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독고제 (2)
-그분이 남기신 안배…. 그곳에는 적지 않은 위험이 도사릴 것입니다. 부디 뜻하는 바를 이루시길 바랍니다.
“더 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수사라면 충분히 잘해나갈 거라 믿습니다.
프스스-
마지막 인사를 전한 청룡 후인이 먼지처럼 흩어졌다.
그러더니 한줄기 푸른빛으로 변해 두 도마뱀의 몸속으로 파고들며 사라졌다.
그 모습에 준혁은 기감을 유형화시켜 두 도마뱀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금빛 실로 감싼 후, 영수대에 넣어버렸다.
지금까지의 대화를 미루어 짐작하자면 충분히 신용이 가는 자였지만, 혹시나 도마뱀 영수들에게 힘을 나눠준 것이 아닌, 백호가 그랬던 것처럼 장난질을 칠 수도 있었기에 작은 의심은 남겨두었다.
그리고는 자신을 감싸고 있는 무영기 밖, 영기의 밀도를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확실히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다.’
보통 수행을 올릴 때 모여드는 영기구름에 비한다면 지금 무영기로 만들어진 구체 밖의 영기는 초고밀도로 압축된 상태였다.
수행 상승을 강제로 멈추려 한다면 자연스럽게 흩어져 버렸어야 할 영기가, 마치 할 일이 있다는 듯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도 범상치 않았다.
그것이 오행신기로 인해 네 사신의 기운이 외부를 자극해 만들어진 현상인지, 아니면 돈오에 들며 깨달음으로 인해 모여든 영기이기 때문인지는 준혁도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 하나는, 마치 지상과제가 있는 것처럼 준혁의 수행을 강제로 올리기 전까지는 해소되지 않을 힘이란 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영기 뭉침을 보는 준혁의 마음은 편하질 않았다.
‘여기서 더 수행이 올라가면….’
연형기에 이르러 무영기라는 힘으로 계면의 압박을 벗어나고 있다고는 하나, 만약 수행이 더 올라가면 어떻게 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
‘버티지 못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
수행에 비례해 계면의 압박이 강해질 건 쉽게 예상할 수 있었지만, 정확히 그 강도를 짐작하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막말로 수행이 올라 초기가 중기가 되었을 때 늘어난 수행에 비례해 계면의 압박이 강해지는 게 아니라, 그것에 제곱해, 혹은 수십 배 강력해질지 어떻게 가늠할 수 있단 말인가?
‘무작정 받아들이는 건 답이 아니다.’
거기에 더해, 수행을 올리는 과정에서 계면의 압박을 해소하는 것도 문제였다.
‘그렇다고 더는 시간을 끌 순 없는 일. 우선을 영기를 분산시키는 것부터 시작하자.’
고민을 거듭하던 준혁은 결국 직접 부딪쳐봐야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리고는 마음을 먹은 순간.
스팟- 쾅!
자신을 감싸고 있던 무영기로 이루어진 구체를 제거했다.
“오라!”
***
수백, 수천 배 압축된 영기를 머금은 바닷물이 감싸고 있는 구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구체를 지켜보던 아마르곤은 왠지 모를 두근거림에 정신을 집중했다.
심상의 끈을 통해 준혁이 무사하다는 건 느낄 수 있었지만, 청룡 후인이 모종의 일을 벌일 듯이 준혁에게 흡수되어 사라졌기에 안심하고 지켜보질 못했다.
“너무 오래 걸리는구나. 혹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 테지?”
혼잣말로 마음을 다독인 아마르곤이 또 한 번 손끝에서 꽃잎을 만들어 조심스럽게 준혁을 감싼 구체로 날려 보냈다.
무영기로 만들어진 구체에 자신의 신체 일부가 닿을 때마다 작지 않은 충격이 전해졌지만, 아무것도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내부의 상황 때문에 뭐라도 해야만 했다.
콰앙!
그때 요지부동이던 구체가 급격하게 흔들리더니 폭풍처럼 터져 나갔다.
“이건!”
구체 안으로 파고들기 위해 압축되고 또 압축되던 영기가 폭발에 사방으로 퍼져나가더니, 돌진하는 병사처럼 준혁을 향해 밀려들기 시작했다.
