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화신기. 그리고… (1)
닿기만 해도 압사당해 죽을지도 모르는 흑마지에 도움 없이 혼자 들어가라니?
준혁은 보기 드물게 당황하며 눈빛이 흔들렸다.
-소림주시여. 저를 너무 높게 평가해주시는 게 아닌가 합니다. 진마정은커녕 입구도 통과하지 못할 겁니다.
준혁이 바로 앓은 소리를 하자, 대막리의 등 뒤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자기병 두 개를 건네고는 사라졌다.
너무나 순식간에 생겨났다 사라졌기에 마족 수사가 눈치채지 못하게 대막리가 신경을 쓰고 있음이 느껴졌다.
-저놈 역시 대천경에 이른 수사. 그대를 보호해주며 시간을 끌 상황은 아니다. 그대가 진마정을 구해올 때까지 버티려면 내 힘을 빌려준다는 건 어불성설. 대신 멸진단(滅鎭丹) 세 알과 초연단(超連丹) 한 알을 줄 테니 내 영역의 힘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야.
‘멸진단과 초연단이 무엇이길래, 대천경 수사의 지원을 대신한단 말인가?’
-대신 명심하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대도 모든 수단을 아끼지 말게. 비밀이 있음을 알았어도 두고 보았던 건 쓸모가 있어서이니, 그 쓸모를 지금 보여줘야 하네.
말을 하던 대막리가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자 멀리 떨어져 있던 허공이 터져 나가며 마족 수사를 수십 미터 날려버렸다.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이득만 있었던 건 아닌지, 인상을 찌푸리며 수결과 동시에 구불구불하게 생긴 검을 꺼내 하늘로 집어 던졌다.
준혁은 대막리의 말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았기에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다만 준혁의 실력으론 가늠할 수 없는 영기파동과 법력이 충돌한다는 것만 느껴질 뿐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마족 수사와 몇 번의 접전을 끝냈는지, 대막리가 말을 이었다.
-멸진단은 일반 단약이 아닌, 법리가 담긴 물건이니 먹는 순간 어찌 사용해야 하는지 깨달을 수 있을걸세. 충고하자면 오직 몸을 보호하는 데만 사용하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연형기 수행 따위로는 몸이 버티질 못할 테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준혁은 전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결정권이 없다는 걸 알았기에 반쯤은 자포자기한 상태로 대답했다.
그러다 공간대에 넣어두었던 주먹만 한 단약을 꺼내 들었다.
-그럼 이건 사용해도 의미가 없….
그 순간 영역의 힘을 빌려준다던 단약이 먼지처럼 흩어지더니 대막리의 몸으로 흡수돼 사라져버렸다.
-놀랄 것 없네. 처음부터 그것은 내 법력으로 만들어낸 물건이니까. 그럼 이제 들어갈 준비를 하게. 초연단을 먹고, 들어가자마자 멸진단을 사용하면 되네.
설명을 마친 대막리가 영역의 기질을 바꾸며 본격적인 방어태세로 전환하려 하자, 준혁은 하나뿐인 초연단을 재빠르게 삼켰다.
‘이건!!’
초연단은 몸속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온몸으로 퍼지더니, 찰나의 순간 몸을 휘감다가 원영에게 밀려들었다.
준혁이 놀란 이유는 바로 그 순간 원영 주위에 죽은 듯 잠들어 있던 구슬들이 생기를 띠며 금이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무엇이기에!’
그동안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도 꿈적도 하지 않던 종속의 구슬들이 생명을 되찾자 준혁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다만 아쉬운 건 약효가 조금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한 알. 딱 한 알만 더 있으면 종속들이 온전히 회복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랬기에 준혁은 대막리에게 급하게 전음을 날렸다.
-소림주시여! 흑마지에 들어서기 전 부탁이 있습니다.
-뭐지? 급한 게 아니면 다녀온 뒤 얘길 나눠도 충분할 텐데?
준혁은 아직 체감하지 못했지만, 희대의 보물이라 할 수 있는 멸진단과 초연단을 내준 대막리는 부탁이란 말에 인상을 구겼다.
애초에 조호랑과의 거래가 아니었다면 멸진단 한 알만 먹인 후 들여보냈을 테니까.
-초연단을 하나만 더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대는 그것이 어떤 물건인지 아는가?
