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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257화 (257/408)
  • 257화. 적지주 (1)

    “알고 있습니다. 적지주께서 뇌명숲으로 오신 뒤 그 어떤 인연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요. 허나 그전에, 인연을 찾기 위해 찾아온 자들에게 시련을 내렸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저에게도 기회를 주실 수 있습니까?”

    남운상단의 학고응에게 전해 듣기로 적지주는 인연을 찾아주는 대가로 한 가지를 원했다고 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 요구를 이행하지 못했고, 대신 각종 보물로 대가를 대체했다.

    그리고 최근 들어 그 요구마저 원하지 않고 뇌명숲에 잠적해 버렸다는 얘기도.

    준혁의 발언에 황금빛 막이 변화를 보이더니 눈매가 서글서글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막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손만 뻗어도 닿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기회? 설마 그대에게 방법이 있단 말인가?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걸, 아니 시도조차 못 했다는 건 듣지 못했나?

    “저는 할 수 있습니다. 이게 그 증거입니다.”

    준혁이 손을 살짝 흔들자, 어느새 나타난 녹색 패가 황금막으로 날아갔다. 그리고는 아무 방해도 없이 막을 통과해 노인의 손에 안착했다.

    노인은 준혁의 말에 흥미를 보이다 녹색 패를 보고는 경악성을 내질렀다.

    전음이 아닌 육성이 터져 나오며.

    “귀원패!! 마, 말도 안 된다! 정말 이게 거북황이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이럴 수가, 진실로 마선을 잠재울 수 있다니…. 정녕 귀원패가 죽어 이렇게 법기 형태의 껍질만 남게 되었단 말이냐?”

    적지주가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했던 부탁.

    그건 영원불멸한 마선의 삶을 끝내줄, 영원한 안식을 찾는 것이었다.

    학고응도 자신이 알아낸 정보가 정확한 것인지 확신하지 못한 채로 정보를 넘겨주었다.

    모든 수도자의 최종목적은 영생을 사는 것. 그런 최종목적에 근접한 능력을 타고난 마선이 스스로 삶을 저버리고 싶다는 정보에 신빙성이 없다고 여긴 것.

    하지만, 준혁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귀원패의 경우를 보더라도 영원불멸이 누군가에겐 고통이 될 수도 있는 법. 하물며 원하지 않는 수많은 인연을 알아보고 그것을 연결해주는 게 능력이라면, 성향에 따라 그것은 너무 큰 고통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 적지주가 죽음을 원하는 건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저에겐 안식을 줄 방법이 있습니다. 이 정도면 적지주님을 만나볼 자격은 되지 않겠습니까?”

    지잉-

    그 순간 돔처럼 일대를 뒤덮고 있던 황금 막에 작은 구멍이 생겨났다.

    “믿을 수 없지만, 이걸 보고 믿지 않을 수도 없군. 들어오시게. 그는 누구도 만나길 원치 않았지만, 그대라면 생각을 달리할 거 같으니.”

    문을 만들어주고 따라오란 듯 멀어져가는 노인의 모습에 준혁과 조말랑은 황급히 황금빛 막 안으로 몸을 날렸다.

    “어?”

    순간 놀라는 조말랑.

    그리고 준혁 역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황금빛 막 안은 뇌명숲의 뇌기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풍부하다 못해 질식할 거 같은 영기로 가득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저 노인…. 저자도 마선이었구나!’

    천천히 멀어져가는 노인을 향해, 식검이 배가 고프다는 듯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

    노인을 따라 안쪽 깊숙이 이동하길 한참.

    준혁은 황금빛 막이 누군가의 영역이라는 걸 깨달았다. 있는 듯 없는 듯 아무런 제재력이 없었지만, 황금빛 막은 외부의 뇌기를 받아들여 순수한 영기로 만들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구나.’

    적지주의 영역인지, 노인의 능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능력이었기에 준혁은 마음 한편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여서령을 만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방문이었지만, 어떤 의미로는 이곳은 면교만의 함정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위험한 곳이었으니까.

    “형님 정말 대단합니다. 이런 곳이 뇌명숲에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처음부터 이곳이 목적이셨던 겁니까?”

    쫑알대는 조말랑은 신경도 쓰지 못한 채, 만에 하나 발생할 위험을 예측하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길 한참.

    거침없이 이동하던 노인이 20여 미터가 넘는 황금빛 나무 앞에 멈춰서자, 덩달아 정지하며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이곳이네, 내 기별을 넣었으니 잠시만 기다리면, 벌써 나오는군.”

