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다시 만난 인연 (1)
온통 검은 암석과 회색 돌뿐인 흑석대륙이었지만 그런 곳조차 식물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중 대표적인 곳이 대흑산(大黑山)이었다.
멀리서 본다면 평지와 마찬가지로 검게만 보이는 대흑산은 가까이 가면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바로 산과 주위 산맥을 가득 메운 검은 소나무 때문.
검은 소나무는 불을 지피는 데 탁월해서, 한번 불씨가 생겨나면 사흘을 넘겨 화력을 유지했다.
그랬기에 규모가 큰 상단이라면 대흑산과 주변 산맥에 거점 하나 정도는 가지는 게 보통이었다.
겨울을 보내야 하는 범인들에게 귀한 물건이기도 했지만, 수행이 낮은 축기기 이하 수도자들도 연단술을 사용하며 자주 소비하는 물건이었으니까.
특히 겨울이 긴 남운대륙 같은 경우 검은 소나무를 쌓아두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였으니 두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였다.
그런 대흑산 자락에 모습을 드러낸 준혁은 기운을 조종해 연형기 후기처럼 보이게 위장했다.
그리고는 옥패의 진동이 강해지는 방향으로 날아가, 산 중턱에 자리한 2층으로 지어진 검은 목조건물로 들어섰다.
“오셨습니까!”
준혁이 1층 입구에 모습을 드러내자, 지하 굴에서 만났던 학고응이 번개처럼 나타나 환영해주었다.
“오랜만입니다. 수사.”
“자자, 여긴 상단 직원들이 많으니, 위로 올라가시지요.”
기감으로 살피니, 화신기 수사가 두 명 존재했고, 그 아래로 연형기나 완영기 수사도 몇몇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특이한 건, 축기기 수사들이 벌떼처럼 많았는데. 학고응에게 설명을 듣자니 그들은 대흑산의 소나무를 벌목하기 위한 인원이라고 했다.
2층에 올라 대흑산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자리하자, 고혹한 미녀가 나타나 주둥이가 길쭉한 주전자와 찻잔을 내려놓고 사라졌다.
사라지기 전 준혁을 향해 살짝 미소 지으며 혀를 할짝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미혹술을 익힌 자군.’
아주 짧은 시간 상대방이 자신을 유혹하려 눈빛을 보냈다는 걸 느낀 준혁은 악의가 없음을 알고 피식 웃고 말았다.
“수사, 물건을 볼 수 있겠습니까?”
준혁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르자마자, 학고응은 안달 난 것처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에 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간대에서 물건을 꺼내려다 흠칫하고는 빈손으로 입을 열었다.
“학고응 수사께서도 제가 비승 수사란 건 들으셨겠지요.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이곳 수사분들은 공간대를 가지고 다니지 않던데….”
기대하던 마정 껍데기를 보지 못했기 때문인지, 학고응의 얼굴이 순간 구겨졌다가, 흔한 상인의 얼굴로 돌아왔다.
“이를 말씀입니까? 중천의 수도자들은 대부분 이것을 가지고 다니지요.”
말과 동시에 학고응이 손을 가볍게 흔들자, 그의 손목에 반투명한 옥팔찌가 나타났다.
그 모양이 공천령과 비슷했기에 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간 팔찌의 모습이 이곳에서 가장 흔한 형태의 공간대인가 보구나. 모습을 감추는 것도 공천령과 비슷하고.’
내심 납득하고 있는데, 학고응의 설명이 이어졌다.
“수사께선 비승 수사라 모르시는 것이 많은 것 같으니 부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오래전엔 이곳에서도 가방 형태의 공간대를 주로 사용했었습니다.”
“호오. 그래서요?”
“혹 마선이라는 존재에 대해 아십니까?”
“물론입니다.”
찻잔을 든 학고응은 커험 소리를 내며 입술을 적셨다.
“마선들이 모인 세력 중 선마궁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 창고지기였던 공천귀라는 마선 때문에….”
공간대를 불편하게 생각했던 동료들을 위해 공천귀는 자신의 능력을 모방한 공간 팔찌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처음엔 마선들만 사용하던 것이 나중엔 전 대륙으로 퍼지게 되었다는 것.
