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비승
“시작한다!”
백호 혈맥의 힘이 담긴 사자후가 산 전체를 뒤흔들자, 수행이 낮은 자들은 피를 토하거나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잠시 후, 비승을 가까이에서 구경한다는 건 그만큼의 각오가 필요하단 걸 깨달은 수많은 이들이 서둘러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면이 연결되며 선계의 통로가 생겨나는 순간, 그곳의 기운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수행증진에 크나큰 도움이 되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다간 비승식에 휘말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나갈 수도 있단 걸 새삼 깨닫게 된 것이었다.
“어리석은 자들.”
수사들이 허둥지둥 자리를 뜨고, 누군가 그들의 행태를 비웃는 사이.
준혁은 수결을 맺어 전신의 영력을 개방했다.
그리고 수결이 진행됨에 따라,
착착착-
그의 등 뒤로 검은 마기를 흘리는 보랏빛 피부를 가진 마족 전영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것을 시작으로 좌우 앞뒤로 백호, 청룡, 주작, 현무의 전영이 각각 나타나 위용을 드러냈다.
전영들은 준혁의 의지대로 그의 몸에서 떨어져 스스로 움직이더니, 천제단의 사방을 보호하듯 둘러쌌다.
그리고 그들이 전방위를 지키며 기운을 동조시킨 순간.
화아악-
천제단에서 기원을 짐작하기 힘든 기운이 네 전영에게 흘러 들어갔고, 기운이 주입되자 네 전영이 폭발하듯 각자 가지고 있던 속성을 증폭시켰다.
잠시 후.
‘지금!’
네 전영의 기운이 더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증폭됐다고 여긴 순간, 준혁은 손가락을 번개처럼 움직여 복잡한 수결을 맺었다.
그러자 준혁을 중심으로 붉은 진법이 나타나 그의 기운을 증폭시키기 시작했다.
우우웅-
“가라!”
그리고는 증폭되던 기운이 극에 달한 순간, 모든 영력을 체외로 배출하며 사신의 전영을 자극했고,
그 자극에 반응해 네 사신의 전영이 폭발하더니, 사신의 환영이 나타나 하늘을 가르며 사방으로 흩어져 사라져버렸다.
‘이것으로 구지대륙의 봉인은 잠시나마 열렸다. 그다음은!’
순간, 거대한 영기 파동이 준혁을 중심으로 고요한 호수에 돌멩이가 떨어지듯 파문을 일으키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동시에 사방에서 영기구름이 몰려오더니 하늘에 모이기 시작했고, 준혁의 발끝에서 금빛 실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가 천제단을 발동시켰다.
쿠앙-
잠시 후, 하늘에 모이기 시작한 영기구름과 천제단이 서로 감응하듯 울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곳으로 영기가 응축되는가 싶더니.
“열려라!”
준혁이 수결을 마치며 손끝으로 하늘을 가리키자, 천제단에서 금빛 기둥이 상공으로 치솟아 올라갔다.
우우웅-
***
준혁이 천제단을 발동시킨 그 시각.
지리산 천왕봉에 새겨진 진법이 천제단으로 몰려드는 영기에 반응하더니 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진동도 잠시, 진법 위로 기이한 문자가 새겨진 금빛 진이 솟아올라 허공에서 춤을 추듯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는 태백산 어딘가에서 울려 퍼진 신호에 반응해 거대한 금빛 기둥으로 변하더니 하늘로 솟아올라 멀리서도 확연하게 눈에 띄는 그림을 그려냈다.
그런 현상은 지리산뿐만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거대한 산맥의 끝자락인 지리산의 천왕봉을 시작으로 덕유산의 향적봉, 속리산의 천왕봉을 타고 아래서부터 금빛 기둥이 솟아올라 갔고,
위로는 백두산의 천지를 출발점으로 금강산의 비로봉, 설악산의 대청봉을 거쳐, 오대산의 비로봉까지 금빛 기둥들이 차례대로 솟아오르며 장관을 연출했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남단과 북단에서 시작된 일곱 개의 금빛 기둥이 천공을 뚫을 듯 솟아올라 일곱 개의 빛나는 별을 자극하자,
그 중심에 있는 태백산의 천제단이 폭발할 것 같은 기운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쿠아아앙-
그리고 하늘의 일곱 금빛이 천제단에서 쏘아 올린 금빛 기둥에 반응해 하나로 이어지자, 천제단 위로 모여들던 영기가 격렬하게 회전하며 별자리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드디어.”
