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270화 (270/408)

270화. 소화여 (2)

소우자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준혁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자, 중괴가 끼어들었다.

월광지력을 파악하기 위해 애쓰던 그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소화여를 뒤로한 채 소우자에게 말했다.

"웃기는 놈일세. 왜? 월광지력을 평생 뽑아먹으려고?"

"......"

소우자가 입을 닫자, 중괴는 하얀 구슬을 준혁에게 돌려보낸 뒤 말을 이었다.

"저 녀석이 지닌 월광지력으론 불가능하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월광지력만 있다면…."

"물론 저 애송이의 힘이면 지금 당장은 화여의 태양지력을 억누를 수는 있겠지. 하지만 저놈과 네 딸은 태생부터가 다르다."

‘태생이 다르다고? 종족을 말함인가?’

준혁도 중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도 놀랄 정도로 순수한 월광지력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저 녀석이 지닌 힘은 한계가 명확하지, 하지만 화여의 태양지력은 지금도 증식하고 있질 않으냐?"

"아…."

"결국 미봉책이란 말이다. 그리고 아마…."

설명을 이어가던 중괴가 바라보자, 눈빛의 의미를 알아챈 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묻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하겠습니다. 월광지력을 사용하고 나면 회복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겠지요?"

"역시 눈치가 빠르구나."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한 번 소비한 힘은 회복되질 않습니다."

물론 공격수단으로 이용하거나 외부에 반응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라면 월광지력의 총량이 특별히 변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월광지력으로 태양지력을 상쇄시키는 것이었기에 준혁은 이론적으로 벌어질 현상에 대해 예상한 바를 말했다.

애초에 목족의 대지에서 오랜 시간 체외로 배출한 월광지력을 방치했을 때도 중괴의 걱정과 비슷한 걱정을 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그땐 호수 속에 방치돼 있던 ‘수괴’의 냉기가 월광지력을 원상태로 보존시켜주었기에 큰 변화를 보이진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화괴와 수괴에 대해서 어르신께 물어보는 게 나으려나?’

월광지력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쌍괴에 대한 것이 떠오르자, 준혁은 잠시 고민을 이어갔다.

호수 안에서 발견했지만, 마치 전투를 치른 것처럼 서로 상잔한 채 죽어 있던 두 개의 검과 도.

쌍괴라 불리던 화괴와 수괴가 다른 마선들과 달리 죽은 것처럼 아무런 반응이 없었기에 식검으로 흡수하지 않고 방치했었다.

그것에 대해 이번 기회에 중괴에게 물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영원불멸하는 마선의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아 흡수하는 걸 꺼렸었는데, 중괴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다만, 그렇지 않아도 자신에 대한 호기심에 특별한 이유 없이 졸졸 따라다니는 중괴의 관심이 더욱더 커질까 하는 염려가 함께하긴 했다.

‘상황을 보아 해결하자.’

그때, 중괴의 말로 인해 이어가던 상념이 흩어졌다. 준혁이 다시 현실에 집중했다.

"알겠느냐? 저 녀석을 희생해 화여의 목숨을 연명할 게 아니라면 욕심내지 말거라. 내가 괜한 짓을 했구먼, 애송아 조심해라. 특히 밤에 혼자 다닐 때…. 쓱."

소우자에게 경고 비슷한 말을 남긴 중괴는 준혁을 향해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장난스럽게 말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장난스러운 표정과 달리, 준혁의 월광지력에 대해 언급한 게 미안했는지 연신 혀를 차며 씁쓸해했다.

***

잠시 후, 분위기가 서먹해지자 중괴가 집중하란 듯 목을 가다듬었다.

"크흠! 그것보다 네놈의 은원부터 해결하는 게 어떻겠느냐?"

"은원이라 하심은?"

조용히 침묵하던 소우자가 반응을 보이자, 중괴가 준혁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애송이가 적지주 그 친구의 적법한 후계자거든."

그제야 성문 밖에서 나누던 얘기가 떠오른 소우자가 궁금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적지주의 귀천은 무슨 말입니까? 계약자가 죽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한 것입니까?"

