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회복 (5)
마선경의 시선을 노출했던 영역이 제자리로 돌아오며 모든 걸 차단하자, 준혁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입을 열었다.
조금 전 비굴해 보이기까지 하던 예의 바르던 모습은 사라진 후였다.
“선배님께서 오해가 있는 듯싶습니다.”
“오해?”
“어째서 제가 마선일 거라 확신하시는 겁니까?”
준혁의 당당한 태도가 우스웠던지, 사내는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으며 썩소를 날렸다.
“저 빌어먹을 거울 눈깔이 나타났다는 게 바로 그 증거지.”
준혁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우선 정식으로 제 소개를 올리겠습니다. 저는 지구라는 하계에서 비승한 비승 수사 최준혁이라 합니다.”
“비승이라고?”
대답은 사내가 아닌 근처에 서 있던 여인에게서 터져 나왔다.
준혁은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사내를 바라보며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이곳과 정식으로 통로가 연결되어있지 않은 곳에서, 계면의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죽음을 무릅쓰고 계면을 강제로 통과했습니다.”
“흐음….”
그 순간 자신을 감싸고 있던 포근함의 기질이 바뀌며 몸을 자극하듯 들끓었다.
그것이 자신의 말에 진실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사내가 기감을 활성화한 것이란 걸 깨달은 준혁은 더욱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암흑기에 침식당해 정상이 아닌 제 상태를 보면 아실 겁니다.”
상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천운이 닿았는지, 이곳에 도착한 전 몸을 회복할 곳이 필요했고, 그러는 와중에 구로반이란 자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계속해보란 듯 사내가 침묵으로 일관하자 준혁은 맹렬하게 두뇌를 회전시키며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자는 자신이 안전하게 수련할 수 있는 장소를 구해줄 테니 댓가를 지불하라고 하더군요.”
“잠깐, 댓가?”
“그렇습니다. 만 개의 영석을 지불해야지만 안전하게 수련할 수 있는 곳을 제공한다더군요.”
“호오~ 그놈이 그렇게 간이 큰 놈이었어? 소심하던 놈이 제법이네?”
사내의 입가가 비틀리고, 여인이 탄성을 내뱉었다.
‘허락되지 않은 행위였구나!’
그 두 사람은 자신의 능력이 아닌 것에 대해 허락도 없이 댓가를 받았던 것이었다.
“계속해.”
작게 고개를 끄덕인 준혁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저에게 그 많은 영석이 있겠습니까? 하는 수 없이 그만한 가치를 가진 정보를 제공하기로 약조하였습니다.”
“오호~”
고맙게도 여인이 추임새를 넣어주었다.
“허나 영석 만여 개에 가까운 정보란 게 흔하겠습니까? 고심한 저는 그에게 태양목과 태음목이 위치한 장소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네! 정식 통로가 없는 곳이라면 아직까지 두 보물이 남아있겠어!”
노인에게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얘길 만들길 잘했다고 여기며 준혁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때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사고?”
“구로반과 함께 있던 노인이 태양목과 태음목에 대한 얘길 듣더니 번개처럼 움직여….”
잠시 후,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사내의 얼굴에 언짢음이 서렸다.
준혁의 말을 믿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다.
“그렇게 서로 상잔했다?”
“상잔이란 표현이 정확하진 않습니다. 노인의 기습으로 구로반이 상처를 입자, 저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어쩔 수 없이 그를 도와 동요문이란 자를 처리했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마지막엔 저만 살아남게 된 것입니다.”
“딱, 동요문 그자가 할만한 짓이네요. 최근에 태양목을 구하겠다고 사방으로 뛰어다니더니. 암튼 인족 너구리들은 하나같이 쯧쯧.”
여인이 준혁을 돕듯이 그의 말에 신빙성을 더해주었지만, 사내는 여전히 미심쩍은 눈빛을 지우지 않았다.
“이상하군. 네놈에겐 구로반이나 동요문이나 처음 보긴 마찬가지일 텐데, 왜 그를 도왔지?”
“그 노인이 그자를 죽이려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태양목에 대한 정보가 다른 곳에 퍼지질 원치 않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럼 당연히 다음은 저였겠지요.”
“흐음.”
