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태식 수사 (2)
준혁의 비책에 조말랑은 납득한 후, 대황대륙 방향으로 떠나갔다.
떠나기 전, 백랑족에 방문해주길 부탁하고 또 부탁하면서.
빛 꼬리를 남기며 떠나간 조말랑이 작아져 더는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자, 준혁은 손에 들고 있던 [보은] 옥간을 감추었다.
옥간이 사라지고 난 손에는 어느새 법기 두 개가 잡혀 있었는데, 하나는 촉이 없는 화살이었고, 나머지는 사람 몸통만 한 책이었다.
준혁은 두 가지 법기를 자세히 살피다 공간대에 넣으며 신배에게 얻은 비행법기를 꺼냈다.
‘우선 묘립성(墓立城)의 성주 소우자를 찾아가 본 후, 사막 인근의 그를 찾아보자.’
조말랑에게는 언제든 동원할 수 있는 인맥처럼 말했지만, 준혁이 가진 인맥은 적지주의 보은 명단에 적힌 과거의 인연.
하물며 본인이 아닌 적지주의 인연이었다.
명단에 적힌 상황들을 고려할 때 그들이 준혁을 도와줄 가능성은 매우 컸지만, 무조건적인 확신은 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전왕문 본문이 자리한 주운대륙의 보은 명단 속 인물을 가장 강한 순서로 나열한 후, 그중 적합하다고 판단한 인물들을 방문해 의사를 타진할 생각이었다.
그들이 바로 성주 소우자와 대륙 끝단에 살고 있다는 ‘무명’이라는 수사였다.
소우자는 제법 위명이 높아 조말랑도 알고 있었지만, ‘무명’이라는 수사는 이름이 무명인지 아니면 진짜 이름이 없어 무명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다만 두 사람 모두 대천경 수사였기에, 먼저 접촉해볼 요량이었다.
‘두 사람 다 거부한다면, 그땐 다른 방법을….’
어느새 뇌공지신의 힘으로 뇌기로부터 몸을 보호한 준혁은 비행법기를 최고 속도로 발동시키며 숲을 갈랐다.
한편, 준혁이 선착장에서 소천경 수사 셋을 처리하고, 뇌명숲을 가른 그 시각.
전왕문의 본문이 자리한 주운대륙의 서쪽 끝 성채에선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쾅! 콰자작-
"지금 그게 무슨 말이냐!! 반배와 다른 두 녀석도 당했다고?!"
널따란 대전, 그 중심에서 기묘한 그림들을 관심 있게 바라보던 면교만은 소식을 전해온 자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전해선 안 될 소식을 전했다는 듯, 얼굴에 핏발이 서고 있었다.
"예, 예. 조금 전 들어온 소식입니다요. 선착장에 출몰한 괴인이 흑석지부에 대기 중이던 대인 세 분을 전부…."
쾅- 콰직!
분을 참지 못한 면교만이 그림들을 수북이 쌓아놨던 탁자마저 날려버렸다.
소식을 전한 문인은 목을 한껏 움츠리고 부들부들 떨며 말을 이었다.
"그…. 괴인의 모습이 몇 해 전부터 수배에 오른 그자와 동일하다는…."
"그게 말이 된다 생각하느냐! 그놈은 겨우 소천경에 막 오른 놈이다! 어찌!"
물론 신배를 죽이고, 자신의 손에서 유유히 도망치긴 했지만, 한 명을 상대하는 것과 세 명을 동시 상대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더군다나 흑석지부에 그들 셋이 전부는 아니었다.
보조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을 텐데,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걸 면교만은 믿을 수가 없었다.
다만 면교만이 계산하지 못한 건, 준혁이 사신정이라는 특수 공간에서 다른 이들의 참견 없이 대치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소천경 수사들이 죽어 나가자 화신기 이하 수사들은 감히 덤빌 생각도, 막을 생각도 못 하고 자기 살기 위해 도망쳐 버렸다는 것도.
그때, 대전의 문이 열리며 새로운 이가 등장했다.
"면교만 어르신. 문주께서 부르십니다요."
문주라는 말에 역정을 내던 면교만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뭐라고 하시더냐?"
"다른 말씀은 없으시고…. 어르신을 모셔오라는 말밖에는…."
순간 면교만은 가슴이 철렁거림을 느꼈다.
그동안 ‘최’라는 망할 놈을 잡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전왕문의 역량을 사용했던가.
하지만 그에 비해 아무런 성과도 결과도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소천경 수사 셋이 죽어 나갔으니 그걸 문제 삼으려는 게 분명했다.
천휴림 같은 대세력이 아닌 이상, 소천경 수사 셋은 정말 큰 전력이었으니까.
"에잉. 알았다. 전부 나가보거라."
"지금 바로 오시라…."
"알았다 하지 않았느냐!! 썩 꺼져라!"
