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비승 준비 (1)
“물론 그대에게 희생을 강요하거나 사명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네.”
준혁이 별 감흥도 없이 빤히 바라보자 독고제가 사탕으로 유혹하는 나쁜 아저씨같이 혹할 제안을 꺼내 들었다.
“그저 마선기를 회수하고 천혈을 성장시켜 다음 대에 넘겨주면 되는 것이네. 어떤가? 그렇게만 해준다면 그대에게 왕의 권좌를 넘겨주겠네.”
‘권좌? 마치 실재하는 자리처럼 말하는군.’
독고제가 구지대륙의 왕좌에 앉아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왕의 자리란 통치자를 칭하는 수식어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준혁.
그런 생각을 정정해주겠다는 듯 독고제의 말이 이어졌다.
“혹, 권좌가 뜻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가?”
“그렇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격이라 생각하면 되네.”
‘자격?’
“그대에겐 먼 미래일지 아니면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미래일지는 모르나, 알고 있어 나쁠 건 없겠지.”
이어지는 독고제의 말은 수행과 깊은 관련이 있는 ‘자격’이라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 준혁에겐 까마득한 이야기였지만, 수도자는 삼선경에 이르게 되면 삼청(三淸)이라는 자리에 앉을 수 있다고 했다.
삼청은 특별한 의식을 치른 후 얻을 수 있는 자리로, 하나의 특권이자 관문과 같은 것이었다.
삼청 중 한 자리에 올라야만 하늘의 허락을 받아 ‘천기’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고, 만약 삼청의 세 자리를 전부 얻는다면 수행의 끝이라는 대라경(大羅境)에 이르러 대라신선(大羅神仙)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삼청에 이르는 최소한의 자격. 그것이 바로 왕의 권좌이지.”
독고제의 설명이 끝나자, 준혁은 구지대륙이 침공받은 이유가 마지막으로 남은 천혈족이란 것 때문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왕의 권좌라는 것. 그것을 얻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자격을 가진 자를 죽이면 되네.”
‘아…. 역시 그래서였구나.’
“물론 새롭게 자격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그 누구도 그 험난한 길을 걷진 않겠지.”
그때 여유롭게 설명을 이어가던 독고제의 표정이 살짝 깨지기 시작했다.
쿠르릉-
동시에 의식 공간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불길한 기운을 흘려댔다.
사신들을 상대할 때, 공간이 무너지기 직전 나타났던 현상과 비슷했다.
“이런, 생각보다 빨리 진행되는군.”
“이곳이 무너지는 것입니까?”
“그렇네.”
의식 공간이 무너진다는 것은 독고제의 의식이 끝을 다했다는 뜻과 같았다.
하지만 독고제의 표정은 딱히 두렵거나 걱정을 가진 자의 것이 아니었다.
마치 해야 할 일을 전부 마쳤다는 듯,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에 대한 미련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에서 준혁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미 저에게 왕의 권좌를 넘기셨군요.”
처음으로 독고제의 눈이 크게 뜨였다
“허어. 설마? 그것을 느낀 것은 아닐 테고.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독고제님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혹 조금 전 천혈을 인도하시겠다고 할 때 저에게 권좌를 넘기신 게 아닙니까?”
어느새 독고제의 입술이 양옆으로 쭉 벌어져 싱긋 웃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흡족해하는 모습이었다.
“정말 마음에 드는구나. 실로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겠어.”
“...”
“그대가 알아차린 것 같으니, 전부 말해주겠네. 그대가 느낀 것처럼 권좌는 이미 그대에게 넘겼네. 그럼에도 내가 그대를 설득하려고 했던 것은 스스로 원하지 않으면 발현되지 않기 때문일세.”
“마선기를 회수하라며 보상처럼 말씀하시더니, 역시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군요.”
처음 왕의 권좌에 대한 얘길 꺼낼 땐, 자신이 원하는 바를 행하면 선물을 주겠다는 듯 말을 꺼내더니, 역시 그 안엔 또 다른 숨은 의도가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준혁이 쓰게 웃음 짓자, 독고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왕의 권좌는 권리이자 의무. 그대가 그 자리를 받아들이면 그에 걸맞은 자격을 갖추어야만 하지.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마선기를 모아야 할 테고 말입니까?”
“아니네. 다만 그러는 것이 가장 쉬운 길이니 그렇게 행동했을 테지만 말일세. 그러니 그런 표정 하지 말게.”
