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유적으로 (3)
총대를 메고 위선경 수사에게 당당히 의견을 피력하는 수사의 말에 여기저기서 고갤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다른 이들도 의문이 드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어차피 뇌명숲 안으로 들어서 버린 후라,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한 것이었다.
중도하차 할 수도, 도망갈 수도, 그렇다고 위선경 수사에게 대들 용기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미리 준비했다는 듯, 면교만은 손을 살짝 흔들어 자기병 12개를 불러오더니, 각각 수사들에게 쏘아 보냈다.
“우리 전왕문이 그리 파렴치한 곳으로 보이는가? 비록 유적의 보물을 나눌 순 없지만, 그대들에게 해를 끼칠 생각도 없네. 누구도 다치지 않을 것이고, 낙인 횟수를 일회 차감하는 건 물론, 또 다른 보상까지 준비했네.”
보상이란 말에 수사들은 황급히 자기병을 열어 안에 내용물을 확인했다.
준혁도 눈앞까지 날아온 자기병을 조심스럽게 살핀 후, 기감으로만 내용물을 파악했다.
“그대들에게 건넨 자기병 안엔 강진단(强珍丹) 한 알과 반초단(半超丹) 두 알이 들어 있네.”
단약에 대해 알고 있던 몇몇 얼굴에 화색이 돌자, 면교만은 만족스러운 듯 설명을 이어갔다.
“모르는 이들이 있는 것 같으니 덧붙이자면, 강진단은 그대들이 열쇠 역할을 하며 영력을 소비할 때, 순간적으로 수행을 올려줄 것이네, 그리고 반초….”
“단약으로 일시적인 수행 상승을 야기하면 부작용이 크지 않습니까?”
말을 이어가려던 면교만은 처음 딴지를 걸었던 자가 또 말을 끊고 들어오자, 못마땅한 듯 헛기침을 했다.
“큼, 그래서 반초단을 넣었네. 그대도 초연단은 알 테지? 반초단은 초연단의 하위호환이라 불릴 정도로 신체 재생을 돕는 데 탁월한 약으로, 강진단의 부작용을 단숨에 지워주고, 오히려 유적의 문을 여는 데 사용하고 남은 강진단의 약효를 몸이 흡수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이네.”
“그럼 반초단이 두 개인 연유는….”
“말하지 않았나? 또 다른 보상이라고. 강진단을 섭취하고 얻은 이득은 위험을 감수한 자들이 응당 취해야 할 이득이고, 나머지 반초단이 내가 말한 보상일세.”
‘초연단의 하위호환이라….’
다른 수사들이 자기병에서 영단을 꺼낸 후 두 눈을 빛내는 사이, 준혁은 상황이 재밌게 돌아간다고 여기고 있었다.
어느새 수사들은 면교만이 자신들을 기만하는 행위를 했음에도, 더는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초연단의 하위호환이란 말에 반쯤 정신을 놓고 있었고, 시간이 지나자 몇몇이 모여 강진단의 약효를 효과적으로 남길 방법에 대해 논의하기까지 했다.
‘하긴 경험해본 내가 가장 잘 알긴 하지.’
초연단 두 알로 기사회생한 준혁은 다른 수사들의 마음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기에, 그들의 행태에 작게 헛웃음을 흘리며 자기병을 조심히 수납했다.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모르는 강진단은 배제하더라도 반초단 두 알은 그에게도 값진 것이었으니까.
잠시 후, 면교만이 그의 사제 두 명과 조용히 자리에서 물러나자, 수사들은 본격적인 대화의 물꼬를 트며 두 단약에 대해 상의하기 시작했다.
‘면교만…. 수사들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고 있구나, 그래, 아무리 위험이 있다 한들 얻는 것이 크면 불 속에라도 뛰어드는 것이 수도자긴 하지.’
그때, 준혁의 시야로 독특한 자가 들어왔다.
화신기 초기 수사였는데, 다른 이들과 달리 자기병을 들고 찜찜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자는 한참 동안 자기병을 노려보다가 준혁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다가와 바로 앞에서 준혁에게 전음을 날렸다.
-혹 수사도 이상함을 느끼신 겁니까?
전음이 도청당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꼼꼼하게 행동하는 상대방의 모습에 준혁은 의외란 듯 조금 놀랐다.
겉으로 보기엔 무식한 곰 같았는데, 의외로 섬세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배’라는 한정된 좁은 공간, 위선경 수사의 영역 안에서 과연?
‘아직 미숙하긴 하지만….’
준혁은 상대방이 놓친 부분을 지적해주는 대신 다른 의미로 상대방에게 놀라는 중이었다.
‘이자. 조호랑 수사와 같은 냄새가 나는구나.’
정확히는 비슷한 피의 향기. 즉 천혈이 느끼는 혈맥의 힘이 조호랑 수사를 처음 봤을 때와 거의 동일했다.
