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뇌명숲으로 (2)
“명왕?”
명왕(命王)이라면 대황대륙의 팔황이라 불리는 여덟 왕 중 한 명.
그들이 정확히 어떤 규모의 세력인지, 어떤 종족인지는 모르나, 준혁은 조호랑에게 얼핏 들은 팔왕에 대해 떠올렸다.
대황대륙에 넓게 포진되어 있는 여덟 왕은 각각 불리는 이름이 있었는데, 그중 조호랑의 조부인 태백랑 교천모가 낭왕(狼王)이라 불렸고, 초왕(草王), 지왕(地王), 현왕(賢王) 등 각각 세력을 대표하는 명칭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 명왕은 생명을 주관한다는 명칭이 부여되었지만, 자세한 사항은 준혁도 알지 못했다.
애초에 관심거리가 아니었기에 흘려 지나가듯 설명하는 조호랑의 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탓이다.
그나마 기억나는 것이라곤.
“명왕과 사왕이 혈전을 벌인 후 세력이 크게 줄었다 했던가?”
기억을 되뇌며 팔왕과 명왕에 대해 떠올리던 준혁은 결국 자신이 아는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에 추론을 멈췄다.
손안에 든 지도가 팔왕인 명왕과 관련된 유적인지 아니면 이름만 같은 것인지도 분별할 수 없는 지금, 더 생각을 이어가는 건 의미 없다 여겼다.
하지만 특정 유적의 내부 지도는 매우 귀한 것이었기에, 피리를 공간대 한쪽에 고이 모셔둔 후, 준혁은 연이어 삼지창과 목걸이형 보호법기를 차례로 확인했다.
“제법이구나.”
삼지창은 흔한 공격형 법기 종류였지만, 목걸이는 영보급에는 미치지 못하나 막대한 영력을 품은 최상급 법기였다.
그 뒤로 각종 옥간을 확인하고 영석과 잡재료들의 분류를 끝낸 준혁은 도움이 되지 않을 법기들을 혈단법으로 흡수해버렸다.
법기를 흡수한 후 모여든 영기는 즉각 원영에게 인도하고, 혈단법으로 인한 탁기는 암흑마기로 치환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조말랑의 상태를 기감으로 살핀 후, 뇌공지신이 적힌 옥간을 집어 들었다.
6개월간 몸을 회복하며 틈틈이 공법을 운용하긴 했지만, 아직 완벽하게 다룰 수 있는 건 아니었기에, 조말랑이 치료를 끝낼 때까지 남은 시간은 뇌공지신에 몰두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갔다.
***
조말랑이 치료에 돌입한 후 정확히 1년 6개월.
준혁이 뇌공지신으로 석실 하나를 온전히 뒤덮을 정도가 되었을 때, 조말랑은 잘린 팔을 복구해내고는 사뭇 겸손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긴 시간을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수사.”
“아니네. 나도 뇌공지신을 익혀야 했으니, 딱히 그대 때문만은 아니야. 과례는 넣어두게.”
준혁이 손사래를 치자, 치료 전보다 정신적으로 성장한 조말랑이 거듭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팔을 치료하며 제 행동에 대한 반성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만약 수사를 만나지 못했다면 전 필히 죽었겠지요? 누이의 잔소리가 지겹고, 매일 보는 세상이 지겨워 여행을 떠나온 것인데…. 제가 얼마나 부족하고 어리석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허, 그런 깨달음을 얻은 것만으로 충분하네.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이지.”
조말랑을 지긋이 내려보던 준혁은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말을 멈추려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대가 남이 아니라 생각해 한마디 더 하겠네.”
“경청하겠습니다.”
“누구에게나 사고가 확장하는 시기가 불현듯 찾아오는 법일세. 하지만 그들 모두가 성숙해지고 발전하는 것은 아니지. 지금 그대가 깨달은 것들을 머리만이 아닌 가슴으로 이해하고 이행하게. 그래야 한발 내디딜 수 있을 것이네.”
준혁이 말하는 바를 이해한 건지, 조말랑은 진지한 얼굴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양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반 무릎 자세를 취하며 몸을 숙였다.
백랑족이 공경하는 웃어른께 올리는 인사였다.