쿠르릉-
독고제의 설명이 이어지는 도중 의식 공간이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준혁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설명을 이어가던 독고제의 이마에서 하얀 구슬이 튀어나와 준혁에게 천천히 흐르듯 이동했다.
“자세한 건 그 안에 담겨 있으니, 원할 때 확인해보시게나.”
하얀 구슬이 옥간처럼 기억을 기록한 물건임을 파악한 준혁은 금빛 실로 봉인한 후 조심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만족해하는 독고제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무언가?”
“제가 권좌를 받아들이지도, 마선들을 회수할 생각도 없다면 어찌 되는 것입니까?”
독고제가 준비해둔 미끼가 무엇인지 준혁은 확실히 알았다.
그리고 그 길은 준혁의 수행을 올리는 데 가장 빠른 길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천혈족의 부흥을 이루는 길이기도 했다.
다만 준혁은 누군가의 의도로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별것 없을 것이네. 언젠가 그대의 수행이 멈추고 죽음을 맞이했다는 가정하에 말하자면…. 그대의 후손 중 심영근자가 태어나면 천혈은 그자에게서 발현될 것이고, 왕의 권좌라는 건 누군가 자격을 새로 얻을 수도, 아니면 그대로 사라져 버리기도 하는 것이니까.”
“흐음….”
“고민할 필요 없네. 언제나 수도자는 한 가지만 결정하면 되는 것이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더 높은 곳으로 향할 것인가. 모든 걸 내려놓고 안식을 맞이할 것인가.”
독고제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모든 걸 내려놓고 안식을 맞이한다는 것처럼.
그리고 그의 미소가 끝나간다고 느껴지는 순간.
화악-
의식 공간이 무너졌다.
***
-제가 후손을 남기지 않는다면 어찌 되는 겁니까?
-별걱정을 다하는군. 지금처럼 되겠지. 천혈은 남겨질 것이고, 누군가 그 힘을 취하겠지. 다만 자격을 갖춘 자만이.
의식 공간에 들어가기 전 거인들의 환영 공격을 받았던 곳으로 돌아온 준혁은 독고제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쓰게 웃음 짓고 있었다.
천혈이라는 권능에 가까운 힘, 그리고 삼경, 삼선을 넘어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을 얻었지만, 그 모든 게 기껍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식검을 만나 천혈족의 번영을 가져와야 했다던 독고제의 빗나간 운명이 마치 자신에게 다가와 있는 것 같아 찝찝함을 벗어던질 수가 없었다.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고,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던 자신의 행보가 그깟 운명이란 단어 하나에 얽매인다는 건 참을 수가 없었던 것.
정확히는 누군가 짜놓은 판에 자신이 장기 말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수행을 포기하고 생을 마감할 수도 없지 않은가.”
상념에 잠긴 준혁은 독고천이라는 존재와 독고제를 떠올리고는 손안에 식검을 불러와 꽈악 움켜쥐었다.
“독고천이 움직인 천기는 독고제를 향해 있는 것인가…. 처음부터 나를 향해 있던 것인가.”
운명이라는 틀에 끼워 맞춘다면, 독고제가 구지대륙의 권좌를 얻어내고 사신 혈맥을 키우는 등, 준혁의 행보에 도움이 될 것들을 미리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던 것이 되어버렸다.
이 모든 것이 독고천이 그려놓은 그림인지, 아니면 우연과 우연이 만나 여기까지 온 것인지 준혁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운명이란 무엇인가….”
“정해진 길을 가는 것인가…. 가는 길을 정하는 것인가….”
그렇게 손에 쥔 식검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생각에 빠져있던 준혁은 땅이 꺼질 것 같은 깊은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어 넓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얀 구름이 드문드문 섞인 푸른 하늘이 오늘따라 유난히 시리도록 푸르렀다.
“행하는 것을 운명이라 말한다면, 행하지 않는 것도 운명. 결국 내 선택이 나를 만드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어느새 눈빛이 맑게 돌아와 있었다.
“결과론에 끼워 맞춘다면 무엇이 운명이라 불리지 않겠는가. 나는 내 길을 가면 그뿐이다.”
마음의 혼란은 다잡은 준혁은 금빛 실로 묶어둔 독고제의 기억을 내면 깊은 곳으로 가라앉혀 버렸다.
언젠가 필요하다면 꺼내 확인할 수는 있겠지만, 지금은 마음의 혼란만을 유도할 뿐 필요하다 여기지 않았다.