면교만이 살기를 실어 기파를 퍼트리자, 고개 숙이고 있던 두 명이 바들바들 떨며 뒷걸음질 쳤다.
그들이 사라지자 닫힌 문을 노려보던 면교만은 한참 동안 고민에 휩싸이다, 공간대에서 불꽃이 화려하게 그려진 목함을 꺼내 들었다.
"할 수 없지. 이제 유적의 비밀을 말해줄 수밖에. 겨우 영보급 법기가 아닌, 천영보가 관련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내 집착을 이해해주겠지."
사형제들에게 끝까지 비밀로 하던 걸 문주에게는 털어놔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
넉 달 후.
뇌명숲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뇌공조 무리를 피해, 최대한 빠르게 이동한 준혁은 숲 끝자락에 도달하고 있었다.
천천히 속도를 줄인 준혁은 흑석지부에 도착하자마자 정체가 발각됐던 걸 떠올렸다.
‘이번엔 절대 들켜선 안 된다.’
그리고는 고민을 거듭하다 과하지만 확실한 방법을 선택했다.
‘혈맥의 힘으로 기운을 바꾸는 것도 소용없었으니, 아예 존재를 지워야겠어.’
조말랑이 있었기에 시도하지 않았던 방법을 떠올린 준혁은, 곧장 무영기로 온몸을 감싸버렸다.
그리고는 비행법기마저 회수한 후, 무영기 위로 뇌공지신을 유지하며 뇌기가 옅어지는 숲의 끝으로 이동했다.
잠시 후, 숲이 끝나며 전왕문의 성채가 보이자, 뇌공지신의 힘을 거둬들이며 용천무의 날개를 꺼냈다.
공간 속에 숨을 수 있는 용천무의 날개와 기운을 차단하는 무영기의 조합이면, 어떤 정찰용 법기에도 걸리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태식 수사, 조금만 더 버티십시오.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으니.’
대천경 수사인 소우자와 무명.
두 사람 중 한 명만 손을 잡아주면, 대천경 수사가 문주로 있는 전왕문에서 태식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다 여겼다.
전왕문의 문주가 생각이 있는 자라면, 겨우 화신기 수사 한 명 때문에 동급 수사와 척지지 않으려 할 것이기 때문에.
만약 준혁의 예상과 달리 앞뒤 가리지 않고 무력을 사용한다면 그것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대막리의 경우를 보더라도 대천경 수사끼리의 싸움이 본격화되면 주위에 남아나는 게 없을 터.
그사이 태식을 구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오직 중요한 건, 단 한 가지.
두 사람 중 한 명이라도 적지주의 인연을 저버리지 않고 자신에게 도움을 주느냐 마느냐가 관건일 뿐이었다.
탕-
그때 몸을 숨긴 채 허공을 가르고 있던 준혁은 투명한 무언가에 부딪치며 강렬한 반발력에 튕겨 나가고 말았다.
‘이게 무슨?’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공간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지만, 무언가에 부딪친 순간 반짝거리며 영기파동이 퍼져나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결계? 설마, 숲의 경계 전체에 결계를 쳤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런 비효율적인 짓을 하기 위해선 막대한 영력이 소모될 터.
어마어마한 영석을 쏟아부어야만 가능한 일을 절대 실행할 리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건, 준혁의 판단.
준혁은 집착을 시작한 면교만을 너무 얕보고 있었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이 버러지 같은 놈아!"
어느새 준혁이 숨어있는 공간 상공에 나타난 면교만은 등 뒤에 떠 있던 직경 5미터가량의 거울로 빈 허공을 비추며 웃음 짓고 있었다.
"정말 보면 볼수록 대단하구나. 네놈이 진정 소천경 수사가 맞단 말이냐?"
면교만은 준혁을 볼 순 없고 대략적인 위치만 파악한 건지, 시선은 마주치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니. 설마 하고 준비한 월하만진(月下萬陳)과 대옥경(大玉鏡)이 아니었다면 놓치고 말았을 것이야. 하지만 이젠!"
웃음 짓던 면교만이 갑작스레 험악한 눈빛으로 손바닥을 교차하더니, 양손을 뻗었다.
그 순간. 거울이 비추는 범위 안 공기 질이 급격히 변하더니 준혁의 모습이 흐릿하게 나타났다.
"절대 살아나가지 못한다!!"
동시에 숲의 경계를 가로막고 있던 결계가 마치 춤을 추듯 울렁거리더니, 면교만과 준혁을 동시에 감싸며, 일대를 완벽하게 막아버렸다.
그리고는 그걸로도 준비가 충분하다고 여기지 않았는지, 결계 너머로 두 명의 수사가 소리 없이 나타나더니 기둥처럼 버티고 준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준혁은 처음으로 난처한 기색을 표했다.
‘위선경 수사! 설마 나 하나 잡자고 전왕문의 전력을 전부 끌고 왔단 말인가? 말도 안 된다!’