“시작하는구나!”
고도로 압축되었던 영기가 분쇄되며 흡수하기 적당한 밀도로 떨어지자, 그것이 준혁의 노림수임을 깨달은 아마르곤은 황급히 자리를 이탈했다.
잠시 후, 수십 킬로를 물러난 후에야, 준혁 주위 바다가 텅 빈 채로 영기 뭉침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모습을 보고 넋을 놓아야 했다.
“대단하구나.”
바닷물에 녹아있던 고밀도의 영기가 형체를 갖춘 채 준혁을 에워싼 것도 대단했지만, 그 압력 속에서 버티고 있는 준혁은 더 대단했다.
“이미 최수사는 한 단계 성장했구나….”
‘나는 여전히 이 자리에 머물고 있는 것을….’
처음 준혁을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믿기지 않는 결과이며, 동시에 부끄러워지는 일이기도 했다.
그때 준혁 주변 바다가 회오리치기 시작하더니 그곳에서 또 다른 영기 뭉침 현상이 발생했다.
그리고는 마치 천벌을 내리듯 뇌전을 발출했다.
번쩍- 콰과쾅!!
뇌전은 물속에서도 형태를 잃지 않고 준혁을 직격했다.
하지만 뇌전이 준혁의 몸에 닿기 직전, 하얀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몸을 부딪쳐 막았다.
파스륵-
그러자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뇌전이 만들어졌고, 거기에 반응하듯 백호, 현무, 주작의 환영이 번갈아 가며 맨몸으로 뇌전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계면의 압박이 강해지자, 어느새 검은 기운을 풀풀 날리는 마족 전영이 나타나 그들을 보조했다.
유일하게 청룡의 환영만이 아직 완성되지 못한 듯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
번쩍- 콰과쾅!
도대체 얼마나 많은 뇌전이 내리쳤는지 모르지만, 아마르곤의 눈엔 어느새 영기 뭉침을 전부 흡수한 준혁만이 보였다.
그는 신중한 표정으로 가부좌를 한 채 눈을 감고 있었는데, 마지막 고비를 눈앞에 둔 듯 한껏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단번에 화신기에 오르려는 것인가….”
준혁에게서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기운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기세였다.
자신의 친우이자 여왕인 스퀘타가 전심전력을 다할 때보다, 가만히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준혁이 더 거대하고 위압감이 느껴졌다.
“시작인가?”
그때, 가만히 앉아 있던 준혁의 몸 위로 금빛 광채가 빛나기 시작했다.
금빛 광채는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기운을 아우르는 듯 따뜻하면서도 흉포하기 그지없었다.
그와 동시에 준혁이 자리한 곳에서 조금 떨어진 위쪽으로 지금까지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양의 영기가 뭉치고 있었다.
마치, 한 발만 더 나아간다면 단번에 쳐죽이고 말겠다는 의지를 가득 담은 듯이.
“최수사…. 부디 잘 이겨내길 바라, 허! 저런 선택을!”
아마르곤이 간절한 마음을 담아, 준혁이 계면의 압박을 이겨내길 기도하는 그때.
가부좌하고 있던 준혁이 눈을 번쩍 뜨며 급하게 수결을 맺자, 그가 앉아 있던 자리를 중심으로 금빛 실이 미친 듯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그리고는 금빛 실들이 서로 뭉치기 시작하더니 거대한 꽃잎 모양으로 변했다, 그리고는 준혁을 둘러싸고 연꽃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직후, 준혁이 수결을 재차 바꾸자.
회전하던 금빛 연꽃잎이 봉우리를 닫는 연꽃처럼 오므라들더니 준혁을 완벽하게 감싸버렸다.
그리고 준혁의 몸이 완벽하게 보호된다 싶은 순간.
촤르르륵-
수십 개의 검은 사슬이 나타나더니 준혁의 몸을 칭칭 감으며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거기에 호응하듯 머리 위에 머물던 영기 뭉침이 스르륵 무너지듯 흩어졌고. 어느새 바다엔 고요가 찾아들었다.
***
“후우….”