준혁의 말에 반박할 만한 것이 없었는지, 사내는 인상을 찌푸리다가 화제를 돌렸다.
“그래. 그건 믿어주지.”
“감사합니다.”
말없이 준혁을 응시하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 네놈 말은 하계에서 올라왔으니 내가 마선 놈들과 사이가 나쁘다는 것도 알지 못했고, 이 모든 게 우연일 뿐이다?”
“그렇습니다. 애초에 선배님께서 저에게 마선이라 부르는 이율 모르겠습니다. 고서를 통해 접하기로, 마선이란 의지를 가진 법기로 수사와 계약을 통해 수행을 올린다 알고 있습니다. 선배님껜 제가 그리 보인단 말이십니까?”
심영근자인 준혁이 드러내지만 않는다면 마선의 계약 여부는 절대 알 수 없었다.
영수족 중 특수한 피를 타고난 몇을 제외하곤 설사 삼선에 이른 자라고 해도 불가능하단 걸 독고제를 통해 전해 들었었다.
그랬기에 준혁은 당당했다.
“저는 계약이란 게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준혁이 억울하다는 듯 행동을 취하자, 사내는 여인에게 시선을 옮겼다.
“호랑. 이자의 말이 사실인가?”
사내의 부름에 조호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영수족 여인이 코를 킁킁거리더니 재밌다는 듯 웃어 보였다.
“지금까진 진실해 보였는데, 이번엔 거짓이에요. 이놈 몸 안에서 마선기가 느껴져.”
‘마선도 아닌데 마선기를 느낀다고?!’
거짓으로 상황을 모면하려 했던 준혁은 화들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여인에게 시선이 가고 말았다.
‘이자가 최초 혈맥을 이어받은 영수족이란 말인가? 어찌 이런 우연이….’
독고제에게 듣기로 선계를 통틀어도 셋도 되지 않을 거라 장담했던 최초 혈맥의 후예.
준혁은 표정을 감추는 게 이미 늦었다는 걸 깨닫고는 능청스럽게 상황을 유도했다.
“제 안에서 마선의 기운이 느껴지신단 말입니까?”
“그래. 너무 미약해서 조금 이상하긴 한데, 분명 그것들의 냄새야.”
“그렇다는군. 더 할 말이 있나?”
사내의 눈빛에 살기가 스며듦을 느낀 준혁은 다급히 손을 저었다.
‘저자는 이곳 출신이든 아니든 마선이라면 전부 치워버릴 생각인가 보구나.’
아니면 다른 조처를 취하든지.
***
준혁이 가볍게 저은 손짓에 상황은 조금 전과 다른 의미로 심각하게 변했다.
허공에 둥실둥실 떠오른 네 개의 법기.
귀원패, 적마도, 분광소, 인지경.
그것들을 보고 사내는 지금껏 거만한 모습과 달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놀라움을 표했고, 여인은 대놓고 소릴 질렀다.
“네 명과 계약을 하다니! 말도 안 돼!!”
하지만 둘의 행동에 반해 준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 채, 여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설마 이것들이 마선이라 불리는…. 의지를 지녔다는 그들이란 말입니까?”
“장난해? 그럼 마선인지 몰랐다는 말이야 지금?”
준혁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가볍게 손을 움직여 여인에게 마선들을 날려 보낸 후,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제게 마선기가 느껴진다는 말에, 그럴 만한 물건이 있나 생각하다 혹시나 했더니, 정녕 이것들이 마선이었다니….”
준혁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했다.
“제가 하계에 있을 당시 어느 유적에서 발견한 것들입니다. 하지만 그 법기들에겐 ‘의지’라 부를 만한 그 어떠한 의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을 얻은 후에 조그마한 능력을 얻긴 했지만, 그것들이 전설처럼 고서에 적힌 마선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변명이 가소롭지도 않군.”
준혁의 호소에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서 다시 의자에 몸을 파묻고는 준혁을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의 입술은 잔인하게 비틀려 있었다.
“쓰레기 같은 기생충 놈들, 너희들은 해충일 뿐이다. 죽어라.”
사내의 입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온 순간, 손가락 끝에 붉은 점이 생성됐다.
하지만 다음 행동이 이어지기 전.
여인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잠깐만! 정말 이상한데?”
“무엇이 말이냐?”