같은 일족일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같은 피를 나눈 동족임은 분명했다.
-이상함이라니? 무슨 뜻입니까? 혹 단약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상대는 준혁의 모호한 답변에 실망한 듯 시선이 흔들렸다. 하지만 결심한 듯 선상에 남은 자들을 곁눈질하며 말을 이었다.
-수사께선 다른 이들과 달리 흥분해하고 있지 않으니 말씀드리는 건데…. 사실 어릴 적 우연히 강진단을 먹어본 적이 있습니다.
-오호, 그래서요?
-전왕문에서 나눠준 강진단은 제가 먹었던 것과 비슷하지만, 무언가 불순물이 섞인 것처럼 좋지 않은 냄새가 납니다.
‘냄새라….’
준혁은 불안해하는 상대방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불안이 깃들긴 했지만,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고 무작정 동조해줄 수도 없는 일.
-같은 단약이라도 만든 연단사마다 그 성능이나 효능이 천차만별인 것을, 그런 차이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모르는 재료가 들어간 것이?
-그건…. 그럴 수도 있겠군요.
-정 불안하시면 먹지 않으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열쇠 역할을 할 때 다른 이들과 달리 자신만 본체의 영력을 소비해야 한다는 뜻.
-결국 선택은 본인이 하는 것이겠지요?
준혁은 말끝을 올리며 씨익 웃어주었다.
그 안에 담긴 뜻을 파악했는지, 곰 같은 사내는 생각에 빠진 듯 말이 없다가, 준혁을 향해 가볍게 몸을 수그렸다.
“가르침 감사합니다. 수사.”
“가르침이라니요? 그저 모든 건 자신의 선택이란 말일 뿐입니다. 이 배에 오른 것이 수사의 선택이었듯, 다른 것도 마찬가지로….”
준혁은 고개 숙이는 상대에게 한마디 더 남겨주고, 선상 아래 마련된 객실로 몸을 돌렸다.
화신기 수사들 틈에서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는 화신체 비술에 대해 조금이라도 연구하는 것이 나았으니까.
***
콰르릉-
전왕문의 특수한 공법인 뇌공지신과 위선경 수사의 영역이 결합된 보호막.
두 힘의 결합은 비행법기를 안전하고 빠르게 뇌명숲 깊은 곳으로 갈 수 있게 만들었다.
준혁이 배에 오른 뒤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쾌속 질주한 선박은 뇌공조라 불리던 뇌명숲의 요수 무리를 요리조리 피해 가며 안전하게 목적지로 향했다.
콰르릉-
그렇게 반년이 넘게 아찔하면서도 아무 탈 없는 조용한 비행이 이어질 때, 선박은 천둥이 끝나가는 숲의 경계를 지나고 있었다.
-이제 목적지가 임박했으니, 모두 위로 올라와 주시게.
객실에서 화신체 연구에 몰두하고 있던 준혁은 목적지에 근접했다는 소리에 처음 모였던 선상으로 움직였다.
그곳엔 이미 대다수 수사들이 모여있었다.
“이번에도 가장 늦게 도착했군. 이제 세부 설명을 해줄 테니 자리에 착석하게.”
다른 화신기 수사들과 다르게 느릿느릿 여유롭게 움직이는 준혁을 보며 면교만은 사람 좋은 푸근한 인상으로 자리를 안내해주었다.
그리고는 단상에 올라 십이진식이라 부르던 진법에 대한 설명과 해당 진이 발동할 때 해야 할 일들에 대해 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했다.
칠 주야 후.
“...그럼 이것으로 설명을 마치겠네. 이제 곧 목적지에 도착할 것 같으니. 모두 안전하게 임무를 마무리하고 작은 소득이라도 얻고 돌아갔으면 하네.”
“감사합니다!”
“가르침 깊게 새기겠습니다!”
진법과 그것을 발동시키기 위한 배움이었다고는 하나, 화신기 수사가 위선경 수사에게 가르침을 받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 드문 일.
장장 칠 주야가 넘는 시간 동안 이어진 가르침에 화신기 수사들은 진심을 담아 허리를 숙였다.
준혁도 다른 이들과 같이 깊게 허리를 숙였다. 다만 속내는 조금 달랐다.
‘진의 근원에 대한 건 전혀 알려주지 않고, 흐름을 쫓는 방법만을 일러주고 생색은.’
축기기 시절부터 진법에 대한 경계가 심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준혁은 단번에 허와 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다만 긁어 부스럼 낼 필요는 없기에 조용히 대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소천경 수사 한 명이 도착을 알리자, 다른 수사들 틈에 섞여 조용히 선박을 이탈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볼 수 있었다.
뇌명숲과 불타는 사막 경계에 위치한 유적의 입구를, 정확히는 입구를 발동시킬 12명이 자리해야 할 불구덩이를.
