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비경으로 (1)
중괴가 경악에 가까운 전음을 전했지만, 준혁은 태연하게 소우자를 바라보았다.
애초에 진짜 생사여탈권을 원한 것이 아닌, 거래를 유리하게 만들기 위한 떡밥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준혁의 의도와 달리 소우자는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겠네. 다만 묘립성에 상주하는 전원이 내 수하는 아닌바, 나와 내 직속 수하들에서만 한정해서."
-당장 실수였다고 말하거라!
그 순간, 중괴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지만, 준혁이 행동에 옮기기도 전, 소우자는 품속에서 재질을 알 수 없는 나무패 두 개를 꺼내 건넸다.
"나와 저 아이의 명원패일세.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건 내 목숨줄을 쥐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 이러면 되겠나?"
‘...이건 예상 밖이구나.’
-아이고 두야, 나는 모르겠다. 네놈 알아서 하거라.
마치 주군과 신하의 관계가 돼버린 듯하자, 준혁은 난감해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중괴마저 이 상황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걸 보면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함정이 존재함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진지하게 목숨과 같은 명원패를 건네는 소우자에게 ‘죄송해요~ 농담이에요~’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당장 칼부림이 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정녕 말학 후배에 불과한 저에게 목숨을 저당 잡히시겠단 말이십니까?"
"수사가 화여를 지켜주기만 한다면, 물론이네."
"수많은 수하의 목숨까지 말입니까?"
이번엔 소우자도 쉽게 대답하진 못했다. 아마 군신의 의리와 가족의 정을 저울질하는 게 고통스러운 듯 보였다.
"모두 나를 따라줄 것이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땐 나와의 연이 끝난 것이겠지."
그때 가서 죽이겠다는 건지, 그냥 놓아주겠다는 건지 모호한 말로 마무리했지만, 준혁은 차마 뒷말을 묻지 못했다.
잠시 후, 중괴의 탄식과 같은 한숨에 상황이 일단락되자, 소우자는 처음의 무표정하고 차가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종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준혁을 대함에 있어 동급 수사를 대우하듯 예를 다했고, 소화여는 어느 순간부터 준혁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
"지금 호란대륙을 건너는 건 말리고 싶습니다. 당분간 이곳에 머물다 사태가 안정되면 떠나시길 바랍니다."
소화여에 대한 일이 일단락되자, 준혁의 여정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고, 소우자는 바로 반대했다.
"전송진을 이용해 임주성(臨珠城)으로 가신다 해도 바로 명규성으로 이동하는 전송진을 이용할 순 없을 겁니다."
주운대륙 중심부에 위치한 묘립성에서 최대한 멀리 이동할 수 있는 곳이 호란대륙 서북쪽 끝에 위치한 임주성이었다.
그곳까지 간 뒤, 다시 전송진을 이용해 호란대륙 남동쪽 끝에 자리한 명규성으로 이동.
그 후에 명규성의 전송진을 이용해 천운대륙으로 직행하자는 게 중괴의 계획이었다.
"왜지?"
"최근 호란대륙에 나타난 비경으로 인해 종문들이 들썩이고 있습니다. 소문으론 호란대륙의 사대 종문이 그곳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까지 준비한다고 하니…. 전송진을 이용하기는커녕, 잘못하면 대륙을 지나는 동안 애꿎은 일을 당하실 수도 있습니다."
물론 중괴의 수행에 잘못되거나 할 일은 없겠지만, 그만큼 귀찮아질 테니 사태가 가라앉을 때까지 묘립성에 머물다 움직이란 말이었다.
"겨우 비경 하나에?"
중괴가 의문을 드러내자, 소우자가 손뼉을 치듯 양손을 짝 소리 나게 부딪쳤다.
그러자, 허공에 푸른 기운이 뭉치며 원을 그리기 시작했고, 원은 이내 선명한 문양을 가지더니 팔찌 형태로 변했다.
"알아보시겠습니까?"
"공천귀!!"
‘공천령!’
팔찌의 문양을 알아본 준혁이 속으로 놀라는 사이, 중괴는 진심으로 놀랐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설마! 비경이 공천귀의 처소란 말이냐?"
‘공천귀가 자신이 봉인된 곳을 찾으라 했는데? 설마 그곳인가?’
준혁이 만통방에서 만났던 공천귀를 떠올리고 있을 때, 소우자가 말을 이었다.
"아직 밝혀진 건 없습니다. 다만 비경 입구의 결계가 특정 문양을 만들고 있는데. 그것이 공천귀의 표식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허…. 그래서."
