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뇌명숲으로 (1)
대라멸진을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형상화된 글자들이 몸을 파고드는 순간 끝이란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면교만은 전심전력으로 대라멸진에 대항했다.
중간중간 대기를 찢는 무시무시한 힘에 방어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신경을 쓰지 못했다.
“이깟 것으로 나를 속이다니.”
그런 면교만의 얼굴은 참혹, 참담했고, 분이 치밀어 어쩔 줄 몰라 했다.
“감히, 감히!”
그는 뇌전과 대라멸진의 작용으로 폐허처럼 변해버린 땅 위에 힘없이 서 있었다.
손에는 반 토막 나버린 하얀 원반을 든 채.
“이 버러지 같은 놈이! 나를 속이다니!! 반드시 찾아 죽여주겠다!!”
대라멸진을 이겨낸 후 반격을 가하려고 했을 땐, ‘최’라는 놈은 이미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하늘에서 ‘멸’이 떨어질 때쯤 놈이 전함을 거둬들이자 반배에게 공격을 명령했었다.
하지만 유적 앞에서 자신을 공격했던 ‘최’의 분신이 나타나 반배를 가로막았고, 그 뒤론 땅이 뒤집히더니 흙으로 만든 병사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나타났다.
그 뒤 자신이 대라멸진에 대항하고 반배가 손발이 묶인 사이, 놈은 마치 비웃듯이 손을 흔들며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낙인이 찍힌 팔 한쪽만을 남겨 둔 채.
“으아아아악!!”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한 면교만은 사방으로 악다구니를 지르다 조각난 원반 법기를 내팽개쳤다.
‘공간이 찢긴 건 분명 허상이 아니었다. 처음엔 대라멸진의 공능이라 여겼는데, 도대체 그 힘은 뭐였단 말인가.’
혹시나 천혈의 존재가 드러날까 봐 직접적으로 천혈의 힘을 사용하지 못한 준혁이 공능의 일부를 진법에 섞었다고는 꿈에도 생각 못 하는 면교만이었다.
그때, 눈치를 보던 반배가 초췌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사형…. 그럼 이제 어떻게.”
훽-
자신이 대라멸진에 대항하는 동안, 같은 소천경 수사의 발을 묶지도 못한 사제를 노려본 면교만은 급발진하려다 간신히 화를 삼켰다.
그리고는 깊은 한숨과 함께 전면에 펼쳐진 뇌명숲을 바라보았다.
“그놈이 뇌공지신을 익혔으니 숲으로 떠났겠지. 우선은 쫓아간다.”
“예? 하지만 도망은 저쪽으로 갔는걸요?”
반배가 가리킨 곳은 모래사막이 펼쳐진 지역이었다.
“또 그놈에게 속을 생각이냐? 이제 낙인으로 쫓을 수도 없으니 기감으로만 찾아야 하는데, 방향이 틀리면 그것조차 어렵게 된다. 우릴 속이려는 뻔한 행동에 현혹되지 말아라.”
“아!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면교만은 재차 혀를 차더니 엄청난 속도를 자랑했던 비행법기를 꺼내 홀로 올라탔다.
“반배, 너는 흑석지부로 향하거라. 나는 본문으로 갈 테니.”
“예? 왜? 그런….”
따로 움직이자는 말을 반배가 바로 알아듣지 못하자, 진심으로 면교만의 얼굴에 짜증이 도드라졌다.
“어찌 그리 생각이 없느냐! 천휴림의 제자인 그놈이 주운대륙으로 가게 된다면 어찌 되겠어?! 무슨 수를 써서든 그것만은 막아야지!”
“그럼 저도 가서 돕겠습니다. 사형.”
“어익후야. 반배야, 반배야.”
면교만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 잡놈이 데려간 자가 누구냐?”
“예? 그야….”
“백랑족! 태백랑의 손자 아니냐! 그놈이 주운대륙으로 넘어가도 큰일이지만, 흑석대륙으로 돌아가도 일이 심각해진단 말이다! 대황대륙 팔왕의 분노를 받아내야 한다 이 말이다!!”
진심으로 짜증이 났는지, 형제를 잃은 반배에게 최대한 인내하고 있던 면교만이 결국 소리를 질러댔다.
그리고는 짧은 한마디만 남겨 두고 뇌공지신으로 배를 감싸며 빛살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러니 너는 흑석지부로 돌아가 절대 그 두 놈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
“괜찮으십니까? 선배님?”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서 사막 쪽으로 도망갔던 준혁은 중간에 방향을 틀어 이번에도 숲의 테두리에 해당하는 땅을 찾아왔다.
그리고는 땅속 깊이 파고들어 무영기로 기류가 흐르지 못하게 막은 후, 두 사람이 지내기에 충분한 동굴과 석실을 만들었다.