-모릅니다. 허나 그동안 치료하지 못했던 제 상태가 단번에 회복된 걸 보면 희대의 명약인 건 알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허, 초연단은 원영마저 치료할 수 있는 보물로 천단(天丹)이라 불린다. 조호랑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준 것이지, 나에게도 귀한 건 마찬가지다.
‘없진 않구나!’
원영을 치료한다는 말에 준혁은 ‘역시’라는 생각에 간곡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불안한 마음이 큽니다. 소림주께서 적마라 칭하시는 검의 능력은 만능이 아니옵니다. 제 수행보다 강력한 결계를 지나치려면 막대한 힘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신체의 강함까지 요구합니다.
-흠….
-적마의 능력을 극한으로 발휘하려면 제 몸의 회복이 가장 중요합니다. 화신기에 올랐다면 모를까. 지금 저로서는 소림주의 바람을 이뤄드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준혁의 말이 이어지자 대막리가 바쁘게 손을 놀리는 와중에 흥 소리를 내며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초연단을 내리면 진마정을 가져오고 아니면 못한다고 협박이라도 하는 것인가?
-협박이라니요!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입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제 현 상태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 그렇다 그 말입니다.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던 대막리는 잠시 후 자기병 하나를 더 건넸다.
-좋다. 대신 이걸 받아 가려면 한가지 확답을 하고 가거라.
-말씀하십시오
-진마정을 구해오지 못하면 내 너를 필히 참하겠다. 내게 이만큼의 물건을 얻어가고도 아무런 성과가 없다면 그만한 각오는 해야 한다.
준혁은 고민 없이 긍정을 표했다.
-물론입니다!
-그리고 언제가 되었든 내가 필요할 때 나를 위해 한 번 더 일해야 한다. 그건 내가 아니라 네가 조호랑에게 요구해야 하고. 그리하겠느냐?
어차피 진마정을 구하지 못한다면, 조호랑을 따라가기는커녕 계속해서 흑마지를 탐험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
아니라 해도 준혁의 목숨은 대막리의 기분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게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건 조호랑을 따라간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우선 얻을 수 있는 건 전부 챙기는 게 더 중요했다.
만에 하나라도 진마정을 구하지 못한다면?
‘절대 날 죽이진 못할 테지.’
죽인다고 협박했지만, 그건 진마정을 구하는 데 최선을 다하라는 경고가 담긴 것이지 실제 그렇게 행하겠다는 뜻은 아닐 것이었다.
애초에 적마의 힘이 탐났다면 자신을 죽이면 그만이었다. 그 후에 적마와 계약해 그 능력을 갖추면 상황은 더 쉽게 흘러갈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건 분명 준혁이 모르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이유로 인해 자신을 쉬이 죽이지 못할 거라 확신했다.
그때 대막리 영역의 기질이 점점 변해가자, 이상함을 감지한 마족 수사가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우선 입구를 확보한다! 모두 폭혈단을 삼키거라! 사형이 끼어들기 전 진마정을 얻고 돌아간다!”
그리고 그 순간 대막리의 외침이 사방을 흔들었고,
“지금!”
준혁은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순간이동 하듯 움직이더니 흑마지 안으로 풍덩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에 마족 수사의 등 뒤로 무시무시한 이빨을 가진 전영이 불화산처럼 나타났다.
“감히!! 이브락! 이토락! 저놈을 죽여라!”
준혁이 흑마지 안으로 모습을 감추자 당황한 마족 수사가 외쳤고, 그의 신호에 주위를 둘러쌌던 인원 중 두 명이 재빠르게 흑마지 쪽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둘은 흑마지에 닿기도 전 각각 조호랑과 교휴에게 앞이 막히고 말았다.
이미 대막리에게 행동강령을 전해 받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두 사람이었다.
“헤, 그렇지 않아도 마족의 영역을 구경해보고 싶었는데 잘됐네.”
조호랑이 이죽거렸고.
“조호랑 수사. 저와 내기할래요? 누가 먼저 상대를 처리하는지? 호호.”
교휴가 눈웃음을 쳤다.
그리고 대막리의 전신에서 영력이 폭발하더니, 번개처럼 마족 수사에게 쏘아져 나아갔다.
대막리의 방어 전술.
그는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
풍덩-
먹물 안에 들어온 것처럼 끈적한 암흑기가 온몸을 짓누르는 흑마지 안.
