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221화 (221/408)

221화. 신악(神惡) (3)

“말도 안 되는군.”

또 한 번 화신목영으로 공간 갈라짐을 피한 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초팔을 흡수해 초감각이 극대화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연형기 후기에 올라 영기 민감도까지 상승했거늘, 핏빛 원영이 어떤 방식으로 능력을 발휘하는지 전혀 감을 잡지도 못하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할 수 없지, 시간을 들여 천천히, 이런!”

그렇다고 급하게 움직이기보단 상대에 대해 파악하는 게 먼저라고 여긴 준혁은 기감을 유형화시키다가 화들짝 놀라 바람으로 흩어졌다.

그리고는 한참 떨어진 곳에 천둥이 치듯 뇌성과 함께 나타났다.

“정말,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런 능력을 사용하다니.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만약 자신이 화신목영을 비롯한 여러 가지 둔술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없었다면 이미 반으로 갈라져 바닥을 나뒹굴었을 것이 분명했다.

이곳이 의식 공간만 아니었다면, 조금 무리가 가더라도 용천무의 날개를 착용해 공간의 틈에 숨어들어 천천히 조사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때 준혁의 기감에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었다.

“아! 무한한 것이 아니었구나?”

어느새 입가를 끌어올린 준혁은 또 한 번 공격을 회피하면서 핏빛 원영 곁으로 최대한 다가가 기감을 유형화시켰다.

“역시.”

준혁이 발견한 것.

그건 핏빛 원영이 공간을 가르는 특수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그 크기가 미세하지만 조금씩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그 말인즉, 원영의 공격은 피하다 보면 자연스레 해결된다는 말과 같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식으로 상황을 모면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아무리 이곳이 의식 공간이라고는 하나, 핏빛 원영의 공격은 너무 압도적인 능력.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파악하고 싶었고, 만약 그러지 못한다 해도 최소한 어떤 원리로 영기가 움직이는지 알고 싶었다.

만약 그 원리를 깨우칠 수만 있다면, 각종 술법을 수결 없이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왠지 그저 회피하는 게 세 번째 시험일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스걱-

“그럼 네 정체를 말해 보려무나!”

그렇게 연속되던 공간 가르기를 둔술로 무력화하길 정확히 여덟 번째.

준혁의 발끝에서 금빛 실이 빛살처럼 쏘아져 나가 핏빛 원영 아래 원진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

공간 가르기 공격이 계속되는 동안, 차곡차곡 지면으로 기운을 축적해 왔던 준혁이 영기파동을 퍼트리며 혈단법을 운용하자, 금빛 원진이 나타나 핏빛 원영을 둘러싸 버렸다.

그리고는 원진 위로 금빛 문자들이 너울대듯 나타나더니 가늘게 변하며 새장처럼 원영을 압박해 들어갔다.

스걱-

하지만 원영의 가벼운 손짓에 완성되어가던 금빛 진법이 반으로 갈라지며 영기가 흩어졌다.

“어림없지!”

하지만 그런 상황 역시 이미 예상하던 일.

준혁이 빠르게 수결을 맺으며 영력을 움직이자 끊어졌던 금빛 실들이 엿가락처럼 늘어나 다시 달라붙으며 진법이 완성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끼이이이-

핏빛 원영으로부터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원영의 몸이 퍼엉 하고 터져나갔다.

“도망치려는 것이냐?!”

그 모습에 긴장한 채 대기하고 있던 준혁은 재빨리 수결을 맺어 양손을 합장했고, 그 순간 금빛 원진이 그물처럼 사방으로 퍼지며 방울져 날아가던 핏빛 원영의 흔적을 모조리 막아섰다.

그리고는 준혁의 의지에 따라, 피처럼 붉은 방울들을 잡고 있던 그물이 금빛으로 빛나며 그 기운들을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구속해 버렸다.

외부에서 핏빛 원영의 움직임을 살피는 것으로는 영기의 흐름을 알 수 없었으니, 기운 자체를 혈단법으로 붙잡아 둔 채 그 특성을 파악하려는 의도였다.

그 순간 준혁으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이건?”

혈단법에 붙잡힌 핏빛 원영의 흔적이 순식간에 증발하듯 금빛 진법에 스며들더니, 통제할 틈도 없이 준혁의 몸 안으로 흡수돼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내 의지를 벗어났다?”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보다 더 세밀하게 조종할 수 있던 혈단법의 금빛 실로 만든 진법.

