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사신정(死神庭) (1)
보은 명단에 적힌 인물들은 그 수가 제법 많았다.
“아! 들어본 적 있습니다! 아마 진선경에 오른 수사일 겁니다!”
그중 몇은 대황대륙을 떠난 적 없던 조말랑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적지주가 넘긴 법기들을 성급하게 흡수해버리지 않은 게 다행이라 여긴 준혁은 [보은] 옥간과 함께 법기들을 따로 공간팔찌에 넣어 보관했다.
그리고는 다양한 옥패와 신분패, 그리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몇 개의 명원패까지 확인을 거친 후 종류별로 모아두었다.
마지막으로 각종 옥간에 적힌 공법들과 비술 중 쓸 만한 것들을 선별한 후, 영석으로 의심되는 돌덩이를 집어 들었다.
“혹시 이것이 무언지 아는가?”
돌덩이를 살펴보던 준혁은 그것이 영석의 종류란 생각에 조말랑에게 보여주었다.
조말랑은 돌덩이를 받아들더니 이리저리 살피다 탄성을 내질렀다.
“오! 직접 보는 건 처음이지만, 초극영석(超極靈石)이 분명합니다!”
“초극영석?”
“특수한 장소에서 순수한 영기가 스스로 농축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것이라 들었습니다. 다만 너무 순수한 영기라 다른 기운에 물들기 쉽다고 들은 것도 같습니다.”
이어지는 조말랑의 설명에 초극영석의 성질이 진마정과 비슷하단 걸 깨달은 준혁은 보관함에 여러 개의 초극영석을 각각 따로 보관한 후 부적으로 봉인과정을 거쳤다.
당장의 쓰임새는 알 수 없지만, 그 가치가 진마정에 비견될 정도였기에 특별하게 보관했다.
“그럼 이제 속도 좀 내볼까?”
물품 정리를 마친 준혁은 여전히 숨어서 뒤따르는 노인을 느끼며, 아무렇지 않은 척 비행법기의 속도를 높였다.
그러자 그동안 준혁을 방해하지 않으려 조용히 있던 조말랑이 입을 열었다.
“근데 형님. 이대로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조금 위험하더라도 뇌공조 무리를 처리하면서 숲을 가로지르는 게 낫지 않을까요?”
흑석대륙과 주운대륙 사이에 놓인 뇌명숲, 뇌명숲의 양방향 출입구와 같은 곳엔 전왕문의 성채가 지키고 있었다.
굳이 전왕문의 성채를 통과하지 않아도 각각 대륙에 갈 수는 있었지만, 뇌공조 무리와 유난히 뇌기가 강한 지역을 피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정해진 길로 갈 수밖에 없었다.
조말랑의 의견은 바로 그렇게 정해진 길 외에 조금 위험하지만, 전왕문을 피해 다른 길로 흑석대륙에 가자는 말.
그리고 그 이윤 당연하게도 전왕문의 수사들이 자신들을 발견하면 가만두지 않을 걸 예측했기 때문이다.
‘이런 쪽으론 머리가 돌아가나 보군.’
그동안 조말랑을 애 취급하던 준혁은 그의 근심에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걱정 말게. 그들은 내가 주운대륙으로 향한다고 알고 있었으니, 흑석대륙으로 가는 길목엔 그리 큰 대비를 하지 않았을걸세.”
겨우 화신기 수사를 잡기 위해 면교만이 직접 움직일 리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 면교만이나 그 이상 가는 강자가 나타난다면….”
“나타난다면요?”
어떤 방법으로 위기를 탈출할지 알려달라는 조말랑의 시선에 준혁은 슬쩍 허공을 훔쳐보는 듯하다가 앞을 보며 말을 이었다.
“뭐, 도망가면 되지 않겠나?”
“네에?”
“하하하.”
***
전왕문 흑석지부.
언제나 활발한 상거래로 활기 넘쳤던 이곳은 얼마 전부터 분위기가 가라앉아있었다.
여전히 수많은 수사가 오가며 거래를 하고 여러 상단이 드나들었지만, 그들의 얼굴은 예전만큼 밝아 보이진 않았다.
그 이유인즉, 몇 해 전 전왕문의 간부와 그의 사형제들이 유적을 조사하기 위해 떠났다가, 임무에 실패한 건 물론, 수많은 사람이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벌어지게 만든 원흉이 존재해, 그놈을 잡겠다고 전왕문 수사들이 사방을 들쑤시면서 흑석지부의 분위기가 점점 가라앉게 된 것이었다.