대천경 수사인 문주를 제외한 최고 전력인 위선경 수사 세 명.
면교만을 포함한 세 명 전원이 나타나 겨우 소천경에 오른 수사를 막아서다니, 준혁은 어처구니가 없어 혀를 내둘렀다.
"지금 저 하나 잡자고 세 분이 동시에 나서신단 말입니까?"
"크하하, 네놈 따위 잡자고? 그래 과하긴 하지? 하지만 도망가는 걸 막기 위해서지, 네놈 하나 처리하는 데는 나 혼자도 충분하다. 그땐 감히 나를 속이고 도망가? 이번엔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걸 깨닫게 해주마!"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세 명이 동시에 움직인다면 손쓸 수도 없이 당할 수 있었던 상황이라, 면교만의 말에 준혁은 마음을 다잡으며 도망갈 수를 떠올렸다.
‘결계 따위야 적마도로 가능하지만, 저 두 명이 순순히 나를 보내주진 않을 텐데….’
그나마 안전하게 벗어나기 위해선 다시 뇌명숲으로 향하는 게 최선이라 판단됐다.
하지만 무작정 도망친다고 위선경 수사 세 명을 따돌린 순 없는 일.
사막에서 면교만을 뿌리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대라멸진으로 사기를 쳤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때, 말을 끝낸 면교만이 양손을 뻗자 한 번 본 적이 있던 쇠꼬챙이 두 개가 허공에 나타나 준혁에게 쏘아졌다.
동시에 검은 흑판이 사방에 생겨나더니 뇌전을 반사해 힘을 키웠다.
‘이번엔 속전속결로 나서려나 보군.’
이전 전투에서 여유롭게 행동했던 면교만이 시작과 동시에 전력을 끌어올리자, 준혁은 쓰게 웃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방심하지 않는다면 어려운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때, 영기 파동이 퍼지며 압력이 어깨를 짓누르자, 준혁은 황급히 영역을 발동해 압력을 해소했다.
"그때도 느꼈지만, 정말 제법이야. 내 영역을 이 정도로 상쇄시키다니."
준혁의 영역이 자신의 영역 일부를 해소해버리자, 기분 나쁘다는 듯 면교만의 얼굴이 구겨졌다.
하지만 딱히 상관은 없는 듯, 양손을 지휘하듯 휘저었다.
그 순간, 쏘아져 오던 쇠꼬챙이가 허공중에 녹아 사라졌다.
슈아앙-
그러다 별안간 준혁의 눈앞에 나타나더니 좌우로 파고들었다.
준혁은 분광소를 소환해 놓은 상태에서 재빨리 양손을 모으며 합장했다.
차자장-
그 순간, 준혁의 양어깨 위로 녹색의 육각 타일이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커지며 온몸을 빈틈없이 막아버렸다.
하지만 쇠꼬챙이는 눈속임이었다는 듯, 하늘에서 콰과쾅 소리가 터지더니, 몸통만 한 뇌전이 작렬했다.
"같은 수라 지겹습니다!"
파앗-
준혁은 적마도의 순간이동 능력으로 순식간에 상황을 피하며 면교만을 도발하기 위해 입을 놀렸다.
그때 준혁을 직격하지 못한 뇌전이 그 주위에 떠 있던 쇠꼬챙이에 흡수되더니 또 한 번 방향을 틀며 쏟아져 나갔다.
‘위력이 또 증폭됐구나!’
흑색 판으로 증폭된 기운을 쇠꼬챙이가 피뢰침 역할로 받아들여, 또 한 번 위력이 배가 되었다.
준혁은 조금 전보다 더 강해지고 더 빨라진 뇌전을 피하기만 한다면, 점점 상황이 악화될 것으로 예측하고는 이번엔 합장한 자세에서 급하게 양손을 뻗어 뇌전을 막아섰다.
쿠콰쾅!
그러자 두 개의 쇠꼬챙이에서 증폭된 뇌전이 하나는 하얀 원반에, 또 하나는 검은 원반에 완벽하게 막혀버렸다.
파지직-
월광지력과 암흑마기를 각각 귀원패의 보호막에 주입해 방어에 성공한 것이었다.
‘윽, 다르긴 다르구나.’
전함을 꺼내 막았다면 수월했겠지만, 당장이라도 몸을 빼야 할 상황이라 맨몸으로 위선경의 공격을 막아선 준혁은 내심 상대방을 인정해야만 했다.
인성이 글러 먹었어도, 수행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때, 무엇을 눈치챈 건지 결계 밖에서 대기 중이던 두 명의 위선경 중 한 명이 뇌명숲 방향으로 날아가 팔짱을 낀 채 멈춰 섰다.
마치, 어디 도망갈 자신이 있으면 도망가 보라는 듯이.
그 모습에 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살짝 구기고 말았다.
"설마 또 도망갈 수 있다고 여기는 건 아닐 테지?"
면교만의 비웃음이 귓가를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