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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259화 (259/408)
  • 259화. 적지주 (3)

    ‘마선경의 눈동자가 왜!’

    식검에 나타난 괴상한 현상은 둘째치고, 흡수한 적은커녕 만난 적도 없는 마선경의 눈이 식검의 검신에 나타나자 준혁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당황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식검은 또 한 번 변화를 일으켰다.

    화아악-

    마선경의 흐릿한 눈이 문양의 중심에 나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부신 빛을 내뿜던 식검은 어느새 어린아이로 변해 있었다.

    ‘식아!’

    “오호, 저게 저 아이의 진짜 모습이구나!”

    탄성을 내뱉는 중괴와 달리 준혁은 식아의 모습에 머릿속 가득 의문이 생겨나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지?’

    식아의 모습은 예전에 보았던 귀여운 꼬마의 모습이 아니었다.

    등 뒤로 검신에 그려져 있던 108개의 선을 가진 도넛 모양의 핏빛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그 중심엔 여전히 흐릿한 마선경의 눈을 가지고 있었던 것.

    거기다 온몸에서 진득한 마선기가 흘러나와 마치 범접할 수 없는 고위 수사를 마주하는 것만 같았다.

    식아는 마치 살아있는 꼬마처럼 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허공에 손을 뻗어 잡아당겼다.

    그러자 준혁이 소환한 적도 없는 인지경이 허공에 나타나 식아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인지경을 마치 닭 다리 잡아 뜯듯 물어뜯었다.

    콰작-

    하지만 인지경은 작은 흠집도 남지 않았고 은은하게 빛만 발했다.

    마치, ‘아직 너 따위가 날 먹을 순 없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왜 갑자기? 초팔 다음엔 바로 위 서열의 마선을 먹어야 할 텐데.’

    식아의 행동에 준혁은 식검이 마선을 온전하게 잡아먹으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거기엔 엄연히 순서가 있는 법.

    왜 갑자기 식검이 순서를 무시하고 이상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오호! 잡아먹는다는 게 저런 뜻이었나? 그럼 적지주 그 친구도 아직 껍질은 남아있겠군?”

    그때, 식검이 서열이 낮은 순서대로 마선을 잡아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중괴의 말에 준혁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부르르 떨었다.

    ‘설마!!’

    그 순간 깨달은 한가지.

    108번째인 식아가 107번대부터 차례대로 잡아먹어 힘을 키워야 한다는 건 자신이 추론한 내용.

    백호의 말과 다른 사신들의 의견을 종합해 내린 결론이었다.

    물론 식아가 107번째로 태어났던 초팔에 특이 반응을 보였기에 확신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면?

    특정 조건만 갖춘다면 순서에 상관없이 마선을 먹어 치울 수 있다면?

    그 순간 인지경을 먹으려다 실패한 식아는 허공에 손을 뻗어 잡아끌더니 삼청조를 소환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먹는 것에 실패.

    그다음엔 토율서가 불려 나왔고, 그다음은 적마도였다.

    연달아 먹는 것에 실패하자, 식아는 심술이 난 듯 볼을 부풀렸다.

    그리고 그 모습에 중괴가 준혁에게 불신의 눈빛을 보냈다.

    “적마까지? 저 친구가 삶에 회의를 느꼈다고? 저 미친놈이?”

    날카로운 시선에 준혁이 핑곗거리를 찾으려는 찰나, 식아에게 또 한 번 변화가 찾아왔다.

    적마도를 잡아먹는 것까지 실패하자, 식아의 등 뒤에 있던 흐릿한 마선경의 눈이 완전히 사라져버렸고, 식아의 모습은 원래 식검의 모습으로 돌아와 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땡그랑-

    동시에 소환되어있던 각종 마선 법기들이 바닥에 떨어졌고, 그 모습에 중괴가 움직이려는 순간. 준혁은 모든 법기를 한 번에 소환해 감춰버렸다.

    그러자 중괴가 의혹 가득한 얼굴로 준혁을 응시했다.

    “자네…. 나랑 얘기 좀 해야겠는데?”

    ***

    “그러니까 적마는 달랐다?”

    중괴라 불린 노인은 적마와도 친분이 있는지, 그의 성격에 절대 스스로 귀천을 할 리 없다고 확신했다.

    “그렇습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스스로 영면에 들길 바랐지만, 적마 그는…. 식아의 존재를 알아차리자마자 저를 죽이려 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다 보니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것이지요.”

    “흐음. 그건 이해되는군. 그 미친놈이 특이한 거라면 참질 못하니깐. 도둑놈의 새…. 크흠.”