“확인해봐요.”
마선 법기들을 한참 동안 살펴보던 여인이 조심스럽게 물건들을 날리자, 사내는 그것들은 받아들인 후 푸른빛의 구체로 감싸버렸다.
그렇게 구체안에 잠긴 마선 법기들을 음미하듯 관찰하더니,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을 살짝 벌렸다.
“허….”
“느끼셨나요?”
여인이 다급하게 묻자, 사내가 고갤 끄덕였다.
“그래. 마치 죽은 것처럼 어떤 것도 느낄 수가 없군….”
“맞아요. 계약자와 합일하지도 않고 그렇게 법기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이상하지만, 존재 자체가 없는 것처럼 봉인된 상태인 건 저도 처음이네요.”
여인의 의견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한 사내는 생각에 잠긴 듯 말없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러길 한참.
주변의 적막이 준혁의 목을 타들어 가게 할 때쯤.
생각을 정리했는지, 준혁에게 마선 법기들을 돌려주며 지금까지와는 달리 살짝 미소가 보이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의지는 느끼지 못하지만, 능력을 얻었다 했지?”
“그렇습니다.”
혹시나 나머지 마선들의 기운을 여인이 눈치챌까 봐 준혁은 무영기로 자신의 원영을 감싸버렸다.
네 개를 동시에 꺼낸 이유가 그들이 다른 것은 신경 쓰지 못하게 충격을 선사하기 위함이었으니까.
‘윽.’
그러자 원영이 바르르 떨더니 준혁에게 의지를 전달해왔다. 그것은 원영의 외침이기도 했고, 준혁 본인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더 힘을 쓰게 되면 수행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연형기 후기에 간신히 걸쳐있던 수행이 중기로, 혹은 초기까지 곤두박질칠지도 몰랐다.
그런 경우가 흔한 건 아니었지만, 그만큼이나 준혁의 상태는 최악을 걷고 있었다.
그런 준혁을 보며 가볍게 혀를 찬 사내는 허공을 잡아채듯 손을 움직였다.
우우웅-
그러자 더욱 창백해진 준혁 주위로 반투명한 막이 만들어지면서 그를 가둬버렸다.
“그 능력을 보여보게. 알지 모르지만, 자네 손에 든 붉은 장검의 이름은 적마라 하네.”
“적마라….”
준혁은 힘겹게 이름을 따라 읊조렸다.
마치 처음 듣는 이름을 소중히 기억하겠다는 듯이.
“만약 적마의 능력을 사용해 그 안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대가 이곳에 머무는 걸 허락해주지. 더해 분쟁을 일으켰던 일은 없던 것으로 해주고, 위태로워 보이는 그대를 도와주겠네.”
자신을 둘러싼 막이 시험의 일종이란 얘기에 준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적마도를 발동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했다.
‘정신을 잃겠지.’
자신이 기절한다 해도 무영기가 풀릴 리는 없었지만, 정신을 놓은 자신에게 상대방이 어떤 짓을 할지,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될지는 쉽게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아마 유쾌한 일들이 생기진 않다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달리 방도가 없던 준혁은 결국 상대의 의도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저자를 믿을 순 없지만, 적마의 힘을 필요로 한다는 건 분명하니 그걸 믿자.’
적마도의 도움을 받으려면 최소한 자신이 살아있어야 했으니, 최악의 경우가 금제를 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만약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건 준혁이 반길 만한 일이었다.
천혈을 받아들인 후론 어떤 금제도 자신을 구속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어정쩡한 구속이나 실험 같은 것이 걱정될 뿐이었다.
“그 말 믿겠습니다.”
사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준혁은 적마도를 발동했고.
쿵-
반투명한 벽을 통과하자마자 혼절해 바닥에 쓰러졌다.
그 모습에 사내가 흐릿하게 변해 준혁 앞에 나타나더니 그의 입속으로 단약 하나를 집어넣었다.
“상태가 나쁘다고 하더니.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호랑, 이자를 치료해. 여기 마선들은 전부 감옥에 처넣어 버리고.”
결과나 과정이 어쨌든 결국 준혁은 깊은 잠에 빠져든 채 서서히 치유되기 시작했다.
그것도 자신에게 호감을 가진 여인의 간호를 받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