울컥-
하지만 연신 입가로 피를 울컥거리는 준혁이 걱정이었는지, 조말랑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게. 위선경 수사에게서 무사히 도망친 것치곤 싸게 먹힌 것이니.”
아무리 천휴림의 이름을 빌렸다고는 하나, 위력이 약한 대라멸진에 면교만이 속지 않을 거라 생각한 준혁은 그 안에 천혈의 힘을 섞었었다.
하지만 독고제에게 받은 천혈은 준혁의 일부이기도 했지만, 하나의 생명체, 의지를 가진 원영과 비슷하게 존재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 천혈의 힘을 사용하는데 본체를 드러내지 않고, 직접 자신의 몸으로 힘을 투과하다 보니 그 반작용으로 몸이 버티질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도….”
“자네 몸이나 신경 쓰게.”
준혁은 조말랑의 잘린 팔을 보며 본인 몸이나 생각하라며 등을 돌렸다.
잘린 팔을 붙이는 건 쉬웠지만, 새로운 신체를 재생하는 건 특별한 단약이 존재하지 않는 한 수행이 깎여나가는 일.
화신기에 겨우 발을 올린 조말랑이 한쪽 팔을 회복시키려면 꽤 고생해야 할 게 분명했으니까.
“헌데 선배님….”
“왜 그러는가?”
“그자들이 또 쫓아오진 않겠지요?”
분리된 다른 석실로 이동하려는 사이, 들려온 걱정에 준혁이 피식 웃고는 걸음을 옮겼다.
“걱정 말게. 그자들은 내가 뇌명숲으로 갔다고 여길 테니.”
‘그래서 그들을 도발하려 뇌공지신을 보여준 거지.’
잠시 후, 분리된 석실에 혼자된 준혁은 기감으로 조말랑을 살피고는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그때 그자는 심장마저 복구했었지?’
선계에 처음 올라와 상대했던 동요문이란 노인.
그자는 화신기임에도 부서진 심장을 아무렇지 않게 복구했었다. 그 당시엔 그게 화신기에 오른 자의 능력이라 생각했지만, 막상 소천경에 오르니 그게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그의 공간대에서 보았던 물건들이 뇌리를 스쳤다.
그때 그의 말대로 가치 있는 물건은 거의 없고, 잡다한 잡서뿐이었지만, 혹시나 알아차리지 못한 공법이나 술법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준혁은 손을 살짝 흔들어 대량의 화목단을 꺼내고는 그중 일부를 삼켰다.
“우선 화가 잔뜩 난 천혈을 잠재우고 나면…. 그때 다시 확인을 해봐야겠군.”
***
“흐음...”
가지고 있는 화목단을 전부 소비하고, 태식을 도울 때 잡았던 몽교 화신기 수사들의 원영을 먹인 후에야 천혈을 완전히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 후 천혈을 좀 더 자연스럽게 사용할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애쓰는 사이 6개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별 소득을 얻지 못한 준혁은 기감으로 석실 너머 공동에서 회복 중인 조말랑을 살핀 후, 지금껏 얻은 팔찌 형태의 공간대를 전부 꺼내 들었다.
주인을 잃은 10개의 팔찌.
연형기 수사였던 구로반부터 시작해, 화신기였던 동요문과 마족 수사 넷.
거기다 태식을 공격하던 몽교 화신기 3명과 마지막으로 소천경 수사였던 신배의 공간대까지.
“확인하는 김에 이것들도 처리해야겠군.”
총 10개의 공간대를 바닥에 늘어트린 준혁은 이미 가볍게 확인이 끝났었던 구로반과 동요문의 공간대 먼저 들어 올렸다.
영석과 각종 재료를 제외하곤 옥간과 몇 개의 법기가 전부인 공간대.
이미 법기가 자신에게 쓸모가 없음을 확인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감으로 세심히 확인 작업을 시작했다.
“역시. 이것들은….”
하지만 숨은 기능이나 효능이 있는지 자세히 살펴도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자, 한쪽으로 치운 후 옥간을 확인했다.
동요문에게서 대량의 옥간이 나왔으나, 처음 얻었을 당시 공법이나 술법도 아닌 잡서에 가까운 것들이라 신경 쓰지 않았던 물건들.
이번엔 중요한 서류를 보듯 옥간의 내용을 확인한 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찰싹 치고 말았다.
심장을 복구하던 방법을 찾던 중 뜻하지 않은 발견을 하고 말았다.
그 안엔 언뜻 보기엔 설화나 전설같이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잔뜩이었는데, 자세히 살펴볼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다.
“이건?”