더불어 자신이 원해야지만 발현된다는 왕의 권좌도 의식의 수면 아래 잠재워버렸다.
권좌를 발현시킴으로써 혜택을 얻을 수도 있었지만, 권좌의 가장 주요한 기능은 삼청을 얻을 때 필요한 최소한의 자격.
그전까진 없어도 딱히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으니, 애초에 없던 것으로 치고 마음에서 지워버릴 작정이었다.
그리고 그런 결정을 내리고 행한 순간.
준혁은 기이한 고양감을 느꼈다.
그것은 수행이 오를 때나 얼마 전 깨달음을 얻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는데, 마치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아!!”
그리고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기감이 사방을 퍼져나가 모든 사물과 영기를 한눈에 담았고, 그것은 마치 하늘 높은 곳에 떠올라 세상 만물을 내려다보는 기분이 들게 했다.
준혁은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로 표현할 순 없었지만, 확실히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할 수 있다.’
무엇이든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고양감에 손을 들어 거미줄처럼 퍼진 기감 안에 놓여있던 바위를 손으로 가리켰다.
‘지워져라.’
마음속으로 바위의 존재가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생각하자, 멀리 떨어진 바위의 영기가 흩어지며 바스러질 것처럼 존재감이 희미해졌다.
그 순간.
번쩍- 콰과쾅!!!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엄청난 뇌전이 인식하지도 못할 만큼 빠르게 생성되더니 준혁을 향해 내리쳤다.
쾅!!
무영기로 수행을 숨기고 있었음에도 계면의 압박이 시작되자, 준혁은 바위로 향하던 의식을 뇌전으로 옮기며 재빠르게 대응했다.
번쩍-
콰쾅!!
첫 공격에 준혁의 존재를 말살하지 못한 것이 분했는지, 계면의 압박은 더욱더 강해졌고, 수십 가닥으로 분화하며 떨어져 내렸다.
그제야 준혁은 자신이 고차원의 정신세계에 진입했고, 그것을 계면이 막아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 아쉽구나.’
만약 인계가 아닌 선계에서 이번 고양감을 느끼게 되었다면, 자신은 한 차원 높은 무언가가 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예상이 들어맞듯, 현실을 인식하며 가득 차올랐던 고양감이 가라앉기 시작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뇌전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계면의 압박이 전부 사라지자, 준혁은 아쉬움이 가득한 손을 앞으로 뻗어 세상을 움켜쥘 듯 허공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조금 전 그 감각을 조금이라도 남겨보겠다는 듯이 말이다.
***
준혁이 계면의 압박에 대응하고 있던 그 시각.
“노도! 방금 느끼셨습니까?”
하얀 수염을 발끝까지 기른 노인이 거대한 산처럼 솟아있는 뾰족한 첨탑을 올려다보고 있던 청년에게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첨탑의 꼭대기만 노려보고 있던 청년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첨탑의 끝에 달린 바늘이 미세하게 움직이자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방금 느끼신 것이 맞습니다. 누군가 자격을 갖추지도 않은 채 삼청의 좌에 앉으려 했습니다.”
첨탑을 바라보던 청년의 말에 하얀 수염의 노인이 두 눈을 치켜뜨며 경악을 내뱉었다.
“설마 누군가 의식을 주관한 거란 말입니까? 누가요? 지금 남아있는 자리가 없다는 건 모두가 알 텐데. 누가 감히 겁도 없이 그 자리를 탐낸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모든 과정을 생략한 채 접근하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두 눈을 부릅떴던 노인의 표정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게 가능한 것입니까?”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어엇! 아니 그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다시 첨탑의 끝으로 시선을 옮긴 청년이 놀랍다는 듯 말을 뱉어냈다.
“반대인 것 같습니다.”
“반대라니 무슨 말입니까?”
청년 역시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누군가 접근한 게 아닌…. 삼청의 기운이 무언가에 반응한 것 같습니다.”
그러더니 고개를 홱 돌려 어딘가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런! 어르신들께서도 이상을 알아차린 것 같습니다. 어서 가봐야겠습니다!”
“이런 씨부럴! 왜 하필 내가 자리를 맡은 이때!”
잠시 후 청년과 노인이 안개처럼 희미해지다가 빛 꼬리를 남기고는 사라져버렸다.
적의 침입을 막지 못한 경비병처럼 초조한 기색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