인 자신보다는 한참 수행이 낮아 보였다.

그동안 전송진을 관리해온 감이 말해주길, 앞에 세 명은 전왕문 수사를 호위하는 역할 같았다.

"큼큼, 임주성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저는 전송진을 관리하는 묘,"

"시끄럽고, 바로 명규성으로 가는 전송진을 이용할 수 있느냐?"

"교라고 하는데…. 예?"

처음 보는 자가 느닷없이 반말하자 떡대남은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무례한 자들을 한두 번 본 건 아니었기에, 기세를 퍼트리며 위엄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조금 전의 당황을 만회하려는 듯이.

"이곳은 임주성의 전송실이오! 정해진 규칙에 따라서만 행동할 수 있으니, 수사분들께서는 사용에 앞서 미리 고지를,"

"저 멍청이가 뭐라는 거냐? 사용하긴 뭘 사용해? 우리가 도착한 거 안 보이나?"

떡대남의 우렁찬 목소리가 석실을 울리기 시작하려는데, 노인의 목소리가 파고들며 말을 끊어버렸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전왕문 수사가 한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어르신, 기세를 올리는 걸 보니 아마 저자가 수고료를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수고료?"

"어르신께서 성주께 되도록 조용히 이동할 수 있도록 부탁하지, 아니, 명령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마 그것 때문에 저자가 저희를 낮춰 보고 삥을 뜯으려 한다는…."

전송진 위에 나타난 네 사람.

준혁 일행 중 중괴는 태식의 설명에 피식 웃고 말았다. 항상 극진한 대우를 받았기에 처음 겪는 일에 흥미를 느낀 것 같았다.

스르륵-

전송진 진법 밖으로 한 발 내민 중괴가 공기 중에 흩어지듯 사라졌다가 떡대남 앞에 나타났다.

그 모습에 떡대남은 사신이라도 만난 듯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다행히 눈치가 없진 않았다.

"어, 어르신!! 오해이옵니다!! 제가 삥을 뜯다니요?! 어디 그런 상스러운 짓을 감히 한단 말입니, 컥!"

말을 이어가던 순간, 떡대남은 보이지 않는 손에 목이 잡힌 것처럼 허공에 떠올라 대롱대롱 발버둥 쳤다.

"커억, 사, 살려."

"시끄럽고 아까 질문에나 대답하거라."

"무, 무, 무."

"쯧, 내 묻지 않았느냐. 명규성으로 가는 전송진을 이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한편, 중괴가 장난스레 움직일 때, 소화여가 준혁 곁으로 다가오며 작은 등불을 꺼내 보였다.

준혁을 바라보는 눈빛에 따스함이 가득했는데, 일종의 존경심 같기도 했고, 기대감 같기도 했다.

"대인께서 제 아비의 마음까지 헤아려주시고….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아마 진심으로 놀라고 계실 거예요."

"저 역시 가족이 있는데, 그걸 모르겠습니까? 헌데 이건 무엇입니까?"

준혁의 시선이 등불에 닿자, 소화여는 손에서 붉은 화염 뭉치를 만들어냈다.

우웅-

‘엄청나구나! 이게 태양지력!’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 한걸음 물러난 준혁은 지독한 열기를 품고 있는 구체에 시선을 집중했다.

"이건 아버지께서 주신 것입니다. 제 생사를 파악하고 흔적을 쫓기 위해서."

"아. 감시용입니까?"

준혁이 직설적으로 묻자, 고개를 끄덕인 소화여가 손에 만들어낸 화염 뭉치로 등불 법기를 가볍게 쥐었다.

콰앙-

그 순간, 영력이 터져나가며 폭발이 일어났고, 법기는 산산조각이나 터져나갔다. 하지만 폭발은 확산되기가 무섭게 그녀의 손안으로 끌려가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파사삭-

마치 태양지력이 폭발력을 전부 잡아먹어 버린 것 같았다.

"그걸 왜?"

"대인의 마음 씀씀이를 보니 이건 우리의 행동을 제약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함께하다 보면 의도치 않게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 일. 제 명원패의 혼력이 흐려진다고, 저를 찾아 들쑤신다면 곤란하시지 않겠어요?"

사실 그녀는 소우자와 약속을 했었다.

만약 준혁과 함께하고 일정 시간이 지나도 그가 치료해주지 않는다면, 등불을 이용해 소식을 전해주기로.

그렇게 된다면 당장 소우자가 찾아와 약속을 물리고 어떻게 해서든 강제로라도 월광지력을 빼앗아 그녀에게 전해주기로 말이다.

그 시간에 중괴가 여전히 함께하고 있다면 힘들 수도 있지만, 소우자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이 그것이었다.

물론 소화여는 그것을 반대했다. 그렇게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구차하게 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같이 차가운 자신의 아비가 슬픈 눈으로 바라보자 어쩔 수 없이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걸 부순다면 성주께서…."

준혁이 염려가 담긴 목소리로 말하자, 소화여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뇨. 아마 제 뜻을 알아차리셨을 거예요. 평소 제 성정을 아시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때, 한쪽에서 한바탕하고 온 건지, 상쾌한 얼굴의 중괴가 헤실헤실 웃으며 다가왔다.

"재밌는 놈일세. 그나저나 예상대로 명규성으로 가는 전송진은 이용할 수 없다는구나. 어쩔 테냐?"

"성을 벗어난 후, 비행법기로 이동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미 소우자에게 상세히 전해 들었기에, 준혁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중괴는 기대하던 것이 있었던 건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며 준혁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러지 말고, 내가 말한 대로 하는 건 어떻겠느냐?"