“공천귀가 직접 만든 것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제작과정과 재료가 낱낱이 밝혀졌기에 성능으로 따지자면 뒤처지지 않습니다.”
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문신으로 변해버린 공천령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때, 설명을 이어가던 학고응이 아쉽다는 듯 혀를 차고는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그자가 사라진 지 꽤 오래되었다던데…. 과연 어떻게 되었는지….”
“공천귀라는 마선 말입니까?”
그 순간 학고응이 주위를 살피며 비밀을 말한다는 듯 목소리를 낮췄다.
“이건 아는 이들이 많지 않은 얘기인데, 선마궁의 창고지기였던 공천귀가 사라지면서 관리하던 보물들도 전부 가져가 버렸다고 합니다.”
준혁은 당사자에게 직접들은 얘기였기에 겉으로는 놀란척했지만, 속으론 웃을 뿐이었다.
‘그래. 그가 자신이 봉인된 곳을 찾으라고 했는데…. 도대체 그곳이 어딜지.’
그 뒤로도 한번 입이 터진 학고응은 마선이나 대륙의 강자들에 관련된 소문을 하나씩 늘어놓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정신을 차린 듯, 마정에 대한 얘길 꺼내 들었다.
“크흠. 제가 요즘 흑석대륙에 처박혀서 얘기할 사람이 없다 보니 말이 너무 많았지요?”
“아닙니다. 덕분에 많은 걸 알게 되었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럼. 이제 제가 말한 그 수정을 보여주시겠습니까?”
학고응의 눈에 탐욕이 맴돌았다.
잠시 후.
탁-
찻잔이 놓인 탁자 위에 회색 수정이 하나 올라오자, 학고응이 번개처럼 물건을 채갔다.
그리고는 진품이 맞는지 천천히 확인 작업을 진행했다.
“진짜 마ㅈ..,, 제가 말한 수정이 분명합니다! 나머지도 보여주시겠습니까?”
부담스러운 학고응의 시선에 준혁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그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지 않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고개를 갸웃하는 학고응.
“적지주의 정보를 알려주는 대가로 회색 수정을 세 개나 구해 오라 하셨지 않습니까?”
“그, 그랬지요?”
잠시 뜸을 들이던 준혁은 별것 아니란 듯 말문을 열었다.
“그 수정이 화신체의 재료란 말은 왜 하지 않으신 겁니까?”
그 순간 의문이 서려 있던 학고응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학고응은 절대 들키지 말아야 할 비밀이 탄로 났다는 듯 연신 주변을 둘러보다가 빠르게 손뼉을 마주쳤다.
그러자 반경 2미터 정도의 구체가 생성되더니 두 사람을 가둬버렸다.
“그, 그게 무, 무슨 말이십니까? 하하…. 화신체라니요? 그런 대단한 비술의 재료라니…. 아 참 그리고 이건 혹여나 오해가 생길까 봐 잠시 주변을 차단한 거니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만에 하나라도 화신체를 만드는 비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게 알려진다면 큰 화가 미치는듯한 모습이었다.
“그렇습니까? 그럼 어디에 사용하는 물건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준혁은 소천경 수사의 장막이 주변을 완벽하게 차단했음에도 여유롭게 질문했다.
“어, 어, 그건…. 아! 상단의 비밀이라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이해해주십시오.”
상인이라는 자가 표정과 감정도 숨기지 못하고 당황하는 모습에 준혁은 짧게 혀를 찼다.
“그렇습니까? 요마궁의 선인에게 들은 말이 있어 혹시나 했더니, 제가 잘못 알았나 봅니다.”
“방금 요마궁이라 하셨습니까?!!”
그 순간 학고응이 화들짝 놀라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리고는 장막으로 덮고 있으면서도 전음으로 말을 전했다.
-수사. 어디까지 알고 계신 겁니까?
준혁은 상대방이 미끼를 문 것 같다, 얼렁뚱땅 말을 회피했다. 그도 마족 여수사를 상대하고 원영 대신 마정 껍데기를 얻었기에 추측하고 있는 것이지 확실한 정보는 아니었으니까.