“아니, 이해를 못 하겠네. 이미 도망갔다며? 어디로 사라진 건지도 모르면서 왜 허구한 날 죄 없는 우리 상인들을 들쑤시냐고!”
“예끼 이 사람아. 입조심하게!”
“내가 못 할 말 했나? 소문에 그 원흉인지 범인인지 하는 놈이 먼저 도망치고 면교, 크흠…. 아무튼 그 전왕문 사람들이 뒤늦게 쫓았다면서? 그럼 이미 대륙 너머로 사라졌을 텐데 왜 이렇게 들쑤시는 거냐고!”
불같이 화를 내는 통통한 상인 때문에 같이 있던 회색 머리의 꾀죄죄한 사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작은 목소리도 소곤거렸다.
“자넨 소식을 듣지 못한 겐가?”
“뭔 소식?”
“그 수많은 화신기 수사들을 죽게 만든 유적 사건의 진범, 그놈과 내통한 자가 전왕문에 있다는 것 아닌가.”
“정말?”
“그렇다네! 듣기로는 그 내통자가 면교만 수사의 제자라 그 말이네.”
어찌나 작은 소리였는지 귀를 바짝 대고 있던 통통한 상인은 잠시 후 귀를 후벼파며 한숨을 내쉬었다.
“허어, 어찌 그런 자가 전왕문에 있었을꼬? 쌍놈의 자식이구만, 근데 그거랑 지금 이렇게 감시가 심한 거랑 뭔 상관인가?”
“그 내통자가 범인과 제법 친분을 유지했던 모양일세. 그러니 이미 놓쳤을지도 모르는 그놈이 소문을 듣고 다시 나타나길 바라고 있는 것이지. 어쩌면 이미 그놈을 구하기 위해 숨어들었을 수도 있고.”
성채 내부에 은근하게 퍼져있는 소문.
수많은 화신기 수사들을 죽게 만들고, 전왕문의 고위수사를 죽이고 달아난 범인과 내통한 자가 성채 중심에 위치한 광장에 매달려있단 것이었다.
영력이 구속당해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그자는 원영이 특수한 비술로 억제돼 매일같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끼고 있다고 사람들의 입을 통해 알려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 수사들 사이의 소문일 뿐, 진실은 달랐다.
쾅!
“아직 소식이 없느냐?!”
충격에 탁자가 부서져 나갔지만, 반배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씩씩거리며 주변을 서성거렸다.
자신의 형제인 신배를 죽인 ‘최’라는 놈이 사라진 지도 벌써 두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한 번 놓친 범인을 사형의 제자인 태식으로 유인하고 있다 여기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전왕문엔 사람들이 모르는 비밀이 한 가지 있었는데, 바로 뇌명숲을 오가는 인원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기록하는 법기가 존재한다는 것.
당연하게도 ‘최’라는 괘씸한 놈을 놓친 면교만은 본문에 도착한 즉시 법기를 확인했고, ‘최’라는 놈이 본문과 흑석지부 양쪽 다 지나가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제야 또 한 번 놈에게 속은 걸 알게 된 면교만은 사람들을 풀어 감시 인원을 늘림과 동시에 한 가지 꾀를 내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제자인 태식을 미끼로 삼아 함정을 파는 것.
수행이 높은 자신과 싸우는 중에도 화신기 꼬마를 챙길 정도로 정이 있는 자라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문을 당하는 인연을 그저 지나치지 않을 거라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꼭 억울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게, 후일 조사를 통해 면교만의 제자 태식이 ‘최’가 떠나기 직전 임무가 수상하다며 만류했다는 걸 알아내 버렸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면교만은 가짜 함정이 아닌 진심으로 자신의 제자를 고문했고, 그는 실시간으로 죽어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준비를 갖추고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최’는 나타나질 않았다.
그랬기에 반배는 하루하루 지날수록 가슴이 답답해져, 성질마저 고약해져 가는 중이었다.
***
구름이 달을 가리고, 별빛마저 희미해져 가는 밤.
조용하던 전왕문 흑석지부 선착장에 소란이 일었다.
삐이익-
“나타났다!!”
준혁이 조말랑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도망치면 된다고 장난스레 말했지만, 진심으로 아무 준비 없이 전왕문을 통과할 생각은 없었다.
