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면교만 (3)
“너, 너! 수행을 숨기고 있었구나!”
“숨기다니요? 제 입으로 화신기라 말한 적이 있던가요? 그대들이 그리 판단한 거지.”
“이익!”
그사이, 서로를 침범하기 위해 권역 다툼을 하던 영역은 서로의 힘을 상쇄시키며 교집합처럼 서로를 덮어버렸다.
신배는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짐작조차 하지 못했기에 영역으로 상대방을 억누르지 못하는 상황에 당황했다.
하지만 준혁은 아니었다.
영역이란 나에겐 버프이자 상대에겐 디버프.
영역이 상쇄된 순간, 모든 작용은 무효가 되고, 서로의 실력만을 논하게 되므로 그때부터 장난기는 사라졌다.
신배가 당황하는 사이, 이미 분광소와 식검을 발출했고, 동시에 용천무의 날개를 꺼내 허공으로 스며들었다.
준혁이 모습을 감추고 나서야, 상대방이 이미 공격에 나섰다는 걸 깨달은 신배는 허겁지겁 목에 차고 있던 목걸이에 영력을 주입했다.
“대화 중에 비겁한!”
그리고는 손바닥을 휘둘러 원을 그리자 원뿔형의 보호막이 생성되며 신배를 완벽하게 감싸버렸다.
스르륵-
하지만 영력이 주입된 목걸이가 보호막을 형성하는 사이. 이미 안쪽으로 파고든 준혁이 공간을 찢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늦었습니다.”
그리고는 조금 전까지 도발하기 위해 경박하게 말하던 것과 달리, 무심하게 주먹을 내질렀다.
쇄애액-
어느새 준혁의 주먹 끝에 하얀 얼음 알갱이들이 생성돼 주변 공기부터 얼려버리고 있었다.
“어림없다!”
신배는 두 눈을 치켜뜨며 당할 수 없다는 듯 찰나의 순간 간신히 몸을 틀었다.
퍼걱-
그러자 준혁의 월광지력이 스치듯 그를 건드렸고, 처음 노렸던 심장이 아닌, 옆구리가 순식간에 얼어붙으며 얼음 알갱이로 흩날렸다.
하지만 단순하게 한 수만 준비할 리 없는 준혁.
신배가 겨우 피했다는 안도감에 젖으며 공간대에서 삼각 방패를 꺼내려는 사이,
어느새 신배의 등 뒤로 순간이동 해온 분신으로 변한 분광소가 손에 들고 있던 적마도를 내려쳤다.
서걱-
그 순간 얼어붙었던 신배의 옆구리 반대편 어깨가 힘없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바로 방어구를 발동하려 했던 그는 어깨를 잃으며 삼각 방패를 놓치자, 핏발이 터져 나오는 눈을 부릅뜬 채 허공을 박찼다.
두 공격을 연이어 허용 당하자, 1초의 주저함 없이 도망을 택한 것이었다. 공격에 대한 대처는 늦었지만, 도망에 대한 판단은 빨랐다.
“갈 땐 가더라도 공법은 뱉으셔야지요.”
하지만 신배는 채 1m도 뜨지 못하고 제자리에 멈춰 서야만 했다.
어느새 준혁의 발끝에서 거미줄처럼 쏘아져 나온 금빛 실이 그의 양발을 악어처럼 물고 놓아주질 않고 있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수사가 위선경 선배인 줄 몰랐습니다!”
분광소를 영역 분신으로 오해한 신배.
그가 할 수 있는 건 절망뿐이었다.
***
제압에 성공한 적에게 정보를 알아내는 데는 원영만 있어도 충분했으니, 준혁은 주저 없이 신배의 목을 날려버렸다.
스걱- 툭-
기감으로 그의 신체를 확인해, 팔목에 차고 있던 공간대와 사용하려던 법기만을 회수했다.
그리고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회복 중인 조말랑을 의식해, 영역을 움직였다.
우웅-
신배가 본체를 잃자, 상대의 영역과 상쇄돼있던 영역이 제 기능을 되찾으며 의지대로 움직였고, 순식간에 규모가 축소된 영역은 두 사람을 완벽하게 가두며 밖에서 확인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그제야 준혁은 혈단법의 공능으로 상대의 시체를 혈정단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순간, 자신의 본체가 영역에 뻗어있는 금빛 실에 갈려 한 줌 핏물이 돼버리는 모습에 신배는 경악하며 금빛 실을 벗어나려 더 세차게 반항했다.
