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화신기. 그리고… (3)
“으….”
혼백이 육체와 분리된다면 이런 느낌일까?
준혁은 아득하니 끝 모를 어둠 속으로 떨어진다는 느낌을 간신히 버텨내고 정신을 차렸다.
‘명혼단이 아니었다면 내 혼백 따윈 흔적도 없이 소멸해 버렸을 것이다. 이 상황을 다행이라 여겨야 할지. 아니면….’
내부로 들어온 진마정의 폭발에 영혼은 굳세게 버티고 있었지만, 신체는 그러지 못한 상태였다.
이미 준혁의 몸은 검고 붉게 괴사했다가 재생성되길 반복하고 있었다.
괴사할 땐 시커먼 상태로 쭈글쭈글하게 줄어들다가 재생될 땐 붉게 달아오르며 풍선처럼 부풀었다.
준혁의 몸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폭발력을 늘리기 위해 점점 힘을 비축하는 폭탄 같아 보였다.
그리고 규모를 키워가는 폭탄의 말로는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그것마저 사소한 문제일 뿐.
활화산처럼 난동을 부리던 진마정의 암흑마기는 원영을 휘감은 채 침식해가고 있었고, 그로 인해 내부의 영기가 점점 굳어가는 상태였다.
즉 준혁은 지금 정신만 멀쩡하지, 몸은 터지기 직전이었고, 영력은 돌덩이처럼 굳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이대론 반드시 죽는다.’
몸이 터져 죽든, 암흑마기에 완전히 침식당하든.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한다. 시간이 얼마 없어.’
지금은 멸진단의 영력과 초연단의 회복력이 간신히 삶의 끈을 붙잡아주고 있을 뿐. 빨리 해결하지 못한다면 돌이킬 수 없게 될 게 뻔했다.
잠시 후, 준혁의 걱정대로 증폭을 거듭하던 암흑마기가 멸진단의 영력을 대부분 잡아먹더니, 몸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이제는 암흑기에 침식당한 종속들처럼 생명력을 잃어갈 위기가 임박한 상황.
‘그래, 우선은 마기의 증폭을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조금 전까지 몸속에 남아있던 멸진단의 기운보다 강한 영력으로 맞서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그리고 준혁에겐 그럴 방법이 있었다.
멸진단 두 알.
만약 예비 멸진단을 방어 목적이 아닌 수행증진을 위한 방법으로 운용한다면 암흑마기에 대항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지금 내 몸은 암흑마기로도 자리가 부족해.’
준혁의 몸이 물병이라고 친다면 이미 검은 물이 흘러넘치고 있는 상황. 거기에 깨끗한 물을 억지로 넣으면 물병은 깨져버리고 말 게 분명했다.
빠르게 생각을 거듭한 준혁은 간신히 의지를 움직여 공간대 안에 보관 중이던 화신단 두 알을 꺼냈다.
‘우선 용량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벽까지 세운다!’
화신단 두 알에 이어 멸진단 한 알까지 손으로 이끌려 나왔다.
화신단으로 수행을 올려 몸이라는 그릇의 크기를 키우고, 동시에 멸진단을 복용해 암흑마기에 맞서는 것.
준혁은 누구도 시도해보지 않았고, 시도할 생각조차 하지 못할 일을 각오와 함께 진행했다.
꿀꺽-
스르르-
잠시 후 화신단 한 알이 몸 안으로 들어가 소리 없이 녹아들었다.
***
쾅!!
직접 소리를 들은 건 아니지만 뇌리를 두드리는 충격에 준혁은 정신을 부여잡으며 화신단의 기운을 빠르게 인도했다.
목표는 오로지 원영.
지금은 특수상황이었기에 화신단의 기운을 오로지 원영에 때려 박아 급진적으로 수행 상승만을 유도할 생각이었다.
평소처럼 조용히 침잠해 들어가, 관조와 함께 몸과 원영의 조화를 이루고 수행을 올릴 순 없었다.
그랬다간 당장 암흑마기에 침식당할 수도 있는 일.
무식하지만 원영을 강제로 성장시킨 후, 그 후에 영기구름의 영력을 이용해 몸의 성장까지 이뤄낼 요량이었다.
이론적으로 생각해보면 평소보다 빠르게 수행을 올릴 수 있고, 당장 원영이 수용할 수 있는 영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갈 테니 준혁은 무리가 가더라도 그렇게 진행할 생각이었다.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잠시 후 화신단의 기운을 온전하게 받아들인 원영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전부터 준비는 충분했기에 계기만 주어진다면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암흑마기가 침식하기 시작해서인지 원영의 그릇은 커질 듯 말 듯 좀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그럴 거라 생각했지.’
한참 동안 화신단을 흡수한 원영의 상태를 파악하던 준혁은 나머지 화신단을 집어삼켰다.