"그러면 귀천이라 했겠느냐? 진정한 영면에 들었으니 귀천이라 한 것이지."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까?"

"그래, 자세한 건 말해주기 어렵지만 그렇게 되었다."

혹시나 중괴가 식아의 정체를 발설할까 조마조마했던 준혁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만에 하나 선마궁이나 법문의 귀에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때부턴 정말 귀찮아질지도 모르는 일. 아니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말 돌리지 말고, 적지주의 은원은 저 애송이가 그대로 물려받았으니, 그리 알도록 해라."

‘아! 왜 적지주 얘길 꺼내나 했더니, 내 안전 때문이었구나.’

반쯤 장난으로 한 말이라 여겼는데, 중괴는 진심으로 소우자가 준혁에게 몹쓸 짓을 할지도 모른다고 여긴 듯했다.

그제야 준혁은 이곳에 오기 전 중괴의 충고가 떠올랐다.

‘은원은 확실하나…. 비정하니 조심하라고 했지.’

그리고 그건 또 한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나와 계속 함께할 생각은 아니구나.’

만약 오랫동안 함께할 생각이었다면 굳이 은원에 대한 얘길 꺼내 준혁에게 마수를 뻗지 말라고 경고할 리가 없는 일.

중괴는 조만간 혹은 시일이 지나면 떠날 생각이었고, 그때를 대비해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것처럼 보였다.

"왜 대답이 없어?"

적지주의 은원에 관한 얘기가 나온 후, 소우자가 침묵한 채 생각에 빠지자 중괴가 그를 닦달했다.

하지만 소우자는 중괴가 계속해 신호를 보내도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듯 말이 없었다.

그러다 한참 만에 시선을 준혁에게 돌리더니, 천천히 다가와 자신의 딸인 소화여를 불렀다.

"화여야, 이리 오거라."

중괴 곁에 서 있던 소화여가 발을 떼자 소우자가 입을 열었다.

"최준혁 수사라 했지요."

조금 전까지의 강압적인 명령조의 말투가 아닌, 동급수사를 대우하듯 예를 갖추면서.

"받기 힘드오니 편하게 말씀해주십시오."

"아닙니다. 적지주의 은원을 이어받았다면 나에겐 은인. 은인께 하대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

준혁이 대답할 거리를 찾지 못하는 사이, 소화여가 소우자 곁에 다가와 시립 했다.

그러자 소우자는 그녀를 준혁이 서 있는 방향으로 가볍게 퉁- 밀었다.

"오늘부로 은원을 정리하겠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얻은 생명 다시 돌려드리겠습니다."

힘없이 밀려오던 여인을 피해 한발 물러선 준혁은 소우자의 말에 그 의미를 파악하다가 입을 뗐다.

"생명을 돌려주신다니, 설마 이분의 목숨을 제가 책임지란 말입니까?"

"책임이라니요. 말 그대로 돌려드리는 겁니다. 죽이시든지 살려서 데리고 다니시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데리고 다니라니. 마치 종을 부리듯 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은가?

하지만 소우자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중괴가 치료를 포기했고, 혹시나 환생할 딸과 인연을 이어줄 적지주는 죽고 사라진 현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그나마 조금이라도 목숨을 연명해줄 가능성이 있는 준혁에게 생명의 권한을 넘긴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말로는 권한을 넘기는 듯했지만 실제로 딸이 방치된 채 죽는다면 가만히 있을까?

‘절대 그럴 수 없지.’

당연히 짐을 떠안는 것이었기에 준혁은 거부 의사를 밝히려 했다.

그 순간 중괴의 전음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받아들이거라.

‘받아들이라고? 조금 전까진 반대하던 양반이?’

준혁의 월광지력을 욕심내지 말라고 했던 중괴가 이번엔 소우자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말하자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러다 계속 도움을 주던 중괴의 호감에 비추어 생각해 보니 그전과 지금의 상황이 다르단 걸 깨달았다.

‘내 몸이 어디에 메여있냐의 차이인가?’

그 전 제안이 준혁에게 데릴사위를 권유하는 모양새였다면 이번엔 준혁에게 여인을 데리고 떠나라는 모양새.

