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남운상단 (1)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뭐라고 말하긴 그냥 좋다고 해!”
살짝 광기가 맴도는듯한 눈빛에 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주눅이 들며 주춤거렸다.
‘혈맥 때문인가?’
가감 없이 호감을 드러내는 모습에 심영근과 천혈 때문이라는 확신이 섰지만, 그렇다고 덥석 물 순 없었다.
천혈로 인해 심영근이 가진 효과가 극대화되었다고는 하나, 호감이라는 감정이 준혁이 생각하는 관점과는 전혀 다르게 작용할 가능성도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기회인 건 분명한 일.
한참을 숙고한 준혁은 결국 긍정을 표했다.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우선 치료하고 있어. 나는 소림주랑 담판을 짓고 와야겠으니까.”
그녀는 준혁의 답변에 낯빛이 환해지더니, 자기병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명혼단이야.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될 거야. 그리고 이건 활신미주! 명혼단으로 몸을 다스리고, 활신미주는 그다음.”
‘명혼단?’
명혼단이 무엇인가? 혼을 강화해주는 보물이 아니었던가?
‘설마 선계엔 이것이 흔하다는 말인가?’
자기병에 이어 호리병 하나를 꺼낸 여인이 황급히 몸을 돌려 석실 입구로 향하자, 준혁은 급하게 그녀를 불러세웠다.
“명혼단이 무엇입니까? 오래전 고서에서 혼을 단련해주는 단약이 있다고 했는데, 혹 그것입니까?”
“뭐?”
준혁의 말에 어리둥절해하던 그녀는 잠시 후 쾌활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상한 잡서라도 봤나 보네. 혼을 단련해주는 명혼단은 이야기꾼들이 만들어낸 얘기야. 물론 아주 오래전엔 비술로 그런 효과를 가진 단약을 만들어낼 수 있긴 했지.”
“허면 지금은 아니란 말입니까?”
여인은 혀를 쯧 하고 차더니, 밖으로 향하던 몸을 다시 돌렸다.
“네가 말한 명혼단을 만들기 위해선 지금은 구할 수도 없는 재료들뿐 아니라 중대한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해.”
“경청하겠습니다.”
“명혼단을 만드는 수사 본인의 정련된 혼! 그것이 필요하다 이 말이야. 하지만 누가 그런 걸 만들겠어? 귀천을 눈앞에 둔 수사라 한들, 죽기 직전 깨달음을 얻어 수명을 연장할 수도 있는데 말이야, 수명이 다하기 전에 미쳤다고 자신을 녹여 그런 단약을 만들겠어?”
‘용천무의 각오가 특별한 것이었구나.’
용천무가 남긴 것이 엄청난 것임을 새삼 깨달은 준혁은 불현듯 잊고 있던 물건들이 생각났다.
그가 100명의 후인을 위해 남겨놓았던 비늘과 발톱. 그리고 그것들을 체화시킴으로써 얻을 수 있다는 왕의 정수.
‘몸이 회복되는 대로 그것들도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어.’
그동안 명혼단도 전부 흡수하지 못해 미루고 있던 물건들을 시간이 나는 대로 연화시켜야겠다고 다짐을 하는 순간이었다.
찰나의 순간 떠오른 생각을 정리한 준혁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 그럼 이것은?”
“그건 이름 그대로 정신을 맑게 해주는 단약이지. 몸을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리고 손에 든 그 호리병….”
침을 꿀꺽 삼긴 여인이 말을 이었다.
“그건 소림주가 널 위해 내놓은 거야. 원영의 기운을 회복, 정화해준다는 말이 있긴 한데, 나도 겪어보진 않아서 뭐라 할 말은 없네.”
설명이 끝나자 양손에 쥐어진 자기병과 호리병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준혁이었다.
명혼단은 비록 진짜 명혼단은 아니었으나 회복과 관련된 효능은 차고 넘쳤고, 활신미주라는 술은 설명하는 그녀의 눈빛만 봐도 쉽게 얻을만한 것이 아니란 건 충분히 느껴졌으니까.
그때, 여인은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듯 손을 흔든 후, 석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한마디를 남겨두고.