-흡식이라니! 으아악! 수사! 뇌공지신이든 뭐든 원하는 건 뭐든 알려주겠소! 제발 목숨만! 목숨만 살려주시오!
준혁은 신배 원영의 애원을 한 귀로 흘려버리고 그의 공간팔찌를 확인했다.
-수사! 돌려만 보내주시면 사형을 설득해 절대 수사께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하겠소이다. 내 평생 수사를 웃어른으로 모시겠소이다!
그러다가 무얼 발견했는지, 준혁의 입가가 길게 늘어졌다.
“오호. 이거 수사와 대화 좀 하려 했더니, 필요가 없겠습니다.”
어느새 준혁의 손 위엔 옥간 하나가 잡혀있었다.
신배는 옥간을 보고 절망에 가까운 표정을 짓다가, 안색을 바꾸고는 다시 애걸복걸했다.
-뇌공지신을 혼자 익히려 하다간 큰일 날 수 있습니다! 지기(地氣)로 뇌기(雷氣)를 견제하는 방법은 독학으로 터득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원영에 핏대가 있었다면 아마 신배의 원영은 목이 터져나갔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열성적으로 애원하는 그를 뒤로하고 준혁은 옥간 속 공법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오호. 이런 거였군요.”
그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손바닥 위로 우렛소리가 들리는 작은 공을 만들어냈다.
반투명한 공기에 싸인 것 같은 공. 그건 뇌공지신을 다루는 가장 기초가 되는 부림이었다.
-어찌 이런 말도 안 되는!!
그러자 신배는 준혁이 영역을 사용할 때보다 더 놀라 하며 말을 잃어버렸다.
놀람이 너무 컸는지 멍한 얼굴로 더는 애원하지도 않았다.
뇌공지신은 흔하게 접할 수 없는 지기를 뇌기와 공명시키는 것부터가 시작이었는데, 문제는 그걸 행하기 위해선 순수한 지력(地力)이 필요했다.
뇌공지신 공법을 익히기 전 수백 년간 지력을 모아야만 비로소 공법에 입문할 수 있는 것.
하지만 준혁에겐 토율서가 있었다.
순수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마신기로 지기를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는 흙 다람쥐 토율서의 힘이.
그랬기에 수천 년간 뇌공지신을 익힌 신배마저 말을 잃게 만들 속도로 공법의 기초를 익힐 수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뇌명숲을 건널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아주 간단한 부림. 공법을 익힐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었으니까.
***
천혈을 불러와 신배의 원영과 혈정단을 먹어 치우게 한 준혁은 주위의 흔적을 완벽히 처리한 후 영역을 제거했다.
영역이 사라지고 준혁만 홀로 나타나자 치료에 전념하던 조말랑이 황급히 날아왔다.
“선배님이셨던 겁니까?”
아까까진 겁에 질린 애송이 같은 표정이었다면, 지금의 조말랑은 존경이 담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시답잖은 반응에 대응할 시간이 없는 상황.
준혁은 기감을 멀리까지 퍼트리며 말했다.
“그게 중요한가? 어서 떠나세. 어떤 식으로든 한 놈이 죽은 걸 알게 될 테니까. 그 전에 숨어야 하네.”
무영기를 이용하면 위선경 수사의 시선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 준혁은 다시 조말랑의 뒷덜미를 잡고는 하늘을 갈랐다.
슈앙- 쾅-
비행법기로 이동하는 게 보기엔 좋았지만, 아직까지 단순히 날아가는 건 둔광을 일으키는 게 더 빨랐으니까.
그렇게 수백 킬로를 이동한 준혁은 기감으로 쫓아오는 자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뜨거운 모래 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하지만, 토율서의 힘까지 빌려 지하 깊숙이 내려가던 준혁은 조말랑 때문에 다시 지상으로 나와야 했다.
“으…. 너무 괴롭습니다.”
조말랑은 영기를 흩어버리는 모래 속으로 몸을 숨기자, 영혼이 갈릴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했다.
‘흠. 그럼 어쩐단 말인가. 무영기로 기감을 피할 수는 있다 쳐도…. 모습을 감추지 못하면 결국은. 아!’
허허벌판 모래뿐인 사막에서 숨을 곳을 고민하던 준혁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다시금 조말랑의 뒷덜미를 움켜잡았다.
직후, 또 한 번 음속을 돌파했다.
쾅!-
잠시 후, 도착한 곳은 뇌명숲과 불타는 사막의 경계가 만나는 곳.
어느새 준혁의 손에서 풀려난 조말랑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당혹한 표정을 했다.
