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회복 (4)
구로반의 원영까지 봉인한 준혁은 일을 마친 순간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분광소를 식검과 분리하고 나자 그나마 숨이 쉬어지는 느낌이었다.
“오늘 내 한계를 명확히 알게 되었구나.”
수도자는 몸을 직접적으로 사용한다 할 수 없었기에, 강체술로 극의를 본 자가 아니라면 자신의 한계를 경험할 일이 별로 없었다.
영기 고갈이 올 수는 있지만, 그건 영단이나 비술로 일부분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준혁은 의미 있는 경험을 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역시 나를 외곽에 배치한 이유가 이거였다니.’
공간대에서 화목단을 꺼내 입 안에 털어 넣은 그는 구로반이 남긴 말들을 되새겼다.
예상을 벗어나지 못한, 강도로 돌변한 두 사람의 행태에 씁쓸함을 느낀 준혁은 앞으로의 사태를 짚어보았다.
‘만약 분쟁 금지 때문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둘만 방문한 것이라면 충분히 회복한 후 떠나면 그만이다.’
반대로 만에 하나라도 누군가에게 언질을 줬다면, 두 사람의 방문은 앞으로 닥칠 고난의 시작을 알리는 것과 마찬가지.
“흐음. 그래, 우선은 최소한의 회복이 먼저다.”
수도자들에게 며칠 혹 몇 달은 범인들에게 하루 이틀과 다름없으니, 만일 후자인 상황이라 해도 당장 위급할 일은 없을 터였다.
그렇지 않아도 최악이던 몸으로 두 명의 고위 수사를 상대한 여파가 밀려들고 있었으니, 우선은 급한 불부터 끄는 것이 맞았다.
“끄응, 우선 시체부터 치워야겠군.”
평소였다면 입김만 불어도 해결할 문제였지만, 한 톨의 영기도 아까운 상황이었기에 준혁은 천천히 수결을 맺어 간신히 두 개의 불덩이를 만들어냈다.
그리고는 불덩이를 날려 보냈다.
화르륵-
***
두 시체를 완전연소시키자 눈에 보이지 않던 공간대로 의심되는 물건과 법기류가 드러났다.
준혁은 추후 확인해 볼 생각으로 물건들을 전부 공간대에 집어넣은 후, 결계를 전부 원상 복귀시켰다.
그리고는 공동 중앙으로 이동해 좌정하며 공법을 운용했다.
‘우선 화목단으로 바닥난 체력을 회복시키는 게 우선이다. 몸 상태를 원래대로 돌리는 건 그 후에….’
하지만 이번에도 준혁은 회복을 시작하지 못한 채 방해를 받아야 했다.
-짹. 나와. 주인이. 부른다.
갑작스레 청각이 아닌 뇌리로 직접 전해오는 말에 화들짝 놀라 눈을 치켜뜨고 주위를 살폈다.
그러자 결계로 감쌌음에도 불구하고 공동 한쪽 공간이 갈라지며 몸통에 비해 유난히 긴 꼬리 깃털을 달고 있는 참새 한 마리가 나타났다.
참새는 준혁을 향해 조막만 한 입을 뻐끔거리며 다시 한번 소리를 전달했다.
-짹. 주인이. 부른다. 어서.
‘전부 본 건가?’
생각지도 못한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 것 같아 준혁은 바짝 타들어 가는 입술을 축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를 부르신단 말입니까? 누가?”
-짹. 주인이. 부른다.
주인이 누군지는 모르나, 부리는 영수가 결계를 마음대로 오가는 걸 보면, 조금 전 방문했던 두 사람보다는 수행이 높은 이가 틀림없는 상황.
준혁은 조심스럽게 적마도를 꺼내 들었다.
‘도망칠 수 있을까….’
몸 상태를 생각하면 화신기 이상의 수사에게서 도망치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참새를 따라 ‘주인’이라 불리는 자를 만나러 가는 것도 좋은 판단은 아니었다.
자신이 이곳에 자리 잡은 게 동네방네 소문이 난 것도 아니었으니, 두 명의 수사를 죽인 직후 자신을 불렀다는 건, 결코 좋은 의도가 아닌 게 분명했으니까.
-짹. 따라와.
그때 참새가 작은 날개를 움직이더니 허공을 파고들 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는 따라오라는 듯, 거처 밖에서부터 참새의 기운이 결계를 뚫고 신호를 주었다.