-괜찮다면 한 잔만 남겨줄래?
***
조호랑이라 불리던 영수족 여인이 떠나고 나자 준혁은 자신이 누워있던 석대(石臺)를 벗어나려 움직였다.
하지만 성광지력의 범위를 벗어나려 하자,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듯 튕겨 버렸다.
“아무런 구속도 하지 않은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었나 보구나.”
현재의 몸 상태로는 아무것도 시도할 수 없었기에 결국 다시 석대 위로 돌아와 가부좌를 취했다.
그리고는 현재 몸 상태로는 효과를 명확히 추정할 수 없는 단약을 먹는 건 바른 판단이 아니라는 생각에 화목단을 꺼내 삼키며 공법을 운용했다.
“공간대에 손을 대지 않은 게 다행인 건가?”
자신이 꺼냈던 네 가지 마선 법기중 적마도를 제외한 나머지 마선 법기가 소환조차 되지 않았지만, 그걸 제외하곤 그 어떤 것도 손대지 않은 상태였다.
아마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성광지력과 관련이 있을 테지만, 지금으로서는 확인조차 불가능했다.
“아! 그렇구나.”
자신의 공간대를 조사조차 하지 않은 것에 그들의 마음 씀씀이가 큰 것인지 의문이 생기려는 찰나, 준혁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자신 역시 지구에 있을 때 연기기 수사들의 공간대를 욕심내거나 뒤져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에게 나는 연기기 수사만도 못할 수도 있겠구나. 어쩌면 금제를 가하지 않은 것도….”
‘도망칠 수 있으면 한번 해봐라.’ 하는 자신감이 묻어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정확히는 하찮게 여기는 것일 수도.
피식-
어쨌든 간에 본인에게 나쁜 상황은 아니었기에 준혁은 회복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공법 운용을 시작으로 혈단법이 화목단을 흡수하는 시점에 맞춰 원영을 감싼 무영기도 제거해 버렸다.
생각해보니 대천경 수사의 영역으로 인해 마선경의 시선과 괴조의 목소리가 차단된다는 걸 안 이상 굳이 원영의 수행을 억누를 필요가 없었던 것.
그렇게 아무런 방해 없이 온전하게 회복에만 전념하는 시간이 이어져갔다.
***
“너도 참 독하다. 한 번도 안 움직이다니.”
선계에 비승한 지도 10년.
준혁은 인질(?) 신분으로 잡힌 직후부터 몸을 회복하는데 모든 시간을 쏟아붓는 중이었다.
처음 석실에 갇힌 뒤로, 시간이 흐르자 자신을 가두던 성광지력은 사라졌고, 그 후론 아무런 방해 없이 회복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성광지력이 사라짐과 동시에 적마도를 제외한 세 법기와 연결이 완전히 끊어졌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들의 기운은 여전히 느껴졌기에 크게 걱정하질 않았다.
마치 오래전 청룡가에서 강제로 법기를 잡아두려고 하던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구속력이 절대적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기에, 아마 결계를 강제로 부수고 소환하려 한다면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만 대천경 수사인 소림주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으니, 당분간 마선들은 사용하면 안 됐고, 사용할 생각도 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오늘은 나랑 같이 가자. 소개해줄 사람이 있어.”
준혁이 몸을 온전히 회복시킨 것은 이곳에 들어온 지 정확히 3년째 되던 때였다.
그 후론 수행을 화신기까지 끌어올리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단약을 지급받으며 수행을 올리는 데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고맙긴 하지.’
어느새 조호랑을 바라보는 준혁의 눈길에 온기가 맴돌았다.
조호랑이 자신의 아비인 영수족 왕의 이름을 팔아 준혁을 구제해 주었고, 임무를 수행한 후 살아날 확률을 올리기 위해, 준혁이 화신기에 오를 때까지 모든 일을 미룰 수 있게 해준 것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준혁은 이미 어떤 식으로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다만 그녀는 점차 간섭이 심해지고 귀찮게 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마치 산들바람이 깡패가 되어 나타난 느낌을 선사했다.