중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그전보다 안전이 보장되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내 몸 하나 간수하기 힘든 처지에 말도 안 되는 소리지.’

하계에서처럼 스스로가 최강자 반열에 올랐다면 여인을 치료함은 물론이고, 울타리 안에서 보호해줄 여유가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마선경과 괴조를 피하며 대막리나 요마족의 눈치도 봐야 하는 상황.

게다가 여서령을 만나야 했고, 지구로의 통로를 열기까지 해야 했다.

여러 가지 일들로 본인 목숨도 챙기기 급급한 상황에 여인을 치료하며 힘을 소비하고 손을 낭비할 순 없었다.

"거절하겠습니다."

준혁은 중괴의 조언에도 단호하게 의사를 밝혔다.

그 순간.

"그러한가?"

다시 말투가 차가워진 소우자가 시선을 소화여에게 옮겼고.

스아악-

그의 등 뒤에서 얼음 칼날이 만들어지더니 그의 어깨를 넘어 초승달처럼 휘어지며 소화여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순간 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귀원패를 불러냈다.

차자장-

그러자 초승달처럼 휘어지던 칼날이 육각 타일에 막혀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속았구나!’

대천경 수사인 소우자가 진심으로 출수했다면 칼날이 부서지는 게 아니라 귀원패가 깨져나가야 정상.

준혁은 상대가 자신을 떠보기 위해 딸을 공격하는 척했단 걸 깨달았다.

"어째서 막은 것인가?"

실수라고 말하기엔 입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기에, 변명거리를 찾는 도중 또 한 번 중괴의 전음이 전해졌다.

-다음엔 진심으로 죽일 것이다. 딸이 고통받느니 그러는 게 낫다고 판단할 놈이니까. 대신 네놈도 편치 못할 테니 그건 알아두거라.

‘설마? 자신이 죽여놓고 나 때문이라고 우기기라도 한단 말인가?’

더는 중괴의 조언이 들려오진 않았지만, 처음부터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한 것에 이런 이유까지 포함된 것임을 깨달았다.

"어째서라니요? 오히려 제가 묻고 싶습니다. 어째서 하나뿐인 딸을 해하려 하십니까?"

어느새 냉기가 뭉쳐진 칼날이 소우자 주변으로 둥둥 떠올랐다.

"저 아이의 고통을 네놈이 조금이라도 알 것 같으냐? 피가 들끓어 올라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타들어 가는 고통을?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루에 한 번, 겨우 잠깐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해주는 것뿐이다. 아주 잠시 동안."

"......"

"헌데 이제 치료할 방법도 도와줄 자도 찾을 수 없으니 어찌해야겠느냐? 편히 눈감게 해주는 게 아비가 할 수 있는 최선 아니겠는가?"

‘이자…. 진심이구나.’

그 순간 준혁은 소우자에게 동정을 느꼈다.

자신 역시 동생의 고통을 보기 힘들어 얼음 속에 보관하지 않았던가? 물론 치료할 방법을 찾을 때까지 생명을 유지하려는 목적이 컸지만, 소우자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준혁의 심경에 변화가 찾아왔다.

거기에 더해 실리적으로 중괴의 조언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만 소우자의 협박에 못 이겨 끌려다니고 싶은 마음은 단 한 푼도 없었다.

"그럼 저에게 무얼 해주시겠습니까? 적지주의 은원을 돌려주신다면서 결국은 따님의 생명을 연명시키고자 하심이 아닙니까? 원하는 바를 이루시려면 제대로 된 대가를 제시하십시오."

"정말 그리해 줄 텐가?"

준혁의 말속에 함께하겠다는 것만이 아닌, 치료 의지가 느껴지자 소우자의 등 뒤에 하나씩 늘어가던 얼음 칼날이 소리 없이 사라졌다.

다시금 소우자의 말투가 하대에서 평대로 바뀌었다.

"원하는 게 있다면 말만 하시게. 내 무엇이든 들어줄 테니."

준혁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성주님을 포함한 묘립성 수사들의 생사여탈권을 저에게 주시겠습니까?"

-미친놈, 제정신인 것이냐?

경악한 중괴의 전음이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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