그런 진법의 기운이 준혁의 의지를 역행하듯 핏빛 원영을 흡수해 버린 것이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원래 내 정혈이라도 되는 것처럼 흡수됐다?’

혈단법으로 붙잡아 둔 채 그 특성을 살피려고만 했지, 어떤 기운인지 모를 그것을 몸 안으로 흡수할 생각은 없었던 준혁으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보다 더 당황한 목소리가 의식 공간에 울려 퍼졌다.

“천혈(天血)을 흡수하다니? 이런 일이 가능할 줄이야.”

‘천혈?’

공천귀가 말했던 천혈이라는 것이 천혈족의 혈맥을 의미하는 줄 알았던 준혁은 독고제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잠시 후, 혈단법을 운용해 몸 안을 살펴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고개를 들어 텅 빈 허공에 외쳤다.

“방금 이것이 신악이라 불리던 천혈이란 말입니까?”

-신악? 감히 누가 고귀한 피를 악(惡)이라 칭하는가!! 신악이 아닌 신성(神聖)이다!

준혁의 말에 흥분했는지, 모습을 감추었던 독고제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나타났다.

얼굴에 감정은 드러나지 않았으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건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마선 중 한 명이 하는 말을 들었을 뿐, 정확한 건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마선? 하긴 그놈들은 그리 말하겠지. 그놈들에게 천혈이란 사신의 힘과 다름없으니 그리 표현한 것이겠지.”

여전히 기분 나쁘다는 듯 미세하게 입술을 비죽이던 독고제는 준혁을 말없이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좋다. 의도한 방향은 아니지만, 그대가 세 번째 시험마저 통과했다고 인정하겠다. 그리고 정식으로 천혈을 그대에게 인도하지.”

독고제의 이마에서 무언가 반짝인다 싶은 순간, 준혁의 심장 언저리가 시큰하게 묵직해졌다.

“윽….”

그러는 사이 독고제의 입에서 설명이 흘러나왔다.

“천혈은 우리 천혈족의 근원이다.”

사명을 지킨다는 듯 결연한 표정의 독고제.

“거인 놈들이 중천에서 태어난 하등 종자라면 우리는 상천에서 내려온 위대한 종족이라는 증표이기도 하지.”

지구를 하천(下天)이라 부르진 않지만, 선계를 중천(中天)이라 표현한다는 건 준혁도 알고 있던 사실.

‘상천(上天)이라고?’

“중천 위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말입니까? 설마 삼선경을 넘어서면 그곳으로 비승할 수 있는 겁니까?”

까마득한 얘기라 실감할 순 없었지만, 절로 궁금증이 일어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랬다면 우리가 중천에 머물러있었겠느냐? 그곳은 닿을 수 없는 신계(神界)라 부르는 곳이다. 독고천께서 천기를 다스리며 막연하게 느끼셨던 것뿐…. 우리도 자세한 걸 알진 못한다.”

“아.”

“궁금한 것이 있거늘 나중에 묻고, 우선은 천혈에 대해 알려주지. 그런 신계의 증표이자 우리의 근원인 천혈은 그 기원만큼이나 신비하고 다루기 어려운 권능이다. 다만 제대로 성장시키기만 한다면 그 어떤 것도 그 앞에선 의미 없는 것이 돼버리지.”

‘성장?’

준혁이 의문을 가지려는 찰나, 독고제는 천혈이 어떤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어떤 식으로 성장시켜야 하는지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정혈을 먹이로 키워야 한다라….’

그 방법이 너무나 해괴해 절로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 때, 독고제가 설명을 마치며 충고의 말을 건넸다.

“그리고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 하나. 천혈에 잡아먹히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그 힘에 매료되어 감당할 수 없게 성장시킨다면…. 그 순간이 그대의 마지막이 될 테니까.”

일련의 설명과 대화가 마무리되자 준혁은 독고제의 안배, 그러니까 천혈족의 마지막 안배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의 피로 만들어진 심영근을 이은 후인에게 종족의 근원이나 마찬가지인 천혈을 인도하는 것.

그것 때문에 독고제는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에서도 이 같은 안배를 준비한 것이었다.

‘그래 봐야 죽고 나면 덧없는 것을.’

솔직히 준혁은 독고제나 다른 영수족의 대를 잇겠다는 욕심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들이야 영근을 가지고 태어나도 수백 년을 사는 게 대부분이었기에, 후손에 대한 집착이 남다르다고는 하나, 이미 영원불멸하는 이들에게 후손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또한 후손을 키우고 힘을 남겨줄 것이라면, 지목족처럼 뿌리를 남겨 온전한 그들의 종(種)을 남기는 게 맞는 처사였다.