    헛기침을 연달아 한 후, 분위기가 변하자 노인은 다른 주제를 꺼내 들었다.

    “적지주 그 친구의 껍질을 보여줄 수 있는가?”

    준혁은 속으로 적지주를 부르며 손을 내밀었다.

    지이잉-

    그 순간 허공이 갈라지며 말랑말랑한 붉은 거미가 튀어나왔고, 노인은 놀라는 듯하더니 거미를 잡아채 확인에 들어갔다.

    한참이 지난 후, 거미를 돌려주며 탄식을 내뱉었다.

    “미안허이. 그댈 못 믿은 건 아니지만, 확인은 필요했네. 정말 껍데기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군. 후우….”

    확인 작업이 끝나자, 적지주가 진짜 영면에 들었다는 걸 믿는 듯,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말없이 준혁을 바라보았다.

    마치 다른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지, 숨기는 건 없는지, 내면을 살펴보듯 지긋이 눈길을 주었다.

    그러길 한참. 결국 준혁을 믿기로 한 건지, 작은 끄덕임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작별 인사를 하듯 가볍게 손을 흔들고 허공에 녹아들 듯 모습을 감춰버렸다.

    노인이 사라지고 나자, 위치를 특정할 수 없는 곳에서 목소리만이 들렸다.

    -인연이 된다면 또 보겠지. 내 친구에 안식을 전해줘서 고맙네. 언젠가 다시 만나세.

    “저, 혀, 형님…. 지금 이게 다 무슨….”

    그때서야 조말랑이 힘겹게 말을 꺼내며 다가왔지만, 준혁은 생각할 게 너무 많았기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조금 전까지 식아가 자리하고 있던 곳만 바라볼 뿐이었다.

    ***

    ‘내가 너무 편협했다. 마치 정답을 찾은 것처럼 혼자 들떠서, 결과를 확정 지어버렸어.’

    노인이 사라지고 난 뒤, 흑석대륙으로 방향을 잡은 준혁은 날아가는 비행법기에 앉아 깊은 고뇌에 빠져들었다.

    ‘지금 일어난 현상으로 보면 분명 적지주가 가진 인연의 힘 때문에 일어난 반응이다. 그렇다면 왜?’

    왜? 순서에 상관없이 마선 법기들을 씹어먹을 것 같던 식아가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채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버렸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준혁은 그것이 마선경의 눈과 관련 있다고 판단했다.

    적마에 대해 추궁하기 전 중괴가 해준 말에 의하면 식검의 검신에 나타난 문양은 마선경이 법기 형태로 나타날 때의 모습과 거의 흡사하다는 것.

    실제로 마선경의 적안이 나타나면 그 안에 영력으로 감춰진 문양이 보이는데, 그것이 식검에게 나타난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유일하게 다른 건 흐릿한 눈!’

    억지 추론을 빼고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자면, 적지주의 인연의 힘과 마선경의 눈이 만나면 식아의 봉인을 해제한다고 봐야 했다.

    이번에 아무것도 먹지 못한 건 결국 마선경을 얻지 못했기 때문.

    그것이 선명한 문양 사이에서 눈동자만이 유일하게 흐릿했던 이유라 판단했다.

    ‘아니, 이것도 확신하지 말자. 불충분한 정보로 결론을 내린다면 정작 중요한 걸 놓칠 수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 한가지.

    그건 식검이 일정 조건만 만족한다면 순서에 상관없이 다른 마선들을 잡아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고, 그렇게만 된다면.

    ‘폭발적으로 강해질 수 있다!’

    다른 마선들과 달리 온전하게 흡수한 초팔의 능력은 대단했다.

    초팔의 여덟 가지 초감각은 마치 원래 준혁의 능력처럼 상시 적용됐고, 영력을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그랬기에 다른 마선들을 온전히 흡수할 수만 있다면 수행을 뛰어넘는 무언가에 다다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여서령의 만나 인연을 이어가는 것도 중요했지만, 힘의 논리가 우선되는 선계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 싶다면, 강해지는 건 필수였으니까.

    ‘그나저나 저 노인네는 떠날 것처럼 사라지더니.’

    생각을 정리한 준혁은 비행법기에 앉아 조말랑의 상태를 점검해주는 척하며 허공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했다.

    어느 곳에 숨어있는지 특정할 수도 없을 만큼 미미한 기운.

    만약 초팔의 초감각을 얻지 못했다면 절대 느낄 수도 없는 미세한 공간의 비틀림.

    노인과 헤어진 순간부터 느낀 것이라, 그가 떠난 척하며 뒤를 따르고 있다는 건 쉽게 예상 가능했다.