“저번에 주신 단약을 체화하는데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굳이 불필요한 인연을 만들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네. 체내의 영기의 총량도 중요하지만, 깨달음을 공유하는 것도 그것만큼 중요해. 너처럼 혼자 면벽 수련만 계속하면 오히려 더뎌!”
자기 일처럼 걱정해주는 그녀 때문에 준혁은 거듭 거절하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 깨달음을 얻지 않기 위해 서거늘.’
사실 준혁은 이미 화신기에 오를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그녀가 건네준 명혼단으로 몸을 회복하고, 활신미주로 원영까지 예전 상태로 돌린 지 오래.
그 뒤로는 가지고 있던 화목단과 소림주가 지급해준 단약으로 수행을 빠르게 올렸고, 용천무가 남긴 물건들을 체화하며 시간을 보냈다.
지금이라도 화신단을 복용하면 단번에 수행을 올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건 절대 안 될 말이지.’
하지만 화신기에 오르는 순간, 임무 수행을 위해 떠나야 했고, 그 후엔 반강제로 영수들이 대륙인 대황대륙으로 끌려가야 했기에 모든 걸 미루고 있는 중이었다.
게다가 여전히 돌덩이처럼 굳어있는 종속의 문제는 단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 상태였다.
처음엔 화신단의 약력이면 그들을 회복시킬 수 있을 거라 판단했지만, 단약을 퍼부으며 몸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종속들을 회복시키기 위해선 그들 몸 안에 자리해버린 암흑기를 해결해야 했고, 그것은 아주 긴 시간이 걸리는 지난한 일임을 깨달은 후였다.
“이곳엔 삼경에 이른 수사가 총 네 명이야. 아 물론 나를 제외하고 말이지. 지금 만나러 가는 자는 그중 하나고 말이야.”
조호랑은 준혁의 마음도 모른 채, 첫나들이가 기쁜지 입을 쉬지 않았다.
“실례가 안 된다면 선배님께선 수행이 어찌 되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물어보면서 물어봐도 되냐고 묻는 건 무슨 말이야?”
“…….”
“소천경.”
본인 입으로 수행을 밝히는 게 부끄러웠는지 조호랑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그럼 영역을 자유자재로 생성하시겠군요?”
“물론이지. 왜? 겪어보고 싶어?”
“그렇습니다. 아아! 지금은 아니고 말입니다. 나중에 배움을 따로 청해도 되겠습니까?”
앞서 날아가던 조호랑이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하지! 성으로 돌아가면 알고 싶은 건 다 알려 줄게. 뭐든지 말이야.”
준혁은 자신의 거취를 결정하는 그녀의 말에 쓰게 웃음 지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싫다’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후폭풍도 두려웠지만, 그녀에게 받은 것이 많아 거절해서도 안 되는 상황까지 오고 만 것이었다.
“다 왔어. 여기.”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흑회색 대지 아래로 깊이가 보이지 않는 구덩이 앞에 도착했다.
“이곳으로 하루 정도 내려가면 만날 수 있어. 벌써 기대되지?”
조호랑의 말에 덤덤한 얼굴로 따라오던 준혁의 표정에 처음으로 감정이란 게 실렸다.
“하루를 내려간단 말입니까? 지하로?!”
“응. 왜?”
각각의 대륙이 지구보다 수십 배 크다는 건 준혁도 알고 있었다. 그런 대륙이 또 수십 개 모인 게 선계였고 말이다.
그럼에도 지하로 하루를 내려간다는 말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준혁과 조호랑은 흔히 마하(Mach)라 불리는 음속으로 이동이 가능한 정도였다.
물론 평상시에 그 정도로 움직이진 않지만, 그럼에도 지하로 하루는 쉽게 다가오지 않는 개념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깊단 아니 넓단 말인가? 허어…. 흑석대륙이 넓다고는 해도, 본토라 불리는 천운대륙에 비교한다면 외곽의 작은 땅덩어리라 했다. 거기다 이런 땅들이 뭉쳐있는 것도 아니고 흩어져있으니….’
그동안은 몸을 회복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보니,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갑자기 체감되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준혁은 뜬금없는 화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곧장 입에서 튀어나왔다.
“호랑 선배님.”
“응?”
“중천은…. 둥급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