수결을 끝마친 자세 그대로 영력을 발출하며 정신을 집중하던 준혁이 고개를 들며 입을 열자, 그 순간에 맞춰 별자리로 흡수되던 기운들이 한곳으로 응축했다.
그리고 격렬했던 기운이 잠잠해지자, 일렁이는 거대한 원형 그림자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저것이 선계로 통하는 문!”
“오오! 이 기운! 이 청량함!”
선계의 영향인지 주변의 영기밀도가 엄청나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환희에 찬 수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수하들의 선망이 담긴 시선도 느껴졌다.
하지만 준혁은 섣부르게 움직이지 않고, 기감으로 계면 간에 생긴 통로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영력을 개방했음에도 생겨나지 않던 계면의 압박이 이제야 제 역할을 하겠다는 듯 반응을 보였다.
곳곳에서 영기구름이 뭉쳤고, 이내 거대한 뇌전으로 변해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번쩍- 콰과쾅!
준혁은 혹시나 계면의 압박을 제외한 또 다른 변수가 있나 확인 작업을 하다가, 드디어 때가 왔음을 느끼고는 하늘로 치솟았다.
슈악-
그리고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계면의 압박이 더욱 거세지더니, 준혁의 비행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
천제단에서 멀리 떨어진 봉우리,
사쿠라, 천이화와 함께 비승식을 지켜보고 있던 최나연은 준혁이 하늘로 솟구치기 시작하자,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제 진짜….”
악다문 입술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온 그녀의 목소리엔 가족과 헤어지는 슬픔이 가득 베여있었다.
그 모습에 사쿠라가 조용히 다가오더니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지금만 헤어지는 것뿐이야. 최 수사가 길을 터주면 우리는 그보다 쉽게 선계에 닿을 수가 있어.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마.”
“네. 언니.”
사쿠라의 위로가 큰 힘이 되었는지, 최나연은 마음을 다잡은 듯 두 눈에 힘을 주며 오라비가 떠나는 모습을 눈에 새겼다.
그때, 쏟아지던 뇌전들을 가볍게 해소하며 하늘로 솟구치던 준혁이 무언가에 부딪친 듯 아래로 주르륵 밀려나는 게 보였다.
“엇!”
천이화의 놀란 목소리에 사쿠라가 원인을 알겠다는 듯 심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쉽지 않은가 보구나.”
“그게 무슨 뜻이에요? 선계의 문만 열면 되는 것 아니었나요?”
사쿠라는 상공에서 떠올랐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준혁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선계와 지구가 서로 다른 계면으로 분리되어있단 건 알고 있지?”
“그럼요.”
“그 사이엔 생명체가 감당하기 힘든 암흑기(暗黑氣)가 자리하고 있고, 그것은 끔찍한 공간압력을 만들어낸다고 해.”
천이화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최나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마 계면에 틈이 생기며 그 암흑기가 흘러나와 최 수사를 밀어내고 있는 게 틀림없어.”
여전히 두 눈을 끔뻑거리는 최나연과 달리 암흑기에 대해 알고 있던 천이화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고서에서 본 적이 있어요. 수도자가 계면 간 이동을 하기 위해선 맨몸으로 암흑기를 견뎌야 하기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그래도 전 스승님께서 문을 통과하실 거라…. 성공하실 거라 믿어요!”
천이화의 응원에 사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래, 성공하겠지. 다만 벌써 너무 힘을 소모하면…. 계면의 틈에 들어간 후 견딜 수 있을지. 그것이 걱정이야.”
선계로 열린 통로에 들어서는 건 말 그대로 시작일 뿐, 진짜 고난은 문을 지난 후였다.
고서에 적힌 내용으로 보자면, 화신기 이하 수사들은 공간의 틈 안에서 견디는 것 자체만으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
과연 최 수사가 무사히 비승에 성공할지 걱정이 가시질 않았다.
‘최 수사…. 부디 성공해야 해요. 저도 곧 당신을 따라갈 테니. 그땐….’
한편, 통로에서 흘러나오는 압력에 연신 뒤로 물러나던 준혁은 사쿠라의 걱정과 달리 여유로운 상태였다.
전력을 다한다면, 자신의 비행을 방해하는 기운을 단번에 무시하고 통로에 진입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 안의 압력이 어느 정도인지 예측할 수가 없었기에, 계면의 문을 통해 흘러나오는 암흑기를 받아들이며 그 힘에 적응하는 중이었다.
***
-수사, 제가 돕는다면 큰 무리 없이 압력에 버틸 수 있을 것입니다.