"아직까지 선마궁에서 공천귀의 흔적을 찾고 있는 걸 보면, 아마도 그가 관리하던 보물을 전부 가지고 사라졌다는 소문이 사실이라 판단하는 게 옳겠지요? 그러니 사대 종문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계속해서 감탄사만 연발하던 중괴는 한참이 지나서야 질문을 던졌다.
"헌데 선마궁에서 가만히 있는단 말이냐?"
"그것이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는 것입니다. 어찌 된 일인지, 공천귀의 표식이 나타났는데도 선마궁에선 꼼짝도 하질 않는다고 하니. 다만 몇몇 마선들이 개인적으로 움직였다는 보고는 있습니다. 게다가 천운대륙의 문파들도 관심을 기울인다는 얘기가."
"허어…."
"그러니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이곳에 머무시는 게 어떠십니까?"
두 사람이 대화를 이어가는 동안 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한쪽 팔목을 쓰다듬었다.
만통방이 폭발한 뒤, 존재감이 거의 사라져버려 문신마저 모습을 감춘 지 오래.
하지만 여전히 공천령이 식아와 연결돼있다는 건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런 준혁은 공천귀의 거처일지 모른다는 비경이 나타났음에도 선마궁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때 나타났던 눈동자. 아마 무언갈 알아차린 거겠지?’
자신을 내려다보던 눈동자가, 식검과 공천령의 존재감을 읽었다고는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준혁이 선계에 올라옴과 동시에 그동안 단절돼있던 마선들과 감응이 닿았고, 그중에 공천귀도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었다.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존재감을 확인했다면 비경을 확인할 리 없지.’
공천귀의 몸 안이 보물창고이자 하나의 완벽한 공간이었기에 굳이 외부에 무언가를 남겼을 리는 없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컸다.
아니, 거의 확실하다고 여겼다.
"흠, 네 생각은 어떠하느냐?"
그때, 중괴가 선택권을 준혁에게 넘겼다.
잠시 고민인 척 턱을 매만지던 준혁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거대 종문의 전쟁에 휩쓸린다면 위험할 수는 있으나,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 한없이 묘립성에 안주하고 있을 순 없었다.
게다가 네 세력이 다툰다 해도 비경 근처에 국한된 일일 터.
그곳만 피해 가면 그만이었다.
"저는 남운대륙으로 갈 것입니다."
"그렇다네?"
중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고, 결국 소우자의 의견은 묵살되었다.
잠시 후, 준혁에게 설득이 통할 것 같지 않자, 소우자는 소화여를 데리고 자리를 떠나갔다.
준혁이 떠나기 전 딸과 마지막 대화를 나누고, 채비한다는 이유였다.
"그나저나."
소우자가 떠나자 중괴는 답답하다는 듯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들추었다.
"어쩌자고 그런 것이냐?"
"무엇이 말입니까? 그녀를 받아준 것 말입니까?"
"생사여탈권 운운한 것 말이다!!"
가슴을 두어 번 두드린 중괴가 대답을 종용했다.
"아, 그것 말입니까? 사실 정말 허락할지는 몰랐습니다. 거래의 기본은 몸값을 높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허허, 뭐라? 몸값? 전왕문주에게서 한몫 단단히 뜯어내더니 기고만장한 것이구나?"
중괴에 말에 준혁은 순간 뜨끔해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중괴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으니, 그때처럼 한몫 뜯어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게 사실이기도 했다.
일이 이렇게 흘러갈지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혹 제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준혁의 물음에 중괴가 콧방귀를 뀌더니 고갤 흔들었다.
"애송이는 애송이구나, 소우자가 멍청이라서 자신의 명원패까지 내주고 목숨을 저당 잡힌 것이겠느냐?"
어느새 준혁은 경건한 자세로 신색을 바로 했다.
"가르침을 주시면 경청하겠습니다."
옆에서 지금껏 조용히 대기하던 태식도 귀를 쫑긋 세우고 가까이 다가왔다.
"세상 모든 일엔 권리와 의무가 함께하는 것이다. 알고 있느냐?"
"물론입니다."
"허면 네놈이 받은 생사여탈권은 권리인 것이냐? 의무인 것이냐?"
"예? 그건 당연히…."
권리라고 말하려던 준혁은 순간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아!"
그 모습에 중괴가 답답함이 조금은 가셨는지 한숨을 푸욱 내쉬고 말을 이었다.