“허락해주신다면 수행과 위치를 떠나, 최준혁 수사를 형님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그동안 너무 급박한 상황이라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처음 뵀을 때부터 알 수 없는 친밀함이 느껴졌습니다. 갑작스런 결정이 아니니 허락해 주십시오.”
‘혈맥의 영향인가?’
친밀함의 원인은 당연히 심영근과 천혈 때문.
생각에 빠진 듯 조말랑을 바라보던 준혁은 그의 머리에 손을 가볍게 올렸다.
“앞으로 그리하게. 단 나를 따르기엔 아직 부족하니, 당분간 부족으로 돌아가 수련에 전념하게나.”
움찔-
조말랑은 자신의 속내를 들켰는지 눈빛이 좌우로 흔들리다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형님. 대신 나중엔 형님을 따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좋네. 다음번엔 가출이 아니라 당당히 떠나오게. 그럼 그땐 함께해줄 테니.”
준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말랑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 알고 계셨습니까?”
“그야 예상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조호랑 수사의 성격에 이런 철부지 동생을 혼자 보낼 리 없으니.”
“아…. 형님의 눈썰미는 못 당하겠습니다.”
조말랑은 듬직한 형이 생겼다며 백랑족의 신분패를 준혁에게 건넸다. 혹시라도 대황대륙에 찾아오면 반드시 백랑족에게 오라는 말과 함께.
“그럼 흑석대륙으로 데려다줄 테니, 곧장 돌아가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형님.”
***
지상으로 올라온 준혁은 신배의 공간대에서 발견한 비파처럼 생긴 비행법기를 꺼내 조말랑을 태웠다.
그리고는 뇌명숲 방향이 아닌 사막 쪽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이동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비행법기와는 차원이 다르구나.’
자신이 둔광을 일으켜 날아가던 속도와 거의 비슷한 성능의 비행법기에 흡족해하는 사이, 조말랑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질문했다.
“형님. 이쪽은 저희가 도망쳐온 유적이 있는 방향 아닙니까?”
“맞네.”
“왜….”
이해 못 하겠다는 듯 의문 가득한 눈빛의 조말랑을 보며 준혁은 피식 웃어주었다.
굳이 대답할 필요도 없이 보여주면 되는 일.
며칠 후 십이진식이 깨진 12개의 화염 구덩이와 덩그러니 놓인 유적의 입구 앞에 도착한 준혁은 식검과 적마도를 꺼내 들며 가까이 다가갔다.
‘역시, 진이 깨져도 한번 나타난 입구가 사라지진 않구나.’
입구가 나타난 순간 준혁의 장난질로 열쇠 역할의 진식이 사라져 버렸지만, 입구 자체는 처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신을 잡기 위해 움직였을 면교만이 빠른 시간 안에 다시 유적을 활성화하지 못했을 거라 판단한 준혁은 예상이 맞아떨어지자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것 같았다.
“형님, 왜 이곳에?”
혹시나 면교만이 다시 나타날까 불안한 눈빛으로 사방을 살피던 조말랑의 질문에 준혁은 씨익 웃어 보였다.
“잠시만 기다리게나. 가져와야 할 게 있으니.”
그리고는 붉은 말을 소환하며 모습을 감춰버렸다.
“혀, 형님!!”
갑자기 사라져 버린 준혁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던 조말랑은 몇 시간 후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난 준혁을 보고는 더 놀라야만 했다.
“형님! 모, 모습이!”
사라지기 직전 깔끔했던 준혁은 여기저기가 불에 그을린 듯 상처로 가득했고, 영력마저 요동치는 게 느껴질 만큼 불안정했다.
한눈에 보아도 짧은 시간 안에 지독한 사투를 벌인 것 같은 모습.
조말랑의 눈에만 그렇게 보인 것이 아니었는지, 준혁은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바닥에 주저앉으며 신배에게서 얻은 온전한 반초단을 삼키고는 몸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한참 후에야 신색을 회복했는지, 옅은 웃음과 함께 몸을 일으키며 곳곳을 가볍게 털었다.
조말랑이 벙찐 눈으로 응시하고 있자, 준혁은 비행법기를 꺼내며 그 위로 가볍게 올라섰다.
“가세나. 이곳에서 볼일은 끝났으니.”
그제야, 준혁의 행동을 유추한 조말랑이 다급하게 물었다.
“설마? 유적 안에 다녀오신 겁니까?”
정말 그렇다면 그건 대단한 일이었다.
