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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243화 (243/408)
  • 243화. 소천경(小天境) (4)

    “칼을 들이밀기 전에 생각이란 걸 하셨어야지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준혁은 영역의 힘을 강화하며 용천무의 날개를 착용했다.

    비브란이든 뭐든 만나야 위험이 될 것 아닌가?

    마족이 아닌 준혁은 그들의 권역에 발을 들이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애원하던 그녀도 표정을 싹 바꾸더니 악독한 눈빛으로 검은 삼지창을 꺼내 허공에 띄웠다.

    “후회하게 될 거야!”

    “그건 이미 그쪽에서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이익!”

    영역의 막에서 등을 돌린 여인은 준혁을 향해 손을 내리쳤다. 그러자 허공에 떠 있던 삼지창이 번쩍하며 준혁을 꿰뚫어 버렸다.

    스르륵-

    하지만 그녀의 삼지창이 관통한 건 준혁의 허상.

    어느새 한참 떨어진 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준혁이 차갑게 웃더니 수결을 맺어 그녀를 가리켰다.

    “어디 언제까지 버틸 수 있나 봅시다.”

    소천경에 오르자, 용천무의 날개를 사용하는 데 예전만큼 힘이 들진 않았다. 물론 체화해 자신의 본명 법보처럼 능숙하게 사용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무리 없이 연달아 사용할 수준까지 올라왔다.

    그랬기에, 조금 전 날개의 힘으로 공간을 비틀고 들어갔을 때, 상대에게 근접해 타격을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방해 없이 소천경 수사와 겨룰 기회는 흔치 않았기에, 준혁은 자신의 수련 경지를 파악하기 위해 점점 강도를 올려가며 상대방을 상대할 생각이었다.

    여인에겐 살고자 하는 전장이었지만, 준혁에겐 대련장이나 다름없었다.

    촤르르륵-

    그 순간 바닥을 가득 채웠던 금빛 실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여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

    “제발, 살려줘….”

    반나절 가까운 시간 동안 준혁에게 시달린 마족 여수사는 결국 반항을 멈췄다.

    이미 육신은 너덜너덜해져 있었고, 곳곳이 금빛 실에 꿰뚫린 채 정육점의 고기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제발…. 날 살려주지 않으면 비브란님이….”

    스걱-

    “수고하셨습니다.”

    애원과 협박을 번갈아 가며 입에 담던 여수사는 결국 목과 몸에 실선이 가더니 무너져내렸다.

    투두둑-

    그것이 끝이 아니었기에 준혁은 금빛 실을 그물처럼 만들어 그녀의 원영을 잡기 위해 손을 저었다.

    그 순간 금빛 실이 무너져버린 그녀의 몸 주위를 촘촘하게 에워쌌다.

    촤악-

    “허! 이런 게 가능하다니.”

    하지만, 금빛 실에 걸린 건 여인의 원영이 아닌, 익숙한 회색 수정이었다.

    “영역을 사용할 수 있는 분신이라고?”

    잠시 후 금빛 실에 사로잡힌 회색 수정에서 희끄무레 한 것이 흩어지려 하자, 준혁은 황급히 그것을 막아섰지만, 그것은 마치 물체도 영체도 아닌 듯 기화되며 사라져버렸다.

    텅 빈 회색 수정을 손에 쥔 준혁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의 상식으로는 분신이 영역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상대했던 건 분신이 아닌 다른 것.

    “설마…! 이것이 화신체(化神體)?”

    자신과 똑같은 자아와 능력을 갖춘 분신을 만들어내는 능력.

    각 종문이나 종족마다 최고 비술로 전해진다는 바로 그것이었다.

    “화신체를 만드는 재료가 마정의 껍데기였다니!”

    자신의 공간대에 수북이 쌓여있는 마정의 껍데기를 생각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제야 준혁은 거대 상단에서 구하지 못하는 것이 없던 학고응이 자신에게 회색 수정을 왜 부탁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적지주의 정보가 아무리 귀하다 하나…. 화신체의 재료를 그런 식으로 꿀꺽하려 하다니.”

    하지만 한편으론 의문이 치솟았다.

    “헌데 이상하구나. 학고응 그자도 알고 있는 사실을 대막리가 모를 리 없을 테고…. 설마. 남운상단만이 알고 있는 비술인가?”

    화신체에 대한 얘긴 들어보았지만, 준혁은 애초에 그것을 욕심내지도 않았었다.