"다행히 생각이란 걸 하긴 하는 모양이구나. 그래. 소우자를 포함해 묘립성의 수사들을 움직일 권한은 권리이자 의무. 네놈이 그들을 움직일 수 있게 된 이상 그들의 수장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생각해보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중괴는 깨달음을 얻은 준혁에게 한 번 더 상기시키겠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수장의 도리 중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수하들의 목숨을 챙기는 것이다. 네놈이 힘을 소비하게 될까 봐, 화여를 떨어트리려고 했는데, 네놈 스스로 발목을 잡고 만 것이지. 이제 화여의 목숨을 방치하면 네놈은 수하를 죽게 내버려 두는 수장이 되는 것이다."
촌철살인을 하듯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치료하지 못하면 무능한 수장이 되는 것이고, 죽기라도 한다면 수하를 저버린 수장이 되는 것이란 말이다."
더군다나 준혁에겐 소화여의 생명을 유지할 힘이 있었으니, 만약 죽도록 방치한다면 역풍이 불 건 분명했다.
아니, 소우자는 그걸 염두에 두고 허락한 것이 분명했다.
‘그 짧은 시간에 몇 수를 내다본 거지.’
중괴와 소우자, 두 사람 다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역풍이 불어 준혁과 묘립성의 수사들이 대치할 가능성은 매우 낮긴 했다. 그건 소화여가 죽는다고 해도 마찬가지.
중괴가 충고한 모든 것은 만약이란 가정이었고, 수도계에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 불가능하니 조심하란 뜻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준혁이 실수를 뉘우치며 사색에 빠지는 듯 보이자, 중괴도 더는 꾸중하지 않고, 시선을 돌려버렸다.
하지만 준혁이 중괴에게 말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천년수와 적유목을 뿌리째 뽑아 사용했던 다른 고위 수사들과 달리, 준혁은 천년수에 맺힌 월광지력만 순수하게 흡수했었다.
그 말인즉 하계로 통로만 연다면 500년에 한 번씩 월광지력을 보충할 천년화를 얻을 수 있다는 말.
소우자의 슬픔에 감화되어 소화여를 도와주려 마음먹은 데는 그런 계산까지 깔려있었던 것이었다.
즉, 중괴가 걱정하는 월광지력의 소비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긴 했다.
다만, 그의 충고에 틀린 말은 없었기에 준혁은 더 깊게 생각하고 판단하지 못한 자신을 반성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묘립성의 생사여탈권에 대해 심도 있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
사흘 후.
"어르신, 잘 부탁드립니다."
"왜 나에게 그러느냐? 네가 화여를 부탁한 건 이 녀석 아니더냐?"
드넓은 광장, 수많은 화신기급 수사들이 촘촘히 가로막은 건물.
그 안에 화려하게 새겨진 진법 사이로 준혁을 중심으로 중괴, 태식, 소화여가 자리하고 있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주운대륙에서 호란대륙으로 넘어가기 위해 전송진 위에 대기한 상태였다.
중괴의 말에 소우자는 어울리지 않게 피식 웃더니, 준혁에게 깊게 허리를 숙였다.
수행을 생각한다면 깜짝 놀랄 일이었지만, 그의 인사는 선배가 아닌 아비로서의 인사.
준혁도 그에게 마주 인사했다.
"최 수사, 잘 부탁하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녀석이니 많이 가르쳐주시게나."
"저보다 수행이 높은데 가르칠 게 무어 있겠습니까? 그리고 어디까지나 동료로 함께하는 것이니 저에게 그런 과례를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잠시 후, 소우자의 신호에 진법이 가동되자, 주위의 영력이 파도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준혁은 품 안에서 나무패 하나를 꺼내 진법 밖에 서 있던 소우자에게 던졌다.
곁에 있던 소화여가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깜짝 놀라자, 물건을 받은 소우자도 덩달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걸…. 왜? 왜 나에게 이걸 주는 겐가?"
준혁이 던진 건 소화여의 명원패였다.
"평생을 돌보셨는데, 멀리 떠나는 딸이 걱정돼 잠이라도 이루시겠습니까? 최소한 생사는 확인해야 마음이 편하시겠지요. 명원패가 꺼지지 않는 한 제가 안전하게 데리고 있다는 뜻이니 두 발 뻗고 주무시라 드렸습니다."
준혁의 말에 감동한 소우자가 급하게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
우우웅-
파앗-
전송진이 발동되며 준혁 일행의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