-제가 지금껏 흑마지에 있었겠습니까? 어쩌다 보니 요마궁에 잡혀 들었다가 간신히 탈출한 것입니다. 그 수정들은 그곳에서 가져온 것이고요. 그들은 제가 도망갈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거칠 것 없이 대화를 주고받더군요.
-흐음…. 설마. 전부 알고 계신 겁니까?
안절부절못하던 학고응은 시간이 지나자 점차 차분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어느새 기세까지 발산해 가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사실을 밝혔다.
-수사께서 이미 다 알고 있는 듯하니. 더 숨겨 무엇하겠습니까? 맞습니다. 이 수정…. 아니 마정에서 암흑마기가 빠져나간 뒤 남은 이 껍데기는 화신체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재료가 맞습니다.
‘역시 그랬구나.’
-그럼 저도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수사께선 이 이야기를 꺼내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비밀은 수명을 단축시킨다는 것을 모르시는 겁니까?
은연중 압박이 들어오자, 준혁은 힘에 겨운 척 연기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너무 손해 아니겠습니까? 목숨을 걸고 탈출하며 가져온 물건인 것을. 거기다 그 가치가….
-무엇을 원하는 겁니까?
학고응의 입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준혁은 지금이 분기점임을 눈치챘다.
입 밖으로 나온 말에 의해 상대가 강도로 돌변하는 것을 목도할 수 있는….
하지만 그건 준혁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적지주의 정보를 아직 얻지 못하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대막리 때문.
만약 소란이 일고 소문이 대막리에게까지 들어간다면, 그때부턴 대천경 수사에게 쫓겨야 할 수도 있는 일.
그것만은 절대 피하고 싶었다.
점점 험악해져 가는 상대를 향해 빙그레 웃은 준혁이 찻잔을 들며 말했다.
“거래를 원합니다.”
“...지금 장난하시는 겁니까?!!”
파앙-
그 순간 학고응을 중심으로 영기 파동이 퍼지며 건물 전체가 영역 안으로 들어갔다.
‘호오…. 자유자재란 말인가?’
준혁은 아직까지 영역을 펼치기 전에 입 밖으로 영역을 선포해야만 했다.
‘영역’이란 것은 공간을 지배하는 ‘의지’였기에, 무형 상태를 유형의 공간으로 이미지화해야 했고, 입 밖으로 단어를 꺼내는 것은 그것을 실현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영역’이라는 단어를 직접 언급하지 않고 영역을 펼칠 수는 있었지만, 그렇게 한다면 훨씬 많은 영력을 소비해야 했기에 아직은 꺼려지는 행동이었다.
그에 반해 학고응은 매우 익숙하게 영역을 펼쳐냈고, 그것은 준혁과 같은 소천경이었지만, 그 차이는 꽤 크다는 뜻이었다.
물론 본인이 질 거라는 생각은 단 하나도 없는 준혁이었지만 말이다.
학고응의 눈빛에 어떤 각오가 물들려는 찰라. 준혁은 힘겨운 척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지금 가진 수정은 세 개뿐이지만, 탈출한 곳에 은밀히 들어갈 방법이 있습니다.”
“??”
“제가 본 것만 하여도 비슷한 크기의 수정이 서너 개는 더 있었습니다. 어떠십니까? 제가 그것을 가져다주면 저에게 무얼 주실 수 있겠습니까?”
준혁의 말이 끝난 순간, 당장이라도 칼을 빼 들 것 같던 학고응의 기세가 단숨에 사라져버렸다.
‘어쩌면 어리숙하게 행동했던 게 모두 거짓일 수도 있겠어.’
그리고는 좀 전처럼 얼굴에 당혹, 황당, 놀람이 번갈아 나타나며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엉거주춤했다.
“저, 정말입니까?”
“물건으로 증명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는 일을 입 아프게 뭐하러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만약 그것을 가져다주신다면...흐음….”
수정의 가치를 판단하려는 듯 학고응이 눈을 감고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화신체의 재료라는 가치는 웬만한 것들로는 상응하기 힘들 테니까.
그 모습에 준혁은 미리 준비해둔 말을 뱉었다.
“화신체를 만드는 비술, 그걸 주십시오. 그럼 수정에 더해, 마족들이 득실거리는 요마궁의 은신처를 오갈 수 있었던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
학고응의 입이 놀라움으로 닫히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