    노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황금빛 나무의 껍질 위로 사람 형상이 나타나더니, 잠시 후 완전한 형태를 갖춰 노인 옆에 내려섰다.

    붉은 머리가 수십 갈래로 꼬여있는 것이 거미를 연상하게 만들어, 누가 보아도 적지주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무슨 일이야? 아직 시간이 남은 거로 아는데? 에? 이것들은 뭐지?”

    적지주는 귀찮은 내색을 하다가 준혁과 조말랑을 발견하고는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못 볼 걸 봤다는 느낌이었다.

    “사람하고는, 내 말을 들어보게 이들이 누구냐면….”

    노인이 설명을 이으려는 찰나, 준혁은 적지주를 향해 손을 저었다.

    그러자 그의 앞으로 토율서 그리고 삼청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에 적지주뿐 아니라 노인마저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놀란 표정이 되자, 준혁은 빠르게 입을 열었다.

    “적지주님께서 영면에 들고 싶다 들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에겐 그럴 능력이 있고 말입니다. 만약 제가 찾고자 하는 인연을 찾아주신다면, 그들과 마찬가지로 수사께도 영면을 선물하겠습니다.”

    “귀원패뿐이 아니었구나!”

    노인은 준혁의 말은 신경도 쓰지 않고 눈앞에 소환된 다른 마선들을 살피기 급급했다.

    적지주도 놀람을 내리누르며 삼청조를 손에 잡아 말을 걸고 있었다.

    “이보게 삼청, 내 말 들리는가? 이보게! 삼청! 허. 이들이…. 전부. 설마…. 전부 영면에 든 것이란 말인가?”

    물론 진짜 영면에 든 것은 초팔 하나뿐이었지만, 준혁은 거침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수사께서 무슨 이유로 영면에 드시려는 건지는 모르나, 그들은 하나같이 삶에 깊은 회의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여 저는 그들에게 조금의 대가를 받고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었고 말입니다.”

    준혁이 말을 이어가려던 그 순간, 수박만 한 구가 만들어지더니 삼청조를 감싸버렸다.

    ‘영역으로 확인한다고 반응을 보이진 않을 겁니다.’

    적지주는 준혁의 말을 믿지 못하겠는지, 영역을 시작으로 몇 가지 더 확인 작업을 거쳤다.

    그러다 심각한 표정으로 변하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퓨숙-

    그 순간 그의 손끝에서 붉은 실이 뿜어져 나와 삼청조의 몸을 칭칭 감아버렸다.

    ‘저것이 인연실이구나.’

    준혁은 적지주의 행동에 자신의 팔목에 숨겨놓았던 붉은 실이 반응한다는 걸 느끼며 그 모습을 예의 주시했다.

    잠시 후, 적지주는 확인 작업이 끝난 건지, 허탈한 얼굴로 준혁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허어…. 정녕. 현세, 그 어디에서도 삼청조가 느껴지지 않는구나. 정녕 영면에 든 것이란 말인가? 내 평생 이 답을 찾기 위해 방황했거늘.”

    무언가 회한이 담긴 시선을 보내던 적지주는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나?”

    “말씀하십시오.”

    여전히 다른 마선들을 살피는 노인을 뒤로한 채 두 사람은 조금 더 가까이 서로에게 다가갔다.

    “내가 평생을 영면에 들기 위해 노력해온 것을 알지 모르겠네. 혹, 그 방법을 나에게 알려줄 수 있는가?”

    노인의 부탁에 잠시 고민하던 준혁은 한 손을 뻗어 그 위로 식검을 불러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다른 마선들을 소환할 때, 인지경과 적마도, 분광소 같이 전투에 적합한 것들은 숨겨놓고 있던 상황.

    하지만 식검은 마선에 접촉한 순간 능력이 발휘되기에 가장 중요한 비밀임에도 오히려 안심하고 꺼낼 수 있었다.

    우우웅-

    체외로 나온 식검이 마치 먹이를 앞에 둔 짐승처럼 요동치자, 그 모습에 적지주뿐 아니라 눈매가 서늘한 노인마저 동공이 확장되다 못해 찢어질 듯 커졌다.

    “서, 설마!!”

    “예상하시는 것이 맞습니다. 이 아이의 이름은 식아. 마선들에게 영면을 주기 위해 태어난 아이입니다.”