당연히 안전을 기하기 위해 혈맥의 힘으로 자신의 기운을 완벽히 치환시켰고, 외부마저 사신결 중 백호결을 사용해 완전한 영수족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곁에 있던 조말랑이 놀라 말을 더듬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변장 따윈 선착장에 발을 디딘 순간 소용없게 돼버렸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직경 3m가 넘을듯한 거울이 허공에 나타났고, 준혁을 가리키며 눈부신 빛을 쏟아냈다.
마치 ‘여기 범인 있어요! 찾았어요!’라고 소리 지르듯이.
그리고 거울이 빛을 뿌림과 동시에 사방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고, 순식간에 수사들에게 둘러싸여 버렸다.
“이것 참…. 어쩔 수 없겠구나.”
하지만 준혁은 크게 당황하진 않았다.
굳이 필요 없는 충돌을 피하기 위함이었지, 상대가 무서워서 변장을 했던 건 아니었으니까.
조금 과장을 덧붙인다면, 조말랑이 혼자서도 도망갈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이상, 면교만과 붙어도 상관없다고 여길 정도였다.
처음부터 그런 마음이었기에 조말랑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사이, 신호에 반응해 나타난 세 명의 수사 중 한 명이 분에 찬 소리를 질렀고, 준혁은 그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네 이놈!! 드디어 나타났구나! 신배를 죽인 잡놈이!!”
“여어~ 잘 지내셨습니까?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낯빛이 안 좋습니다.”
“으아아악!!”
콰앙!
반배는 준혁의 가벼운 도발조차 참지 못하고, 말이 끝나기도 전 허공을 박차며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동시에 반배 곁에 있던 나머지 두 명의 수사가 각각 법기를 꺼내 들더니 허공으로 내던졌다.
주위를 감싸고 있던 화신기 이하 수사들은 그 모습에 멀찍이 떨어지면서, 혹시나 범인이 도주할까 우려해, 합심해 거대한 결계를 형성했다.
‘소천경 수사 셋이라, 선수를 잡아야겠구나!’
그 모습에 준혁은 여유로운 척 한껏 거들먹거리는 것과는 반대로 속으론 냉정하게 상황을 살피며 공간대에서 종(鐘)을 꺼내 조말랑에게 던졌다.
댕~
그 순간 허공을 격해 조말랑에게 날아든 종이 좌우로 크게 흔들리며 종소리를 내었고, 종소리가 이어질 때마다 조말랑의 몸 위로 두꺼운 보호막이 여러 겹 생성되기 시작했다.
“천휴림의 극락종!!”
‘아니, 정확히는 대막리의 극락종이지.’
아무 생각 없이 달려드는 반배와 달리, 두 명의 수사는 극락종을 보더니 흠칫 놀라 출수를 꺼리는 모습을 보였다.
의도하지 않은 일에 내심 쾌재를 부른 준혁은.
“영역 선포!”
바로 주변 공간을 의지로 조종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반배 역시 즉각 영역을 만들어냈다.
투앙- 팡-
두 사람에게서 퍼진 파동이 물결처럼 주변을 뒤덮고 서로 잡아먹기 위해 애쓰자, 반배를 도우려던 두 명의 소천경 수사는 영역싸움의 결과를 지켜보기 위해 한발 물러섰다.
이미 비슷한 수행의 영역이 서로 상쇄하기 시작했으니, 거기에 또 다른 영역을 더한다 해도 크게 도움이 되진 않는 일.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이제부터 반배와 사투를 벌여야 하는 ‘최’라는 자가 방심하는 사이 기습을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게 그렇게 계획대로 되는 것일까?
영역이 상쇄되면서 두 개의 반구 사이에 의지력이 제거된 교집합 구역이 만들어진 순간.
준혁이 차갑게 웃더니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사신의 바람이여! 내가 노닐 곳을 마련하라!”
그 순간 그의 손가락에 껴있던 거무튀튀한 반지가 번개처럼 솟아오르더니 엄청난 대폭발을 일으켰다.
아니, 대폭발이라 여겼던 건 그저 보이지 않는 파동 때문이었고, 실제로는 검은 기운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지더니 주변을 촘촘히 둘러싸 버렸다.
“이, 이게 무슨!”
눈 깜짝할 사이,
영역이 상쇄되며 그 어떤 작용도 간섭할 수 없다고 여겼던 공간이, 거대한 검은 사각 틀 안에 완벽히 갇혀버렸다.
오직 준혁의 의지만으로 움직이는 사신의 놀이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