전송진을 이용하기 전, 둘만 남았을 때 했던 중괴의 제안.

"흠. 그건 좀."

어차피 비경의 보물은 주인 없는 것이니 잠깐 들렀다가 가자는 것이었다.

준혁이 가진 적마의 힘이면 누구보다 유리할 테니, 비경의 보물을 싹쓸이해오는 건 누워서 떡 먹기 아니냐며.

하지만 이제 두 대륙만 지나면 여서령에게 갈 수 있는데, 굳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아무리 적마의 힘을 가지고 있다 한들 네 종문 사이에 끼인다면 중괴와 자신, 그리고 소화여는 몰라도 태식의 안전까지 보장하지는 못할 거란 판단이었다.

‘공천귀라는 말이 나왔을 때부터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니 무언가 있는 건 분명한데.’

잠시 고민하는 척하던 준혁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어 중괴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역시 바로 남운대륙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비경이 임주성의 동북쪽에 위치해 있다니 저희는 남쪽으로 이동한 후, 대륙을 횡단하면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에잉! 맘에 안 들어."

몇 번의 부탁이 묵살되자 중괴가 쳐다보기도 싫다는 듯 준혁을 외면했다.

"그럼 우선 이곳을 나가시지요."

***

전송실을 나오자 눈부실 햇살이 일행을 반겼다.

이제 곧 전쟁이 일어날 거라는 소우자의 예측과는 달리 임주성은 여느 때와 같이 평화롭고 수많은 인파로 들끓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임주성을 처음 방문한 준혁의 느낌.

몇 번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던 태식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 전쟁이라도 일어나려나 봅니다."

"내 눈엔 딱히 그런 게 보이지 않는데 왜 그렇게 판단하는가?"

"저길 보십시오."

태식은 준혁의 물음에 멀리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

그곳은 성벽 위였는데, 수많은 수사가 일렬로 늘어서 있고, 어떤 곳은 수십 명 단위로 뭉쳐있었다.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임주성은 예전부터 범인들의 인권을 꽤 생각해주는 곳입니다. 그래서 성내에선 수사들도 영력 사용을 자제하라고 경고하지요. 헌데 저길 보십시오. 저 많은 인원이 무슨 일이라도 벌일 것처럼 기세를 피우고 있지 않습니까? 아마 외부 인사들이 방문할 걸 고려해 시위를 하는 것일 겁니다."

태식의 설명에 기감으로 주변을 자세히 살핀 준혁은 성내의 특이점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대부분 범인뿐이구나.’

수많은 사람 중 성벽 위를 지키는 수사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일반 사람이거나 축기기 이하의 최하위 수사들이었다.

"선배님 말씀대로 조용히 빠져나가기 위해선 최대한 빨리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런 분위기라면 언제 성문을 닫아도 이상하지 않으니까요."

"그러세. 어르신. 혹 이곳에서 볼일이 있으십니까? 그런 게 아니라면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태식의 제안에 준혁은 바로 중괴의 의견을 물었다.

그때, 지금까지 뾰로통하게 인상을 구기고 있던 중괴가 기발한 생각이 난 사람처럼 손을 마주쳤다.

짝-

"그래! 그러고 보니 그런 약속을 했었지."

무슨 일인가 싶어 지켜보는데 중괴가 준혁에게 다가오더니 입가를 끌어올렸다.

"애송아, 기억하느냐? 면교만인지 만교만인지를 처리하면서 나누었던 말?"

예전 일을 떠올린 준혁은 중괴가 언급한 말이 무엇인지 눈치챘다.

"...혹시, 후일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주라는 그 말 말입니까?"

"흐흐, 그래!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단 말이냐. 지금 그 약속을 지켜야겠다! 딴말하진 않겠지?"

중괴의 표정이 장난스럽게 보였지만, 농담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비경 말씀이십니까?"

"그래! 나는 그곳을 꼭 가야겠으니, 네가 가진 적마의 능력으로 나를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 이게 내가 원하는 부탁이다."

"......"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면 무슨 일이라도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왜? 이제 와서 못하겠느냐?"

중괴의 두 눈엔 ‘네놈의 성정에 약속을 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어쩔 테냐?’ 하는 득의양양함이 가득했다.

‘어쩔 수 없구나. 하긴, 궁금하긴 하구나. 선마궁이야 공천귀가 살아있다는 생각에 움직이질 않을지 몰라도…. 그도 자신이 봉인 당했던 곳을 찾으라 말했으니까.’

다만 가능성은 있지만, 호란대륙의 비경이 공천귀가 봉인 당한 장소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만통방에서 쫓겨날 때 단편적으로 전해 들은 말이긴 했지만, 공천귀의 어감으로 보았을 때 ‘봉인 당한 곳’이라는 게 왠지 준혁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정확히 어떤 느낌이라 표현할 순 없었지만, 왠지 ‘봉인 당한 곳’ 가까이 가면 공천령이 반응해 알려줄 것만 같았다.

그랬기에 공천귀의 거처일지도 모른다는 말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어르신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따르도록 하지요."

준혁이 순순히 받아들이자, 중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준혁에게 보란 듯 자신의 손목을 탁탁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그럼 보은 명단을 꺼내 보거라. 내 알기로 자휴궁(紫庥宮)의 고규마(高奎魔)가 오래전 적지주를 만났다고 알고 있으니까."

자휴궁은 호란대륙 4대 종문 중 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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