“선배님. 설마 뇌명숲으로 들어가시려는 겁니까? 선배님이라면 몰라도 저는….”
곰 같은 사내가 고양이 같은 눈망울로 바라보자, 준혁은 기분이 언짢아져 이맛살을 찌푸렸다.
한편으론 나이와 수행에 어울리지 않는 조말랑의 행동에 산들바람이 생각나 마음 한편이 무거워졌다.
작게 혀를 찬 준혁은 조말랑은 무시하고 기감으로 주변을 훑었다. 그리고는 손으로 직접 땅을 매만졌다.
“역시, 뢰목이 자라지 않은 뇌명숲의 땅은 일반적인 숲의 흙과 마찬가지구나.”
뢰목이 가득한 뇌명숲이라 하나, 숲의 끝에서 끝까지 나무가 가득한 건 아니었다. 숲의 테두리는 아무것도 없는 빈 공터.
혹시나 했던 예상이 맞아떨어지자 기분 좋은 미소가 준혁의 입가에 걸렸다.
뒤에선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조말랑이 걱정스러운 눈을 한 채 준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
태양이 내리쬐지 않는데도 열기로 가득한 곳.
준혁과 신배가 전투를 치렀던 모래사막 위.
모래 위에 손을 올려두고 땅의 기억을 읽으려 애쓰려던 반배는 곧이어 다가온 자로 인해 행동을 멈춰야 했다.
“소용없다. 불타는 사막의 모래가 영기를 흩어버린다는 걸 잊은 게냐? 그런 식으론 그놈의 행방을 찾을 수 없을 게다.”
면교만은 쓸데없는 행동에 시간을 소모하는 반배를 보고 혀를 찼다.
“사, 사형!”
어느새 뒤따라온 면교만을 보고 반배는 죽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최대한 빨리 왔지만…. 아무래도 신배가….”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영기의 충돌 자체는 아직 흩어지지 않고 존재했다.
영기의 충돌이 남아 있는데, 아무도 없다?
그건 전투를 치른 당사자가 일을 끝내고 사라졌다는 뜻이고, 만약 전투에서 승리한 자가 신배였다면 지금까지 연락이 닿지 않을 리 없었다.
“설마 했거늘. 그놈 수행을 숨기고 있었나 보구나.”
면교만은 분신의 능력으로 어느 정도 추측하던 것이 맞아떨어지자, 신음을 흘렸다.
최대한 빠르게 회복하고 온다는 게 늦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런 사형의 모습에 반배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사형 어찌합니까? 어떻게든 찾아서 복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배와 반배는 쌍둥이 수사. 매일 투덕거리긴 했지만, 누구보다 우애가 깊던 사이.
면교만은 살기 어린 눈으로 피눈물을 보일 것 같은 반배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손을 가볍게 흔들더니 붉은 짚으로 만든 인형을 꺼내 들었다.
그러더니 인형을 허공에 띄우고 수결을 맺었다.
“슬퍼 말거라. 곧 만나게 될 것이니.”
그 모습에 반배가 슬픈 표정을 감추며 반문했다.
“사형, 그놈은 낙인을 찍지 않았습니다. 모르십니까?”
면교만이 꺼낸 짚으로 만든 인형, 적고(赤稿).
적고는 전왕문에서 낙인자를 찾기 위해 만든 추적용 인형이었다.
다양한 임무를 외부 수사들에게 배정하다 보니, 간혹 중요한 정보나 물건이 외부로 알려질 때가 종종 있었고, 그럴 때마다 정보를 가지고 이탈하거나 보물을 갈취한 자가 생겨났다.
적고는 바로 그런 자들을 찾는 용도로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면교만은 일차원적으로 생각하는 반배를 향해 또 한 번 혀를 찬 후, 설명해주었다.
“그놈이 누굴 데려갔는지 잊은 게냐?”
“예? 데려…. 아! 맞다! 태백랑의 손자!”
“그래. 내가 찾는 건 그 녀석이다. 도망가는 상황에서 굳이 짐을 달고 간 걸 보면, 지금도 함께 있을 가능성이 다분하지.”
“역시 사형입니다!”
잠시 후, 면교만의 수결이 끝나며 영력이 흘러들자, 짚으로 만든 붉은 인형은 혼자서 허공으로 솟구치더니, 하늘을 갈라 날아갔다.
그리고 빛 꼬리를 남기고 멀어져가던 인형을 응시하던 면교만은 비행법기를 꺼내며 반배에게 손짓했다.
“가자. 감히 누굴 건드렸는지 알려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