    각 종문과 종족의 최고 비술을 떠돌이나 다름없는 준혁이 얻을 길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비술의 존재 여부와 그 재료로 의심되는 걸 알게 되자 욕심이 났다.

    선계에 올라온 후,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휘둘려지고, 결국 아마르곤까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일들.

    그런 것들이 더 강해지고자 하는 욕구를 불러일으켰고, 준혁은 여서령을 만난 후에도 선계에서 누구의 간섭없이 온전하게 바로 설 수 있을 정도로 수행을 쌓기로 결심한 후였다.

    그때, 금빛 실이 요동치며 준혁의 기감으로 아직 처리하지 못한 화신기 수사들의 상태가 전해졌다.

    여수사의 부하였던 네 화신기 수사.

    그들은 준혁의 영역에서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하고 아스러졌다. 하지만 영역에 잡아먹힌 건 그들의 육체뿐이었다.

    여전히 네 수사의 원영은 금빛 실에 꽁꽁 둘러싸인 채 계속해서 발버둥 치는 상태였다.

    준혁은 그런 그들을 무심하게 쳐다보다 수결을 맺었다.

    “많이 부족하구나.”

    영역의 의지가 화신기급 원영을 강제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란 걸 이번에 확실히 파악했으니, 앞으로 어떤 식으로 발전해야 할지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했다.

    잠시 후, 준혁의 정수리 위로 모습을 드러낸 원영이 한 손에 조막만 한 식검을 들고, 등 뒤로는 희끄무레한 붉은 인형의 형체를 매단 채 금빛 실에 묶여 있던 원영들에게 날아갔다.

    천혈의 식사 시간이었다.

    ***

    한편, 준혁이 소천경에 이른 마족 여수사를 참살한 그 순간.

    “커억!”

    새하얀 구름이 드리운 고즈넉한 언덕 위에 좌정하고 있던 여인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한참이 지난 후 겨우 정신을 차린 여인은 악독한 눈빛으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바들바들 떠는 것이, 분노에 차서만은 아닌 듯했다.

    “이 버러지 같은 놈,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분명 전마족 놈이었어! 내가 찾고 만다!”

    시간이 지나 마음이 진정됐는지 여인은 원반 형태의 이동 법기를 꺼내더니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버렸다.

    잠시 후, 수십 미터가 넘는 성채 앞에 도착한 여인은 주저 없이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저기서 인사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여인은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겹겹이 배치된 문을 지나 거대한 대전에 들어섰다.

    “무슨 일인데 그리 분에 차 있느냐? 허어, 수행이 엉망이구나. 무슨 일이 있었더냐?”

    소천경을 단단히 다지고 있던 여인의 수행은 조각난 구슬처럼 기운이 풀풀 흩날리고 있었고, 원영은 상처 입은 것처럼 수행이 흔들리고 있었다.

    대전 끝 옥좌에 앉은 여인의 질문에, 한달음에 달려왔던 마족 여수사가 억울한 듯 소리쳤다.

    “비브란님이시여! 제 화신체가 파괴당했습니다!”

    “허어. 누가 감히? 우선 진정하고, 차분히 말해 보아라.”

    피잉-

    그 순간, 옥좌 여인의 손끝에서 푸른 물방울이 쏘아져 나가더니 마족 여수사의 이마를 파고들었다.

    그러자 여인의 얼굴색이 밝아지며, 그녀의 원영은 엄마 품에 안긴 아이처럼 쌔근거리며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안정을 취한 마족 여수사에게서 흑마지에 침입한 전마족 고위수사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호오…. 지괴를 소환했는데, 그것들을 단숨에 녹여 흡수해버렸다?”

    “그렇습니다. 비브란님께서 주신 법기가 무용지물이었습니다.”

    “흡식(吸食)을 사용하는 전마족 출신이라…. 나도 들어본 바는 없구나.”

    옥좌의 여인이 한 손으로 턱을 괴며 생각에 빠지는 듯 보이자, 마족 여수사는 한동안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여인이 생각을 끝마치고 고개를 들자 그때서야 강하게 발언했다.

    “비브란님! 분을 참을 수 없습니다! 수백 년간 정련한 제 화신체가!! 으윽! 복수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물론 그리해야지. 흑마지에서 나타났다면 진마정의 존재에 대해 알 수도 있는 일. 반드시 잡아야 할 테지.”

    화신체를 잃어버린다는 것.