단적인 예로, 지금 준혁이 확인한 부분엔 불타는 사막의 전설이 담겨있었는데, 12개의 열쇠로 세 곳의 땅을 열면, 하늘에 맞닿는다는 구절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입장에서 본다면 의미 없는 동화 같은 내용이었지만, 이미 12개의 열쇠로 땅속에 묻혀있던 문을 소환한 걸 눈으로 확인한 준혁에겐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럼 그런 곳이 세 곳 더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세 곳에서 얻은 무언가로 진짜 문을 열 수 있고?
목족의 대지에서 3곳의 봉인지가 서로 연계되어 있던 걸 생각한 준혁은 충분히 일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건 겨우 영보 따위가 아니겠구나.”
면교만이 얻겠다고 했던 물건은 유적 안의 ‘영보 뇌력’.
만약 진실로 세 곳의 유적을 열어 새로운 유적으로 향한다면 그 끝에 자리한 것은 최소한 천영보급 물건일 건 자명했다.
“엄청나긴 하구나.”
준혁이 가진 용천무의 날개와 전함이 천영보급 물건이었다. 아직 제대로 된 성능을 끌어내지 못해도 그 위력 하나만큼을 감히 평가할 수 없을 정도.
“아!”
생각을 이어가던 준혁은 면교만의 최종 목적이 마지막 유적이라 확신했다.
아마도 그의 사제들도 몰랐을 테지만, 화정으로 만든 수사들을 죽이지 않고 계속 이용하려고 한 걸 보면 분명 그다음을 생각하고 있던 게 틀림없었다.
그 순간 자신을 죽이려 했던 상대에게 한 방 먹일 방법을 떠올린 준혁은 입꼬리를 올린 채 상념에 빠져들었다.
한참 후에야 마음의 평정을 되찾은 준혁은 나머지 옥간들도 전부 확인했다.
하지만 조금 전과 달리 실망한 얼굴이 되었다.
“없구나.”
동요문이 파괴된 심장을 즉각 복구시켰던 말도 안 되는 능력에 관한 건 아무리 자세히 살펴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 동요문과 구로반이 진짜 보물과 재산을 숨겨놓은 곳에 대해 말한 게 생각난 준혁은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 장소가 어딘지도 모르지만, 아마 대막리의 영역 안이겠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준혁은 동요문과 구로반에게서 얻은 옥간들을 한쪽에 옮겨 담은 후, 영석과 몇 가지 재료들을 분리한 후 마족의 공간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후엔 몽교 수사들의 공간대마저 확인 작업을 거쳤다.
마족 화신기 수사들의 공간대는 대부분 정체불명의 단약과 수준이 낮은 법기류가 전부였고, 몽교 수사들의 공간대에선 의외로 전왕문을 비롯한 여러 종문에 대한 자료들이 대거 들어있었다.
각종 단약들을 종류별로 분류해 자기병에 모아 담은 준혁은 법기류는 재확인을 거친 후 한쪽으로 치우고 옥간은 자세히 읽어보았다.
그 후 잡다한 분류를 마친 준혁은 마지막 남은 신배의 공간대에 영력을 주입해 안의 물건을 전부 토해내게 만들었다.
처음엔 급하게 확인하느라 신경 쓰지 않았었는데, 뇌공지신이 적힌 옥간뿐 아니라 많은 물건이 쌓여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열쇠가 될 화신기 수사들에게 나눠줬던 반초단과 순간적으로 수행을 올렸던 강진단.
이상한 것이 함유된 변질된 물건이 아닌, 진짜 강진단과 반초단. 그리고 그것들의 제작법이 기록된 옥간이었다.
“제법 쓸모가 있겠구나.”
반초단이 면교만의 말처럼 초연단의 절반에 가까운 능력을 보유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몸을 회복하는 데 탁월한 것은 맞았다.
두 제작법을 머릿속에 담고서 옥간을 소중히 보관한 준혁은 그다음으로 눈에 띈 자기병 속에서 화신기급 수사가 섭취할 만한 단약을 대량 발견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소천경 수사에게 어울릴 만한 수련용 단약은 없었다.
어쩌면 당연하기도 한 것이, 먹기에도 부족한 단약을 보관하고 있을 수사는 없는 게 현실이었다.
그때 삼지창 모양의 법기와 목걸이 형태의 보호 법기 사이에 놓인 중지만 한 길이의 피리가 눈에 띄었다.
준혁은 호기심에 피리를 집어 들어 기감으로 확인 후 천천히 영력을 주입해보았다.
“오. 이건?”
그 순간 피리의 끝이 향하는 부분으로 환영이 투과되더니 복잡한 지도의 모습이 나타났다.
피리 모양을 하고 있던 법기. 그건 어느 유적의 상세도였다.
유난히 지도 끝에 그려진 글씨가 준혁의 관심을 끌어모았다.
[명왕지처(命王之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