참새가 사라진 직후, 잠시 고민에 빠졌던 준혁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화목단 한 병을 또 꺼내 전부 복용했다.
풋-
단약을 삼키고는 어이없이 웃음 짓는 준혁.
‘나에게 선택권이 없구나.’
고민해 본 결과, ‘주인’이라는 자는커녕, 밖에서 짤막한 날개를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참새를 상대로도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땐 몰랐으나, 거처 밖에서 영기파동을 퍼트리자, 참새 역시 화신기 수행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짹. 주인. 간다.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다는 듯, 따라올 수 있을법한 속도로 천천히 날아가는 참새를 살피며 준혁은 또 한 번 혀를 찼다.
자세히 살펴보니 풍기는 기운이 동요문이라는 노인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화신기에 오를 정도면 지능이 낮을 리가 없을 텐데….’
참새가 몇 가지 단어만으로 대답하는 것에 의문을 느낀 준혁은 그것에 대한 궁금증을 삼키며,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도망 수단을 전부 떠올렸다.
하지만 이내 그러한 생각들을 날려버렸다.
‘도망’이라는 선택지는 현재 몸 상태에선 어떤 방법을 써도 죽음이라는 결과를 벗어날 순 없었다.
차라리 살기 위해 머리를 바짝 숙이는 게 그나마 생존 확률이 더 높을 가능성이 컸다.
‘선계에 오르자마자 고난의 연속이구나.’
사신의 기운에 천혈도 얻었겠다, 화신단까지 있으니 전망이 밝다 여겼던 게 사실이었다.
비승하고 나면 빠르게 수행을 올린 후, 여서령을 찾고, 지구로의 안전한 통로까지 만들 계획이 마치 이뤄진 일인 것처럼 당연시했다.
항상 조심히 행동했었고, 선계에 오른다고 그런 마음가짐이 달라질 리 없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예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준혁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안일했다.’
수도계에서 죽음은 교통사고처럼 내가 조심한다고 일어나지 않는 일이 아님을.
안전을 추구한다고 해서 안전해지는 것이 아닌, 오직 수행을 올려 강자로 우뚝 서야지만 본인의 의지로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음을.
지구에서 최강자로 오래 머물다 보니 타성에 젖어버렸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날아가자, 낮은 구릉들을 지나 거대한 흑색 거성(巨城)을 볼 수 있었다.
흑색 거성은 주위에 널브러져 있는 암석들을 이용해 지은 것처럼, 흑색과 회색이 적절하게 섞여 있었는데, 음침하고 암울한 기운이 멀리까지 퍼지는 듯했다.
“저곳입니까?”
준혁의 물음에 참새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짹. 주인. 산다.
그때, 멀리 보이는 흑색 거성에서 누군가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와 준혁 앞을 가로막았다.
앞을 막고선 자는 옅은 노랑머리를 허리까지 기른 여인이었는데, 풍만한 가슴을 얇은 호피 천으로 가리고 있어 아찔한 느낌을 주었다.
피부가 검게 그을린 게 활동적이고 활발하다는 인상을 풍겼다.
참새는 그녀의 출현을 예견했다는 듯, 그녀가 나타난 순간, 공간을 가르듯 사라져버렸다.
참새가 사라지자, 여인은 준혁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하더니 혀로 입술을 훑었다.
마치 먹이를 눈앞에 둔 암사자처럼.
“난 대범한 남자가 좋더라.”
“......”
그녀의 장난스러운 행동에 준혁은 손끝이 덜덜 떨려옴을 느꼈다.
마치 무저갱을 마주한 것 같았다.
‘이자…. 끝이 보이지 않는다….’
화신기였던 동요문과 참새의 수행은 단번에 파악할 순 없었지만, 멀리 있는 것이 지금은 보이지 않는 정도의 차이로 느껴졌을 뿐이었다.
묵직함과 아득함이 적당히 섞인, 닿지는 않지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하지만 눈앞에 여인은 아니었다.
그녀의 눈이 자신의 몸을 훑은 순간, 이미 죽음이 목전에 당도한 듯, 어항 속에 갇힌 물고기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떻게든 도망가야 했었나?’
지금이라도 도망친다면 살아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순식간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따라와. 그에게 안내해줄 테니까.”
여인은 뻣뻣하게 굳은 준혁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소리 내 웃더니 몸을 돌려 흑색 거성으로 날아갔다.