문이 굳게 닫힌 유적을 마음대로 오갈 수 있다니?
하지만 조말랑의 궁금증에도 불구하고 준혁은 어서 법기에 타라는 듯 손만 까딱거릴 뿐 말을 아끼고 있었다.
다만 입가가 올라간 걸 보면 이곳에서 얻은 이득이 적지 않은 듯했다.
***
콰과쾅!
천둥소리가 쉬지 않고 울리는 뇌명숲을 가르는 비파처럼 생긴 비행법기 위.
아무 대답을 듣지 못했기 때문일까?
시무룩하게 앉아 천둥소리를 내는 나무를 관찰하던 조말랑을 보며 준혁은 유적 안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면교만이 살피던 유적이 최종 목적지가 아닌 중간 과정이란 걸 알게 된 후, 시간이 된다면 남몰래 그곳을 털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성공만 한다면, 세 곳의 열쇠를 모아야 하는 면교만의 뒤통수를 후려칠 수 있는 일.
몸을 회복하고 모습을 드러낸 후 곧바로 유적으로 찾아간 이유였다.
다행히 예상대로 적마도로 유적을 통과하게 되자 준혁은 그 안에 안배된 보물을 찾기 위해 사방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곧장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사막의 유적 역시, 용천무의 유적처럼 특정 조건을 갖춰야만 최종 보물을 얻을 수 있는 구조.
그리고 그 조건은 소천경에 이른 준혁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준혁은 특정 조건을 만족하지 못한 상태에서 적마도를 이용해 강제로 연속해서 관문을 돌파해 버렸다.
그렇게 얻은 ‘영보 위력’과 순수한 화기로 만들어진 수정, 마지막으로 감히 섭취하기가 겁날 정도로 뜨거운 기운을 내포한 영단.
유적의 보물이라 여겨지는 물건을 전부 입수한 준혁은 점점 강해지는 관문과 결계를 강제로 돌파해 유적에서 겨우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
“면교만. 유적을 개방한다면 그땐 혼 좀 나야 할 겁니다.”
준혁이 강제로 관문을 건너뛰며 쌓여간 문제들.
만약 누군가 유적의 문을 정식으로 연다면, 그땐 관문 하나하나를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준혁으로 인해 쌓였던 것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올 건 불 보듯 뻔했다.
“특히 마지막 관문의 화거인(火巨人).”
영역을 뚫고 자신을 녹여버리려고 했던 불덩이 괴물을 떠올리던 준혁은 절로 고개를 젓고 말았다.
원래는 보물만 빼돌려 한 방 먹이려고 했던 준혁으로선 의도치 않은 복수를 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그때 준혁의 상념을 깨고 조말랑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님. 근데, 제 느낌인가요? 점점 숲 안쪽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원래라면 숲 안쪽은 피해야 할 곳. 뇌공조 무리를 피해 외곽 쪽으로 돌아서 흑석대륙으로 가야 하는 게 정석이었다.
“뇌명숲 중심으로 가는 게 맞네.”
준혁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자, 조말랑이 화들짝 놀랐다.
“예에?! 중심으로 갈수록 뇌기가 강해진다 들었습니다! 물론 형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뇌공지신을 익히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과연 뇌명숲 중심의 뇌기를 버틸 수 있냐? 라는 의문이었다.
물론 준혁도 자신이 숲 중심에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애초의 목적지가 그곳이었으니 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을 뿐.
“걱정하지 말게, 자네가 위험할 일은 없을 테니.”
“아니, 그게 아니라…. 형님이 걱정돼서.”
조말랑은 괜한 말을 했다는 듯 합죽이가 되어 촐싹맞은 자신의 주둥이를 때렸다.
그러는 사이 비행법기는 점점 더 안으로 들어갔고, 결국 비행법기를 감싸고 있던 뇌공지신의 막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더 날아가던 두 사람은 마침내 황금빛 막으로 둘러싸인 공간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황금빛 막이 나타나자 두 눈이 동그래진 조말랑과 예상하던 일이라 침착한 준혁이 반응을 보이려는 찰나.
막 안에서 중후하지만 다소 경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가시게들, 이곳까지 온 것이라면 적지주를 찾아온 것일 터. 그는 얼마 전부터 어떤 인연도 찾아주질 않고 있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럴 수 없는 처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