준혁이 연신 압력에 밀려나자, 그의 몸 안에 숨어있던 아마르곤이 자신의 의지를 전달했다.
하지만 준혁은 단호히 그의 도움을 거부했다.
“안 될 말입니다. 수사께서 도와준다면 압력에 버티는 게 어렵지 않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수행이 낮은 시절, 아마르곤과 함께 봉인을 강제로 뚫고 지나간 경험이 있기에 준혁도 잘 알고 있는 사실.
“허나, 이익보단 실이 큽니다. 만에 하나라도 수사가 계면에 튕겨 나간다면…. 그러니 선계에 닿을 때까지 저 혼자 해보겠습니다.”
비승할 시, 종속을 맺은 영수를 데려갈 수 있다는 지식을 입수하긴 했지만, 지구의 상황이 특수했기에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대비를 하고 있는 상태.
평범한 계면 간의 이동이 아닌, 사신들의 봉인결계가 대륙 전체를 보호하고 있었고, 천제단이 제 기능을 잃은 지 오래돼 통로가 불안정할 가능성도 컸다.
그랬기에 준혁은 아마르곤 이하 영수들을 특수한 비술로 보호한 후 몸속에 저장한 상태였다.
-알겠습니다. 부디…. 조심하시길.
사무적인 어조가 아닌 걱정 가득한 친우의 목소리처럼 아마르곤은 진심으로 준혁을 걱정하고 있었다.
퉁-
또 한 번 압력에 밀려나던 준혁은 더는 종속들을 걱정시켜선 안 되겠다는 판단에 양손으로 원을 그리다 합장을 하며 허공을 박찼다.
‘하긴 아마르곤이 나설 정도면, 산들은 애가 타고 있겠지.’
처음부터 돕겠다고 발을 동동 구르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자 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 순간, 준혁의 손끝에서 금빛 실에 실타래처럼 풀리며 연꽃 모양으로 변하더니 피부 위로 스며들었고, 그 뒤를 이어 육각 타일이 나타나 또 한 번 준혁을 보호했다.
마지막으로 준혁의 등 뒤에 머무르고 있던 마족 전영이 안개처럼 흩어지며 준혁의 몸 위로 포개졌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이뤄진 일련의 준비가 끝난 순간.
슈앙-
준혁의 몸이 금빛 빛살로 변하며 하늘로 치솟아 계면의 통로로 들어가 버렸다.
준혁이 하겠다고 마음먹자, 계면의 압박도, 공간압력을 만들어내던 암흑기도, 그를 막아서진 못했다.
그리고 준혁이 문을 통과해 사라진 순간.
스르륵-
계면의 문이 크게 일렁이더니 점차 희미해져 사라졌고, 천제단 위 하늘을 가득 채우던 영기도 원래 자리를 찾아 떠난 듯 흔적도 없이 흩어져 버렸다.
***
“정말 가버렸어….”
준혁이 사라지고 난 뒤, 허망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최나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평생 자신을 위해 희생했던 오라비였단 걸 알기에 그녀는 조금도 갚지 못한 사랑에 미안함까지 가지고 있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걱정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까 봐 장난스러운 태도를 보이기도 했지만, 막상 빈자리가 되어버리니 참을 수 없는 허전함이 느껴졌다.
“오빠…. 기다려. 나도 곧 갈게.”
준혁을 따르던 수많은 수하들이 각자 저마다 도움이 되는 도움과 단약을 마지막 선물처럼 받았다는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받은 건 남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것들.
스승이자 언니처럼 지내던 사쿠라와 준혁의 하나뿐인 제자인 천이화, 거기다 무위각주 도천과 청명까지.
자신이 받은 건 그들이 받은 걸 전부 합친 것보다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오빠, 꼭 다시 만나자.”
-<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 1부> 완-
***
안녕하세요. 미속입니다.
이번 화를 끝으로 1부 인계편을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2부는 1부만큼 긴 호흡을 가지진 않을 것 같지만, 뿌려놓은 떡밥, 그리고 준혁과 식검의 성장 등 남은 이야기가 많아 조금 더 타이트하게 압축해서 빠른 전개를 이어갈 생각입니다.
다만 이렇게 공지글로 인사를 올리게 된 이유는 2부를 준비하기에 앞서 1주일가량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며 그동안 미뤄두었던 건강검진도 받고, 2부의 발판이 될 선계의 모습도 그려볼 생각입니다.
연재 재개일은 8월 15일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더 좋은 모습으로 찾아뵙겠습니다.
항상 응원해주시고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