    ‘아직 나에 대한 의심을 지우지 않은 건가?’

    적마도를 본 후, 자신의 유일한 친우가 진짜 영면에 든 것인지, 아니면 다른 비술로 사기를 당한 건지 의심하던 노인을 떠올리던 준혁은 신경을 유지하며 관심에서 지워버렸다.

    그가 몰래 따르고자 한다면 절대 지금의 준혁으로서는 제지할 수 없었으니, 굳이 심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오히려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만 보장된다면, 노인의 존재는 든든한 보호막이 될 수도 있었다.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지.’

    그랬기에 준혁은 그에 대한 걱정은 지워버리고 적지주가 남긴 물건들을 살폈다.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건 천영보 사신정.

    사신정을 기감으로 유심히 살피던 준혁은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 삼켰다.

    잠시 후 원영에게 이동된 사신정은 사각의 공간을 만들어내더니 원영과 원영이 머물던 단(丹)을 통째로 감싸버렸다.

    “이런 것이었구나….”

    내부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준혁의 얼굴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신정 역시 공간에 관여하는 보물.

    그 끝을 파악하긴 아직 준혁의 수행으론 힘든 일이었지만, 용천무의 날개만큼이나 위력적이란 걸 깨달았다.

    그러다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있어 손을 가볍게 흔들었고, 어느새 준혁의 손엔 벽돌 모양의 법기가 나타나 있었다.

    ‘징벌의 방.’

    하계에서 마족의 거주지에 갔을 때 얻었던 공간 법기. 일정 공간을 확장해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했던 법기였다.

    아주 가끔 거처 내부에서 수련할 때, 술법의 위력을 확인하기 위한 용도가 아니면 꺼내지 않던 물건이었다.

    벽돌 법기에 영력을 주입해 원영이 다루고 있는 사신정과 비교해본 준혁은 두 법기의 차이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징벌의 방이라 불린 벽돌 법기는 공간을 확장하고 완벽하게 보호할 수는 있을지언정, 사용자의 의지를 반영하지 않았다.

    즉 발동하고 나면 사용자가 누구든 내부에 있는 자들은 모두 동일한 힘의 구속에 놓이는 것.

    하지만 사신정은 마치 영역처럼 사용자의 의지에 반응해 변화를 일으켰다.

    ‘완벽하게 다룰 수만 있다면, 또 하나의 영역을 손에 쥔 것과 마찬가지겠어.’

    삼선급의 선인이 사신정을 다루는 모습을 상상해본 준혁은 원영이 사신정을 연화시키도록 내버려 둔 채, 적지주가 남긴 공간팔찌 안을 확인했다.

    “흠. 많기도 하구나.”

    공간팔찌 자체가 준혁이 가진 것과는 차원이 다른 상급 물건이었다.

    그리고 그 안엔 영보급엔 미치지 못하지만 다양한 법기들이 있었고, 단약으로 의심되는 수많은 자기병들과, 옥간, 그리고 영석으로 의심되는 짙은 영기를 함유한 돌들도 다량 존재했다.

    그 외에도 각종 옥패와 잡다한 물건들이 가득해, 선별하고 선별한 것 중 몇 가지만 넘겨주었다는 적지주의 말이 떠올라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먼저 법기들을 꺼내 확인해본 준혁은 자신에겐 필요가 있나 없나 고민해보며 하나씩 선별했다.

    그 후엔 자기병을 열어 그 안의 단약을 세심히 살폈다.

    “이런 게 기연이구나….”

    생각지도 못한 선물. 자기병 속 단약은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하나같이 영롱한 영기를 함유하고 있어 지금의 수행에도 크게 도움이 될법한 물건들이었다.

    쓸모 있을법한 것을 선별했다는 적지주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다음으로 옥간들을 하나씩 확인하던 준혁은 [보은]이라고 적힌 옥간 속 내용에 조금 전 확인했던 법기들을 하나씩 재확인했다.

    “이런 의미였구나!”

    꽤 뛰어났지만, 쓸모가 없다고 여겼던 법기들.

    적지주가 그 물건들을 준혁에게 넘겨준 건 사용하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보은]이라 적힌 옥간 속 인물들과 그들의 애병이었던 법기.

    수많은 법기는 적지주에게 빚을 진 수많은 수사들이 훗날 은혜를 갚겠다는 증표로 남겨놓은 물건들이었다.

    그랬다. 어쩌면 자기병 속 단약은 비교도 되지 않을 보물이 바로 인연의 증표로 모아놓은 법기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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