꿀꺽-
그 순간, 엄청난 영력이 폭발하며 원영의 기운이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지금!’
동시에 멸진단 한 알을 재빨리 삼킨 준혁은 화신단 두 알의 기운을 이용해 원영의 수행이 상승하게 유도하는 한편, 멸진단 속 법리를 읽어내고는 공법을 운용하듯 기운을 퍼트렸다.
촤아악-
그 순간, 수행 상승과 동시에 멸진단의 약효가 암흑마기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이런 무식한 방법이 통하는구나.’
이론적으로는 가능한 방법이었지만, 100% 확신을 가진 것은 아니었기에 준혁은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게 그리 만만하기만 할까?
원영이 화신단의 기운을 대부분 흡수하며 화신기에 오르려는 순간.
준혁의 머리 위로 엄청난 양의 기운이 모여들며 영기구름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런!!”
다만 영기구름의 색깔이나 모양이 평소와는 전혀 달랐다.
쿠르릉-
세상 모든 곳에 만연하게 퍼져있는 것이 영기이기 때문에 당연히 수행 상승 때 영기를 불러올 수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이곳은 암흑기만으로 이루어진 공간.
영기구름은 거대한 암흑기로 만들어져 있었고, 마족들이었다면 환호성을 지르고 부러움을 연발했을 상황이 준혁에겐 죽음의 전조증상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명백한 실책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고 성급하게 판단하다 보니 가장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구나!’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에 후회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는 일.
준혁은 빠르게 생각을 거듭했고, 한 가지 방안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 영기구름이 없다면 강제로 영기구름을 만들면 된다!’
판단을 끝낸 준혁은 과감하게 움직였다.
공간대에 마지막 남은 멸진단을 꺼낸 준혁은 그것을 입에 넣으며 수결을 맺어 자신의 신체 곳곳을 찌르기 시작했다.
‘멸진단이 가진 영력을 영기구름의 영력이라 생각하고 수행을 올린다! 간접적으로 필요한 만큼만 흡수해내면 된다!’
먼저 복용한 멸진단은 방어 법리에 따라 암흑마기에 맞서게 하고, 나머지 멸진단을 복용해 영력을 대신하면 됐다.
문제라면 ‘나약한 몸뚱이가 버텨줄 수 있는가?’였지만, 지금 준혁에겐 선택의 자유가 없었다.
그 순간.
콰아아앙!!
내부에서 한 번 더 폭발이 일어나더니, 원영의 수행은 눈 깜짝할 사이에 화신기를 뚫어버렸다.
곧이어 멸진단의 어마어마한 영력이 파도처럼 밀려들더니 준혁의 신체도 화신기에 걸맞은 상태로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평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속도였고,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으윽”
하지만 준혁은 일이 시작도 되지 않았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연형기 땐 진마정의 암흑마기와 멸진단의 영력이 그저 자신이 감당할 수준이 아닌 것 같다고 느꼈다면,
화신기에 오르자 그 힘들의 실체가 어느 정도 체감되어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감히 화신기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걸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런 준혁의 생각이 맞다는 듯, 멸진단의 영기를 받아들이며 화신기에 오른 원영은 계속해서 기운을 강제로 주입 당했다.
그에 덩달아 암흑마기가 원영을 침식하기 위해 점점 더 기운을 증폭시키기 시작했다.
내부가 폭발의 연속이라면 외부는 초회복의 연속이었다.
준혁은 살이 뭉텅이로 썩어들어가다가 다시 재생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면서도 올바른 해결책을 세우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역시 예상대로 내겐 과도한 힘이다.’
으드득-
원영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봤을 때, 화신기 중기 후기를 넘어 어쩌면 소천경까지 바로 치달릴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하늘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몸으로 감당할 수 없는 영력을 받아들인다면 그 끝은 참으로 처참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은 몸의 괴사와 회복의 반복이 증명하는 것이었다.
만약 준혁이 준비된 자였다면 두 기운이 충돌하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신체의 괴사 따위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
이미 화신기에 강제로 오른 후 지속해서 수행이 올라가고 있는 행위 자체가 엄청난 무리라는 걸 증명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무슨 수를 쓰든 몸 안의 기운을 소비해야 한다. 하지만 암흑마기와 멸진단이 서로 견제하듯 기운을 증폭하고 있으니 도대체 어떤…. 아! 혹시!’
그때 준혁의 뇌리로 용천무가 남긴 물건들이 떠올랐다.
‘왕의 정수’를 얻기 위해선 완벽히 체화할 필요가 있던 100개의 비늘과 발톱.
그것들을 체화시키기 위해선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영력이 소비되었기에 우선순위에서 계속 밀리던 물건들.
생각이 그것에 미친 준혁은 즉시 공간대에서 물건들을 꺼내, 한꺼번에 삼켜버렸다.