계면의 압박을 이겨내며 수행을 올리는 일은 준혁의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그저 단순하게 계면이 만들어낸 뇌전을 막아서면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현상이었을 뿐, 실제는 준혁 주위의 영기가 불안정하게 심기체(心氣體)를 뒤흔들었고, 그로 인해 어떤 방어 술법도 사용할 수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다행히 마족의 전영술을 비롯해 사신의 전영을 만들어 그 자체를 방패로 사용하긴 했지만, 전영이 충격을 받을 때마다 준혁 역시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다.
그래서 마지막엔 스스로 수행증진을 묶을 수밖에 없었다.
‘후기에 간신히 발을 들인 것인가?’
네 사신에 더해 마기가 조화를 이룬 오행신기는 준혁의 생각보다 대단했다.
몸속 기운이 조화를 이루자 초고밀도의 영기들이 마치 솜에 흡수되는 물처럼 빨려 들어왔고, 순식간에 연형기 중기를 넘어 후기까지 도달해 버렸다.
물론 강제로 멈추지 않았다면 그게 끝은 아니었을 테지만, 준혁은 아쉽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수사! 이제 화신기에 오르신 겁니까?!”
그때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아마르곤이 황급히 다가와 질문했고, 준혁은 고개를 흔들어 자신의 상태를 알려주었다.
“아닙니다. 발을 내밀기엔 너무 위험부담이 크더군요.”
“아! 그렇다면 조금 전 그건….”
아마르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준혁이 싱긋 웃어 보였다.
“그렇습니다. 현무의 힘을 이용해 수행이 더는 상승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물론 현무 일족의 꼬마처럼 무식한 방법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기에, 준혁이 원한다면 언제든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순 있었다.
“아…. 그렇군요.”
“어째 저보다 더 아쉬워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마르곤은 준혁의 눈치를 살짝 보더니, 시선을 돌렸다.
연형기 초기에서 후기로 단번에 도약한 건 어떤 의미로 대단한 것이었기에 축하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한편으론 계면의 방해로 화신기에 진입하지 못했으니 안타까운 상황.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 몰라 어벙벙거리던 그는 농담조로 빈말을 내뱉었다.
“그야 수사가 화신기에 오르면 저를 끌어올려 주었을 테니 아쉽지 않겠습니까?”
“하하,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내 수사를 비롯해 몇몇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준혁이 아마르곤의 농담에 호탕하게 웃다가 순간 진지한 눈빛으로 바뀌었다.
“무슨 도움을 말입니까?”
“수사도 기목청이 가지고 있던 지목족 혈맥의 힘을 경험하신 적이 있지요?”
“물론입니다. 그걸로 수행증진 효과를 본 이들이 저뿐이겠습니까?”
어서 뒷얘기를 풀어보란 듯 아마르곤의 눈에 다급함이 서리자, 준혁이 한 손을 천천히 들어 올리더니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그 혈맥의 힘을 온전하게 발휘하기 위해선 영역을 만들 수 있어야 된다는 건 아시지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그건 삼경, 그러니까 최소한 소천경에는 이르러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닙니까? 설마?!”
아마르곤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지자 준혁이 손을 든 자세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완성되진 않았지만, 오행신기로 인해 그 힘을 살짝 엿볼 수 있었습니다. 보시겠습니까?”
준혁의 물음이 끝나기도 전, 아마르곤이 급하게 고갤 끄덕였다.
그러자 준혁이 위로 치켜든 손으로 영력을 움직이며, 나머지 손은 가슴 앞으로 가져와 벽을 짚듯 꾹꾹 눌러 수결을 맺었다.
그런 후 입술을 살짝 벌리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영역 선포.”
화아학-
그 순간, 준혁의 손바닥 위로 투명한 영력이 발출되더니 반경 3미터가량의 작은 공간을 감싸기 시작했다.
평범한 영기막이라고 할 수도 없고, 보호막과도 궤를 달리하는 원구 형태의 공간.
“이! 이것이!”
공간 안에 존재하는 모든 기운이 마치 주인의 명령을 듣겠다는 듯 준혁의 기분에 따라 살랑살랑 움직이는듯한 느낌이 전해졌다.
작고 소중한 영역이 인계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