***
콰르릉-
뇌명숲의 천둥소리를 뒤로하고 기온이 급상승하는 사막 모래를 지나치길 하루.
준혁과 화신기 수사들은 허허벌판 모래뿐인 사막에 성인 몸통만 한 불기둥이 솟아오르는 구덩이 12개를 볼 수 있었다.
각 구덩이의 입구는 매우 좁았지만, 그 위로 올라오는 불기둥은 모든 걸 녹여버릴 듯한 뱀의 혓바닥처럼 수사들을 유혹했다.
눈치가 빠른 자들은 그걸 보자마자 열쇠의 역할이 무엇인지 단번에 깨달았다.
“설마…. 저 불구덩이가 열쇠 역할을 해야 하는 자리인 건가?”
수사 중 한 명의 발언으로 모두의 시선이 면교만에게 향했다.
무리를 이끌고 있던 면교만은 사람들의 의문에 부정하지 않고, 초승달 모양으로 배치된 12 구덩이의 중심축으로 이동하더니 크게 외쳤다.
“모두 주목하게!”
어느새 면교만의 사제인 두 명의 소천경 수사는 면교만과 삼각형이 이루는 방위를 점하고, 누구도 도망가지 못하게 길목을 잡았다.
다만 준혁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그것이 그저 십이진식을 발동하기 위한 구도라 여기는 듯했다.
“설명한 것을 들었으니, 어떻게 행동해야 될지 알겠지? 보기와 달리 이 화염은 연형기 이상 수사들에겐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하네. 각자 확인해보고 미리 알려준 자리에 서도록.”
면교만이 모두에게 확인해보란 듯 시선을 주자, 몇몇 화신기 수사들이 불구덩이로 다가가 직접 손을 뻗었다.
“어? 정말입니다. 분명 열기가 느껴지는 화염인데, 아무렇지 않습니다.”
잠시 후 궁금함에 모든 수사가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 화염을 직접 경험하자, 면교만이 인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설마 여기까지 와서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인가? 아님. 우리 전왕문을 믿지 못하는가? 아 참, 다들 알고 있을진대, 이곳 사막에 오래 머문다면 영력이 서서히 흩어지는 경험을 하게 될걸세. 나나 내 사제들은 상관없지만, 자네들에게 좋을 건 하나도 없을 것이야. 그러니 빨리 일을 해결하고 돌아가도록 하지.”
해당 사실을 전부 인지하고 있는지, 면교만의 말이 끝나자 수사들이 빠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의심은 불필요하다고 여긴 듯, 하나둘씩 화염 구덩이로 올라가 진법을 펼칠 준비를 했다.
화르륵-
바짓가랑이를 휘감으며 화염이 올라오는데도 모두들 태연하게 숨결을 내뱉으며 수인을 맺었다.
하지만 전부 그런 건 아니었다.
아무 기파도 영향도 끼치지 않으면서 열기만 내뿜는 화염에 위화감을 느낀 준혁은 여전히 기감으로 그것을 살피고 있었다.
그때, 준혁의 귓가로 면교만의 음성이 전해졌다.
-수사도 빨리 자리하게, 모두 자네를 기다리지 않는가?
전음에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자신을 제외한 전원이 십이진식을 발동할 준비를 마친 채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진행하려 하구나.’
수상하지만, 앞뒤가 어느 정도 들어맞았기에 준혁 역시 결국 수긍하고 화염 위로 올라섰다.
보물 쟁탈전을 방지하기 위해 소문을 차단하고 수행이 낮은 자들만 모은 것도,
강진단과 반초단으로 수사들에게 위험성과 보상을 동시에 준비한 것도.
그리고 위험성 때문에 본인들 문파의 문원들을 배제한 것도.
가까이서 하나씩 짚자면 모두 조금씩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행동들이었지만, 멀리서 전체적인 틀만 보자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행동들이었다.
‘하긴, 뭘 걱정하는가. 날 속이려 한 것이라면 그에 합당한 인사를 해주면 그만인 것을.’
잠시 후, 준혁의 수결과 동시에 십이진식이 자리 잡자, 면교만은 양손을 세차게 흔들었다.
어느새 그의 손엔 검은 용이 그려진 깃발 두 개가 나타나 하늘과 땅을 동시에 울리고 있었다.
부르르-
그리고 그 순간.
12명이 서 있던 화염이 폭발하듯 솟구치더니 작은 원통형으로 확장하며 수사들은 완벽히 감싸버렸다.
지잉-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된 수사들이 당황하는 사이, 면교만이 환희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의식을 시작한다!!”
다만, 진법에 집중하던 면교만과 그의 사제들은 볼 수 없었다.
준혁의 발끝에서 땅속으로 스며 사라진 무언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