준혁은 안에 들어서자마자 피부를 시작으로 몸이 괴사해 들어가는 걸 느꼈다.
하지만 괴사와 동시에 초연단의 약효가 발휘되며 몸이 회복됐다.
‘정말 대단하구나! 실시간으로 몸을 재생시키다니! 이걸 가지고 있다면 목숨을 하나 예비로 두는 것과 다르지 않겠어.’
그 모습에 놀라움을 숨기지 못하고, 두 눈을 부릅뜨던 준혁은 재빨리 멸진단 한 알을 꺼내 삼켰다.
화악-
그 순간 온몸에 영기 폭풍이 몰아치는 것 같은 황홀감과 함께 아득함이 느껴져 혼백이 날아갈 것 같았다.
“으윽”
하지만 그런 황홀감과 아득함도 잠시뿐, 멸진단은 진압하고 멸한다는 이름답게 외부에서 침식을 시도하는 암흑기를 간단하게 밀어내 버렸다.
그리고 체화되어 몸을 한 바퀴 순회하고 나자, 경험해 보지 못한 구결들이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법리를 담았다는 말이 이것이구나!’
멸진단은 영기구름이 품고 있을 법한 막대한 영력을 품고 있었고, 동시에 단약 자체가 공법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준혁은 온몸에서 들끓어 오르는 영력을 느끼며 대막리가 전해준 충고를 떠올리고는 재빠르게 단약의 법리를 이해했다.
그리고는 그중 가장 안정적인 방법으로 기운을 유도했다.
쿠르릉-
그러자 거대한 해일이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어쩔 수 없다는 듯 원영을 배제한 채, 체내 주요 기간 위주로 도도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욕심을 내지 말란 뜻이 이거였어.’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영력을 느끼며 준혁은 그것을 흡수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만약 멸진단이 품은 영력 중 절반만 흡수해도 화신기 따위는 가볍게 뚫어버리고 소천경까지도 바라볼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대막리가 괜한 경고를 하진 않았을 터, 준혁은 욕망을 꾹 눌러 참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건 독이 될 테지.’
멸진단이 가진 영력은 연형기인 자신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라는 걸 여실히 느끼고 있었기에 욕심을 버리는 게 합당한 선택이기도 했다.
준혁은 모르지만, 멸진단은 실제로 소천경에 이른 수사들이 위선경으로 올라갈 때 도움을 주는 물건이었고, 심지어 위선경 수사가 대천경에 이를 때도 조금이지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영단이었다.
말 그대로 보물 중의 보물이라 할 수 있는 영단.
그런 물건을 진마정을 구하는 데 과감하게 사용했으니 대막리가 진마정을 얼마나 바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잠시 후 멸진단의 힘이 초연단과 상호작용하며 암흑기로부터 완벽한 보호 작용을 하자 그제야 준혁은 대막리가 전해준 극락종을 꺼내 발동시켰다.
뎅~
극락종은 멸진단의 영력을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받아들이더니 준혁의 머리 위로 떠올라 좌우로 천천히 흔들렸다.
뎅~뎅~
그러자 종소리와 함께 영기파동이 퍼지며 준혁의 몸에 보호막을 만들어냈다.
신기한 건 종이 울릴 때마다 보호막이 중복되어 계속 겹쳐진다는 것.
‘이것도 대단하구나. 용천무의 날개에 비해 부족하지 않겠어.’
흔히 선계의 으뜸 법보라는 천영보(天靈寶)급일 수도 있었다. 최소한 영보(靈寶)급은 분명했다.
그때, 흑마지의 입구로부터 은은한 영기파동이 흘러들어와 준혁의 몸을 흔들었다.
두웅-
‘허, 이 안까지.’
자신이 몸을 날리기 직전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려 했으니, 지금의 파동은 그 여파가 틀림없었다.
흑마지에 들어선 순간 정비를 했기에, 입구와 가까워 파동을 느낀 것이기도 했다.
‘빨리 움직여야겠구나. 늦장 부리다간 마족들 좋은 일만 시킬 수도 있겠어.’
만약 진마정을 구한 후 흑마지 밖으로 나갔을 때, 마족들이 전투에서 승리한 후라면?
준혁은 상상도 하기 싫은 최악의 가정이 떠올라 절로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내려가자.’
준혁은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빠르게 하강하기 시작했다.
더 깊고, 더 짙은 먹물 같은 암흑기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