그 순간, 그녀에게서 은연중에 흐르던 기운에 식검이 꿈틀 움직였고, 천혈마저 반응을 보였다.
그것이 무엇인지 독고제에게 들어 알고 있던 준혁은 빠르게 자신의 기운을 내리누르며 여인의 뒤를 쫓았다.
‘영수족이구나! 혈맥의 힘을 지닌!’
***
여인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어딘가 익숙함이 느껴지는 거대한 대전이었다.
‘아! 황금궁전의 대전과 비슷한 구조구나.’
오래전 목족의 대지를 방문했을 때를 떠올린 준혁은, 대전 끝에 거만한 자세로 앉아있는 사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저벅저벅-
여인과 함께 천천히 그에게 다가갈수록, 알 수 없는 포근함이 자신을 감싸는 게 느껴졌다.
동시에 끈적거리는 중압감이 몸을 내리눌렀다.
한참을 걸어 사내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준혁은 자신을 감싼 포근함이 상대방이 퍼트린 기감의 일종인 것을 알아차렸다.
짙은 흰 눈썹에 거만한 눈빛,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잔인한 심성을 보여주는 듯한 사내가 준혁을 가만히 응시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가 보내서 왔더냐.”
준혁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를 표하며 허리를 숙였다.
본 적도 누가 알려준 적도 없지만, 눈앞의 거만한 자는 분명 대천경 수사가 분명했으니까.
“후배가 부족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준혁의 태도에 거만한 사내가 피식 웃더니 손을 저었다.
툭-
그러자 준혁의 발치로 둥그스름한 나무패 하나가 떨어졌다.
그 패를 본 순간 준혁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명원패! 둘 중 하나의 명원패를 지니고 있었구나. 이걸 생각하지 못하다니.’
명원패란 산들바람을 구할 때 한 번 본 적이 있던 물건으로, 수사의 티끌 같은 혼을 담아 생사를 확인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구로반 그 아이는 왜 죽인 거지?”
‘그였구나.’
준혁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가 저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영역 안으로 들어선 순간부터 지금까지 모든 걸 엿보고 있었을지, 아니면 자신의 방문과 구로반의 죽음이 연달아 일어났기에 의심하는 건지는 몰랐지만, 준혁은 어쩌면 살아날 방도가 있다 여겨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죽이고자 했으면 질문이 아닌, 정신을 통제하려 했을 테니까.
“죽이고자 했다라…. 그대가 마선임을 알아차리고 그리 행동한 것은 아니고?”
최대한 사실을 바탕으로 변명거리를 생각하고 있던 준혁은 뜬금없는 마선이란 단어에 ‘어?’하는 표정으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사내가 회심의 미소를 짓더니 손끝으로 대전의 천장을 가리켰다.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네놈이 기생충 같은 마선인 것을? 지금도 저놈이 이 안을 확인하려 저리 애쓰고 있는데?”
그 순간, 영역으로 보호되고 있던 공간 너머 거대한 붉은 눈동자의 시선이 여실히 느껴지기 시작했다.
***
‘설마 영역 때문에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었나?’
두 수사를 상대하기 위해 수행을 온전하게 드러낸 후에도 마선경의 시선과 괴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깊게 고민하지 않았었다.
우선은 상대방을 제압하고 살아남는 게 먼저였으니, 하지 못하였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지금에 이르러서야, 마선경의 시선과 괴조의 목소리는 자신에게 닿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의 권능으로 연결 자체는 유지되나, 영역을 뚫고 의지를 표출하지는 못하는 게 틀림없구나.’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영역이란 것은 공간을 의지로 조종하는 것.
그 말인즉 마선경의 시선이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닿기 위해선 영역을 만든 수사의 의지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아슬아슬한 상황임에도 준혁은 마선경의 시선과 괴조의 시선을 막을 방법을 어렴풋이 깨닫고는 속으로 웃음 지었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냐? 이곳에 몰래 들어왔다면 내가 얼마나 네놈들을 혐오하는지도 알고 있을 텐데. 죽는 게 두렵지도 않은가 보구나? 아! 그렇지!”
사내는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허리를 바짝 세우더니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네놈들은 불멸이라 이건가? 죽어봐야 계약자가 죽는 것뿐이니까?”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사내의 반응에 준혁 역시 덩달아 한쪽 입꼬리를 미세하게 움직였다.
조금 전까진 ‘어쩌면 살아날 수 있겠다’라는 가능성이었지만, 사내의 반응을 보니 그 가능성은 확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