    그 순간 노인이 성큼 뒤로 물러났고, 적지주는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식아. 아! 기억나네. 마선경과 괴조가 경고했었지. 모든 마선을 잡아먹을 아이가 태어났다고 말이야. 그때 그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어. 다만 마선경과 괴조가 강하게 주장하기에 천신라와 마규보가 수하들을 움직였다는 소문은 들었지…. 그 아이가 이 아이라니….”

    어느새 식검을 잡아챌 만큼 적지주가 다가오자, 준혁은 식검을 원영에게 돌려보내 버렸다.

    “아….”

    아쉬워하는 적지주를 향해 말했다.

    “저는 제 모든 것을 숨김없이 보여드렸습니다. 그러니 적지주께 묻고 싶습니다. 제가 영면에 드시는 걸 도와드린다면. 제 인연을 찾아주시겠습니까?”

    적지주를 식검으로 흡수한다고 해서 그의 능력을 완벽하게 따라 할 수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만에 하나 공천령처럼 특수능력을 사용하는 데 조건이 붙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준혁은 그를 흡수하기 전에 여서령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싶었다.

    적지주는 처음의 아니꼽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식아를 본 후로 그 누구보다 온화하고 따뜻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물론일세. 자네 손목에 감겨있는 그 인연을 찾아주면 되는 것일 테지.”

    보이지 않게 숨겼음에도 단번에 알아보는 적지주.

    준혁이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다가 눈을 번쩍 치켜떴다.

    그러자 그의 눈이 붉게 변하며 얼굴 전체에 거미줄 같은 핏줄이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흉신악살 같은 얼굴을 유지하던 적지주가 입매를 비틀며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하늘에 붉은 테두리가 생겨나더니, 그 안에 여서령과 똑같이 생긴 여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

    준혁은 물론,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조말랑마저 깜짝 놀라 시선을 들었다.

    잠시 후 그녀의 얼굴이 점점 작아지며 그녀를 바라보던 시점에 변화가 생기더니, 그녀의 집, 그녀가 사는 마을, 그 후엔 드넓은 대륙의 모습으로 멀어지다가 구름에 가려지듯 사라졌다.

    마치 인물을 먼저 찾고, 점점 시야를 확대해나가 어디에 있는지 특정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준혁의 예상이 맞는 듯.

    적지주는 자세를 바로 한 후 처음의 온화한 얼굴로 돌아오며 말을 이었다.

    “남운대륙의 운종가(雲從家), 그곳에 자네의 인연이 있네.”

    ‘드디어…. 찾았구나.’

    준혁은 결단기 수사일 때 했던 약속을 드디어 지킬 수 있게 됐다는 것에 기뻐했다.

    하지만 감상도 잠시.

    적지주가 성큼 다가오며 자신의 가슴을 활짝 열었다.

    “자. 이제 되었지. 그럼 자네도 나를 영면에 들게 해주게!”

    ***

    준혁의 만류로 적지주의 영면은 잠시 보류상태가 되었다.

    이제 진짜 끝이라는 준혁의 말에 적지주는 자신이 성급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살아온 발자취를 정리하게 시작했다.

    하지만 그 시간마저 그리 길지 않았다.

    기회가 있을 때 잡으려고 하는 것인지, 그는 겨우 반나절 만에 모든 걸 정리했다.

    “자네, 정녕 이리 떠날 건가?”

    “그동안 고마웠네. 나 때문에 고생 많았어. 이번에도 말이야.”

    “고생이라니. 자네도 알지 않아? 내가 그리했던 건….”

    “알지. 그리고 이제 내가 아닌 다른 곳에 관심을 둘 거라는 것도 말이야. 안 그런가?”

    적지주는 노인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다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준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눈매가 서글서글한 노인도 덩달아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준혁을 바라보았다.

    마치 서로만 알아들을 수 있는 모종의 대화를 눈으로 나누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마지막 인사를 끝마쳤는지, 적지주가 노인에게 무언가를 건넨 후, 준혁에게 다가와 공간팔찌 하나를 건넸다.

    “이게 무엇입니까?”

    “내 삶을 정리하다 보니 그동안 쓸모가 있을까 싶어 모아둔 것이 적지 않더군. 어차피 저 친구에게 필요 없는 물건. 이것도 인연인데 자네가 가지게나.”

    인연이란 말을 유독 강조하자, 준혁은 잠시 생각을 하다 그의 팔찌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은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는 법.

    준혁은 공간팔찌를 수납하며 물었다.

    “혹, 다른 부탁이 있으신 겁니까?”

    그러자 적지주가 놀랐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어린 친구가 제법이구먼. 그리 말하니 허심탄회하게 말하겠네. 혹시 사왕(死王)이라고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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