‘신선 같은 능력을 갖췄다 하여 신선경이라 부를지언정, 이들 역시 세상을 유지하는 하나의 생명체에 불과할 뿐이란 뜻인가?’

상념에 빠져들던 준혁은 그들의 행태가 유전자에 새겨진 자연계 생명의 본능이겠다고 생각하며 수긍해버렸다.

그때 자신의 과제를 해결했다는 듯 독고제가 조금은 편안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대는 혹시 운명이라는 말을 믿는가?”

“믿지 않습니다. 지금의 제 행동이 저의 미래를 결정짓는 것이지, 정해진 것이 무어 있겠습니까?”

준혁에게서 확고한 말이 나오자 독고제가 처음으로 감정이 섞인 얼굴로 살짝 웃었다.

“독고천…. 그분께선 천기를 조종해 나를 남겨두었었네. 그리고 내가 깨어날 때, 우리의 과오를 바로잡기 위해 남겨놓은 물건도 함께 깨어나도록 하셨지.”

“과오라….”

“우리가 거인족과 자멸했던 건, 그것들이 영근이라는 걸 퍼트려 세력을 급속도로 키우기 시작하자, 조급한 마음에 그것들을 따라 우리의 근원을 분산시켜 세상에 퍼트렸기 때문이었지.”

‘과연 그럴까? 그렇게 대응하지 않았다면 진작 잡아먹히고 말았을 텐데.’

과거에 만약이란 경우의 수는 없었지만, 준혁은 독고제의 말에 수긍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독고제의 말은 공감을 바라는 것이 아닌 넋두리에 가까운 것.

그는 준혁의 반응에는 상관없다는 듯 말을 계속했다.

“독고천께선 그 힘들을 전부 회수해 내 대(代)에 이르러 다시 한번 천혈족의 번영을 정해 놓으셨지.”

“정하셨다 함은?”

“말 그대로네. 천기를 움직여 운명을 짜놓으신 거지. 내가 태어나 천혈족의 모든 걸 계승한 후, 나와 함께 태어날 식아를 가지고 마선기와 옅어진 혈맥의 힘을 모아 다시 한번 천혈족이 번영할 수 있게 말이네.”

‘식아?’

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하지만 식아는 정해진 운명과 다르게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지.”

한탄스럽다는 듯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뱉은 독고제를 보며 준혁은 정신을 단(丹)으로 집중하고 있었다.

‘백호 역시 식아에 대해 알고 있었다. 내 몸 안에 있다는 것 역시. 헌데 이자는 전혀 모르는 것 같지 않은가? 아…!’

어렴풋이 무엇 때문인지 알 것 같았다.

‘백호는 온전한 본체를 가진 채로 스스로를 봉인한 것이었고, 이자는 의식만 남아 있는 것이라 그런 것이구나.’

그것과 더불어, 준혁의 혼이 백호를 만났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해져, 의식 공간에서 자신을 완벽하게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식아가 무엇입니까?”

독고제는 준혁을 잠시 응시하다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마선기를 이용해 만든 마선들…. 그것들의 힘을 전부 회수하기 위해 만들어진 최종 전투 법기라네.”

‘아!’

준혁은 절로 몸서리가 쳐지는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것이 전부 뒤집히는 것 같았다.

‘다른 마선들이 특수한 권능을 부여받았듯, 포식(捕食)이라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조금 특별한 마선 법기인 줄 알았더니. 처음부터 마선들을 회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니.’

“내가 왜 운명이란 말을 했는지 알겠는가?”

“경청하겠습니다.”

“원래대로라면 난 식아를 이용해 세상에 흩어진 천혈족의 힘을 회수한 후, 종족의 번영을 이루어야 했을 테지만, 보다시피 지금 이런 모습이네. 그래서 자네에게 부탁을 하고 싶네.”

부탁이 무엇인지 너무 뻔했기에 준혁은 침묵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식아를 찾아, 세상에 흩어진 마선기와 혈맥의 힘을 회수해주게. 그리고 그대가 천혈족의 수장이 되어 다시 한번 종족을 번영시켜주시게나.”

어느새 독고제의 시선은 준혁의 꿰뚫듯 빛나고 있었다.

“비틀려버린 운명. 그것을 그대가 바로잡아주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