    그건 그저 분신이 하나 사라진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수도자의 근원인 원영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화신체가 파괴당했단 건 원영이 반 토막 나는 충격과 비교할 만했다.

    ***

    암흑기로 이루어진 옛 구지대륙의 어둠 속. 흑마지 앞.

    준혁은 영역을 거둬들이고 내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단(丹) 속에서 배가 부른 듯 하품을 쩍 하는 원영과 그 곁에 형제처럼 자리 잡은 핏빛 천혈.

    네 화신기 수사의 원영을 잡아먹은 그것은 맥이 살아난 듯 점점 진한 핏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아마르곤에게 남겨준 천혈 한 방울을 완벽히 회복하진 못했지만, 어느 정도는 기력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잠시 후, 주변에 남은 흔적을 지워버린 준혁의 피부색이 점점 옅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마에 뿔이 작게 줄어들어 자취를 감춰버렸다.

    순식간에 인족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쫓아오기 전에 벗어나야겠군.”

    마족 여수사의 화신체가 정확히 어떤 공능을 가졌는지는 모르나, 최소한 영역을 펼치기 전까지의 상황은 그녀의 본체에 그대로 전달됐을 터.

    준혁은 괜히 오래 머물러 성가신 일을 겪고 싶진 않았기에 바로 어둠을 갈랐다.

    파앗-

    하지만 빛살처럼 날아가는 준혁의 시선은 흑마지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아마르곤 수사, 내 반드시 그댈 찾으러 오겠습니다.”

    아마르곤이 둔술로 사라져버린 후 그를 찾기 위해 수십 일을 허비했었다.

    하지만 진마정에 깃든 암흑마기의 근원을 이용해 짙은 암흑기 속으로 숨어버린 그를 찾는 건 불가능 한 일.

    결국 그를 찾기 위해선 흑마지 전체를 영역으로 만들어 의지를 표출할 수 있는 경지에 올라야 함을 깨달은 준혁은 새로운 결심을 다졌다.

    그 후, 공간대 안에 불안정하게 요동치는 마정들을 안정시켰고, 주위에 흩뿌려진 회색 수정마저 회수했다.

    그리고는 흑마지를 벗어나려 움직였다.

    하지만 흑마지의 층을 이루는 결계를 통과하기 위해 적마도를 발동하려던 찰나.

    진마정의 근원이 빠져나가고 평균 수준의 암흑마기만이 남자, 멸진단을 흡수해 얻은 영력과 균형이 맞춰졌고, 그 순간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진마정의 융화의 힘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막리가 진마정을 손에 넣길 원했던 이유. 융화의 힘.

    융화의 힘은 준혁의 원래 영력과 화신단과 멸진단으로 얻은 기운들, 거기다 암흑마기까지 융화시켜 완벽하게 하나로 만들어 버렸다.

    일이 그렇게 진행되자, 적마도를 이용해 밖으로 나가는 것은 포기해야 했다.

    융화단계를 거쳐 원영과 육신이 정진을 거듭하는 이때 적마도를 사용한다면, 다시 내부의 균형이 깨질지도 몰랐던 것.

    그랬기에 준혁은 그때부터 영역으로 몸을 보호한 후, 내부로 침잠해 수행을 다지는 데만 몰두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100년이나 지났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시간을 망각할 정도로 내면으로 침잠해있었기에, 100년이란 시간은 정말 현실감 없이 준혁에게 다가왔다.

    말이 100년이지, 그는 매우 짧은 기간이라고 느꼈던 것.

    문득 허탈한 웃음이 흘렀다.

    자신이 수련하는 100년 동안 아마르곤이 무사할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명혼단의 기운과 천혈의 힘이 그를 보호해 줄 것이라 믿어야 한다.’

    그래야만, 과거에 붙잡히지 않고 정진해 나갈 수 있을 것이고, 그래야만 수행을 올려 아마르곤을 구할 수 있을 테니까.

    거기다, 긴 시간 동안 암흑마기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수행을 완벽하게 공고히 하긴 했지만, 그 영향인지 여전히 나머지 종속들은 깨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비술로 보호된 그들의 원영은 완벽하게 회복되었지만, 마치 영면에 든 것처럼 정신만이 깨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우선 이곳을 벗어난 후, 적지주의 정보만 얻고 나면 그 후에 하나씩 해결해 나가야지.”

    콰앙-

    어느덧 흑마지에서 시선을 돌린 준혁의 몸은 음속을 초월하며 쏘아져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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