예전엔 하나씩 체화하는 것도 부담스러웠지만, 지금은 그 부담스러움이 천재일우의 도움이라 여기면서.
***
흑마지 밖.
흑마지 안과 비교한다면 밖의 암흑기는 애교 수준이라 할 만했지만, 그곳에서 전심전력으로 전투를 한다면 또 달랐다.
밀려드는 마족들을 상대하던 대막리를 비롯한 조호랑과 교휴.
세 사람의 안색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끝도 없을 것 같던 전투가 상대방의 갑작스러운 후퇴로 소강상태에 이르자, 세 사람은 각자 단약을 복용하며 다음 전투를 준비했다.
“휴…. 마족 놈들의 영역은 정말 싫네요. 끈적끈적한 기운이 몸에 달라붙는 느낌이에요.”
교휴가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했는지, 끔찍하다는 표정과 함께 몸서리를 쳤다.
아직까지 좌정한 채 회복 중인 조호랑을 힐끔 바라본 교휴는 마족들이 물러난 방향을 바라보는 스승의 옆으로 이동했다.
대막리는 교휴가 다가오는 걸 느끼고는 살짝 고개를 돌려 고생했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먼 곳을 주시했다.
“이다음이 고비가 될 것 같구나.”
“스승님께선 아직 여유가 있는 것 아니셨던가요? 그자를 상대할 때 최선을 다하지 않으신 줄 알았는데.”
제자의 말에 대막리가 쓰게 웃었다.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한 것이다. 보이느냐 저기 저곳.”
대막리가 가리킨 곳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교휴는 고갤 저었다.
“저곳에 그자의 사형인 그가 있다. 아마 내가 그자를 처리했다면, 당장 이곳으로 왔을 테지.”
“그자의 사형이면…. 살선(殺仙)으로 유명한….”
“그래. 그 말이다.”
교휴가 겁먹은 표정을 짓자, 대막리가 말을 이었다.
“헌데…. 이젠 내가 어떻게 하지 않아도 그가 참전할 것 같구나.”
“설마? 지금 도망간 게 아니라….”
“그래.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기 위해 물러난 것이다. 며칠 이내로 이곳으로 몰려올 테지.”
“그럼…. 돌아가실 건가요?”
차마 도망이란 단어를 꺼내지 못한 교휴.
그런 제자를 보고 피식 웃은 대막리는 시선을 옮겨 흑마지의 입구와 근처에서 회복 중인 조호랑을 바라보았다.
“그래. 이제 그만 포기하고 돌아가겠다. 아직 나오지 않는 걸 보면 그 녀석도 실패한 것 같고 말이다.”
“아니에요!”
그때 가만히 회복하고 있던 조호랑이 벌떡 일어나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소림주께서 약속하셨잖아요? 제가 그를 살려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시겠다고!”
“그랬지. 허나 벌써 아홉 날이 지났다. 내가 영역으로 보호해줬다 해도 버티지 못했을 시간이야. 그는 암흑기에 침식당했든 멸진단을 욕심냈든. 아마 귀천하였을 것이다.”
“그럼 적마는 어쩌시려고요?”
조호랑이 준혁의 필요성을 부각시키자, 대막리는 쓰게 웃더니 다시 마족들이 물러난 방향으로 고갤 돌렸다.
“그래. 그랬기에 살려주고 내 귀한 단약들을 아낌없이 지원한 것이었지. 그놈을 죽이고 적마를 빼앗는다고 해도, 적마의 봉인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 전혀 알아보지 못했으니까.”
만에 하나 인족 수사를 죽여 적마를 빼앗고 난 뒤, 여전히 봉인을 풀 수 없다면 난감한 상황이 될 수도 있었기에 그를 살려줬던 대막리는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조호랑 수사. 그대가 그 인족 수사에게 관심이 있단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미 죽었을 것이 확실한 놈을 위해 마족 대군, 특히 그놈을 상대할 순 없는 일. 정 그렇다면 하루, 정확히 하루만 더 기다리겠다.”
그때. 말을 이어가던 대막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구겨지더니 교휴와 조호랑을 향해 양손을 뻗었다.
“피해!!”
그 순간 두 여인이 엄청난 충격에 뒤로 밀려났고, 동시에.
쿠아아앙!!
흑마지의 입구 위로 상상도 할 수 없는 미증유의 기 폭풍이 일어났다.
“이. 이게 무슨….”
잠시 후. 넋이 나간 듯 조호랑이 흑마지를 바라보자. 그런 그녀의 뒤로 대막리가 다가왔다.
“내부의 암흑기가 폭발한 것인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현상으로 인해 마족 대군이 움직일 것이다. 어쩔 테지? 당장 물러날 텐가? 기다릴 텐가? 그대가 결정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